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방주>의 플롯은 매력적이다. 제목에서 아이러니를 자아내는 반전도 — 뇌 정지까진 아니지만 — 좋았다. 다만,

극한의 클로즈드 서클에서 군상 묘사가 단순하다. 생판 남도(물론 끼어있지만) 아니고 친구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이다. 시체와 함께 물리적으로 고립된 상황, 도덕성과 자존감의 밑바닥을 파고드는 일련의 전개는 밋밋하다 못해 조금 세게 말하면 유치하다.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전체 페이지를 보고 (종이책이 350페이지가 넘는다) 내밀한 전개를 기대했으나 기계적으로 페이지가 흘러가니 문제집 정답 확인하듯 마지막으로 건너뛸까 싶게 설정이 무색하다. (페이지 다 어디에 쓴 겁니까...) 트릭 사수를 위해 다른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는 의도라기엔 작법도 평이하다.

현대 본격물에서 기상천외한 트릭이 나오기는 힘들다. <미스터리 클락>처럼 갈 데까지 가보자, 작정한 게 아니라면. <미스터리 클락>은 도.대.체.가.알.아.먹.을.수.가. 없.다. 그래도 정신 나간 트릭에 정신 나간 캐릭터 보는 맛은 있다. <녹스 머신>도 외계어가 쏟아지는 부분은 정신이 아득하지만, 트릭을 엮는 메시지 — 지식 탐구의 열망, 신본격의 미래, 고전에 대한 경외 — 가 있다. 트릭 자체가 아니라 트릭이 들어간 ‘이야기‘를 한다. <방주>에는 개연성 이전에 이야기가 부족하다.

본격 추리물 역시 문학성을 담보해야 미래가 있다는 취지에 작가들은 입을 모은다. <눈먼 자들의 도시> 정도는 아니라도 <방주>만의 (포스트)아포칼립스를 풀어갔다면 무의미한 페이지도 줄고 제목의 여운도 한층 깊었을 텐데. 뭐 역자의 말대로 후던잇+와이던잇을 결합한 오락 소설로 일독했으니 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수수께끼를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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