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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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 없는 소녀가 죽었다. 능소화나무 아래서. 

꾹꾹 눌러오던 각자의 기억을 쏟아내며 모두가 나오코를 죽였다고 고백한다. 그 기억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장기가 휘날리던 기차역을 지나 남태평양 어느 섬으로까지 거슬러 간다. 2차 세계대전 말 '남태평양의 섬'으로만 등장하는 그곳. 이국적인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한 그곳은 <파이 이야기>의 식인섬을 떠올리게 한다.


능소화는 한여름 태양을 향해 자라고 이름처럼 하늘을 능가할 만큼 고고한 꽃이다. 태양을 삼킬 듯 피어나던 그 꽃은 떨어졌다. 남태평양의 섬에서 소녀가 묻혔을 때 하늘에서는 만다라화가 내렸다. 


소설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진 않지만, 한 가족의 치정극을 통해 패망 후 일본 사회의 부조리를 아우른다. 우리와도 맞닿아 있는 세대와 시대의 광기. 이국적이다 못해 처연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이는 일본 특유의 정서와 신앙이 꽃과 나무로 비유되어 발하는 빛깔 때문일지도. 



🖋

작렬하는 하얀빛, 하얀 태양. 

뫼르소는 총을 쐈고 나오코 꽃이 되었다.




#2

나오코는 왜 죽었는가. 

한여름 태양 아래 벌어지는 사건은 내내 마음을 짓누른다.    

노인은 퍼뜩 내뱉는다. "저기 종려나무 밑에 파묻고 갔어." 

남태평양의 섬에서 그랬듯 소녀는 묻혔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설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맞이한다.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 부활을 상징한다. 묵시록에는 어린양 옆에 흰옷을 입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다. 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옷을 빨아 희게 하였다. 그러므로 태양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라 했다.  


밀교나 국가신토와 달리 소설에 기독교적 색채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종려나무'라는, 허허로운 한마디에 내 짓눌린 마음이 희망을 찾고자 한다면 억지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은 태양 빛에 눈이 부시다 못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남을 것만 같다.


11장

꽃이다... 만다라화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 방울과 함께 바다로 흩어져 내렸다... 나는 고향 땅의 절에서 했던, 꽃을 뿌리며 부처님을 공양하던 산화 공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원체 신앙심이 약해서 내가 믿는 신이라야 그 당시 모두가 믿던 일본의 천왕뿐이었지만, 그래도 고향 땅 절에서 스님이 독경을 하며 종이꽃을 뿌리는 의식에는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종이가 아닌 진짜 꽃을 그 사람의 자취는 바다에 흩뿌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그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찐득한 꿀물 때문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붙인 자세로 저 멀리 사람의 자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연히 그것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지만, 물론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일로 괴로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 시절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전쟁이라는 대규모의 범죄에 대한 책임 따위는 이미 지나간 일로서 잊어버리고, 어떻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손을 움직이게 한 것은 보살이나 운명의 힘 따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의지였다.

아무 죄도 없는 여자애가 그곳에 죽어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멋진 장래와 느닷없이 단절된 채, 그 자리에 죽어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몹시 손해나는 일이라는 듯 항상 어둡고 무표정하고 애교도 귀염성도 없는 그 아이를 나는 항상 마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얀 빛에 불타서 나는 또 다시 나 자신을 잃었다. 단지 내 손만이 먼 옛날의 죄를 기억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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