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볼 것이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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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괜찮은 범죄/스릴러 소설을 만났구나, 기뻤다. 별 다섯을 줘도 좋겠어. 맨슨 패밀리나 옴 진리교, 인민사원 사건이 떠오르고 시각적으로는 미드 <한니발>식 장면이 그려지며 몰입하던 중, 영매가 웬 말인가. 지극히 취향의 문제지만, 신종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작가들이 갑툭 영매를 끌어들일 땐 영 당황스럽다. 2/3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과학과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은 여전히 만연하다. 영적인 힘을 빌려 이 물음에 답을 구하고 싶은 건 인간 본성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뇌과학과 더불어 명상이 각광받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해서 과학수사에 잠재의식까지, 다방면에서 '속삭이는 자'를 뒤쫓는 긴장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영매의 등장은 행간 속에서 '속삭이던' 서스펜스를 일순 내쫓았다.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듯.
사건을 위한 사건 만들기, 작위적인 설정의 2부 후반은 적잖이 맥 빠지긴 했으나 가속도가 붙던 독서에 오히려 좋은 브레이크가 된 것 같다. 아니면 바로 도나토 카리시의 다른 책을 읽느라 밤새 내 눈이 죽어났을 테니.
+ 법의학 박사 레너드 브로스의 검시 능력과 프로 정신을 높이 사는 건 좋은데 멀쩡한 이름 두고 "모두들 그를 챙 박사라고" 부르는 것도 브레이크랄까. 좀 쉬었다 <미로 속 남자>를 읽어 보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믿고 싶어 했다. 스티브는 괴물로 취급하기엔 너무나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자신들과 너무도 닮은꼴이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이자 정말로 사악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43장)
누군가를 자주 접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알고 보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법이지. — 고란 게블러
그 누구보다 그 말을 이해해야 했던 건 그녀였다. 그에게 이런 말을 던졌던 그녀였으니까. "왜냐하면 제가 바로 그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가끔씩, 그 어둠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고요." 고란 역시 수시로 그 어둠 속에 빠져들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거기서 나와 보니 뭔가가 그를 따라붙었던 것이다. 절대로 떼어 낼 수 없었던 뭔가가. — 밀라 엘레나 바스케스 (4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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