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 -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입문
다케다 세이지 지음, 박성관 옮김 / 이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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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오색의 파스텔톤이 조화를 이룬 표지. 팬톤 컬러를 소개하는 디자인 서적이나 올해 컬러 트렌드를 반영한 감성 에세이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라는, 부드러운 표지와 사뭇 다른 공격적인 제목이 눈에 띈다. "새로운 철학 입문"이라는 부제도 예사롭지 않다. 


기왕 생각난 김에 팬톤 PANTONE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팬톤에서 선정한 올해의 컬러는 밝은 노랑(일루미네이팅)과 연회색(얼티밋 그레이)이다. 팬톤은 색채 전문 기업으로 색채가 필요한 어느 산업군에서든 — 그렇다, 모든 산업군이다 —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표준이다. 컬러 커뮤니케이션에서 오류를 줄이는 역할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노란색을 두고 각양각색의 표현이 난무하여 아무 일도 되지 않을 테니.


내가 이해한 저자의 논지, '본질 관취'를 통한 '보편 인식'의 획득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나의 좁은 경험 테두리와 단편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지만, 이렇게 받아들이니 한결 이해가 쉬웠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려면 보편 인식을 획득해야'만'하고, 철학에서의 보편이란 전혀 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문화 상대주의, AI의 부상, 거기다 미증유의 팬데믹 상황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보편’은 구시대의 유물같이 느껴진다. 다양성이 우리 사회의 미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인데 본질을 통한 보편 인식의 획득(혹은 회복)이라니? 애초에 본질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이 책은 철학의 근원적인 물음으로 거슬러간다.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플라톤을 지나면 고르기아스에 이르게 된다. 서구 사상은 플라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들 한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사상의 흐름에 물꼬를 튼 것은 고르기아스의 세 가지 테제다. 이 세 가지 테제는 보편 인식을 획득하려는 철학에 비수를 꽂았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에 이르기까지 고르기아스의 테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마법의 주문 같은 귀류론을 핵심으로 하는 이 테제는 철학의 3대 수수께끼 — 인식, 존재, 언어의 수수께끼 — 로 현대 상대주의의 원천이 되어 현실 극복의 여지를 차단해버린다. 그렇다. 저자는 철저하게 반상대주의 입장에서 현대 철학은 현대 사회의 혼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한데 흥미로운 지점은 이제부터다. 고르기아스의 극악한 테제는 근대의 마지막에 이미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니체와 후설에 의해서. 두 철학자에 의해 가장 중요한 인식의 수수께끼가 해명되었다. 이는 철학과 인간 사회의 "결정적인 전회"다. 종교나 상대주의 같은 임의의 믿음이 아닌 의심 불가능한 인식의 토대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 철학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용한 탓에 지리멸렬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23). 



오독된 두 철학자

포스트모던 사상의 효시로 통하는 니체의 철학이 이 책에서 만큼은 상대주의를 반박하는 최고의 무기다. 저자는 자신의 철학 용어 ‘본체론 해체’를 통해 상대주의자들이 니체를 어떻게 오독했는지 지적한다. 상대주의는 관점에 따라 본질은 달리 보이므로 완전한 관점은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니체의 '생 세계 생성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암묵리에 본체를 상정"한 것이다. 상대주의(=회의주의) 역시 어떠한 진리(완전한 관점)를 믿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없었다.


후설 철학의 면면을 짚는 저자에게 현상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어떻게 현상학이 오해를 받고 있는지 지면을 꽤 할애하니 말이다. 저자가 이렇게나 애정을 보이니 나도 열심히 저자의 논지를 쫓는다. '내재와 초월, '에포케'. ‘노에시스-노에마', '간주간성' 등 생경한 개념은 (저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난해하기만 하다. 원인과 결과를 '역전'시키는 현상학적 태도를 설명하는데서 양자역학이 떠올랐지만 나의 어쭙잖은 식견으로 비교는 할 수 없는 노릇. 다만 인식론에서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이 양자역학만큼의 파급력이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일체의 인식은 경험 세계(주관)에서 구성된 확신이다. 한 개인의 '세계 인식'은 공통 인식이 성립하는 객관의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의 총체다. 그런데 현상학적 환원에 의하면 이 '객관의 영역' 조차 개인의 내재된 영역 '안'에 있다. 원인이 되는 외부의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인식이란 결국 ‘간주간적’ 확신의 성립이다(83). 저자는 다시 한번 상대주의를 대차게 논박한다. 객관 존재 자체와 인식의 일치조차 애당초 어불성설인데 상대주의는 이 이외의 영역 — 객관 인식이 성립하지 않는 본질 영역 — 에서 본체와 인식의 '일치'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인식은 일치가 아닌 '확신 구조'에 따른 결과다. 부정의 대상(본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주의는 자가당착일 수밖에 없다.


니체와 후설을 앞세워 저자는 고르기아스의 테제인 인식, 존재, 언어의 수수께끼를 순식간에 풀어낸다. 언어 게임의 법칙으로 본질 영역에서 본체를 해체하고 보편 인식이 가능하다는 논지까지 숨가쁘게 이어진다. 정말이지 숨이 턱까지 차는 기분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인식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쥘 수 있다는 생각에 짜릿함마저 든다. 독단론이니 토대주의니 하며 현대 철학이 후설 현상학에 얼마나 무지한지 재차 강조하는 저자. 현재의 사태를 변화시킬 계기를 마련하려면 새로운 세대의 철학도들은 반드시 후설의 텍스트를 정독하라고 주문한다.



우리 시대의 철학

푸코, 데리다, 프로이트를 비판하며 현대 사상에 대한 저자의 맹공은 이어진다. 특히 푸코는 인간 자유 조건에 대한 "소박한 착오"와 근대 사회 자체에 대한 강한 부인을 전제로 개인을 근대 사회 권력에 종속되는 주체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어떠한 대안도, 더 나은 사회 전망도 내놓지 못하는 한계는 철학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현대 사상은 임의의 가치 이념에 불과하다. 사상이나 철학이 '현실에의 대항'이라는 본질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철학이나 사상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93)


근대 사회 자체가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되다 보니, 보편 인식을 구성하는 또 다른 한 축인 자유로운 시민 사회 원리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이 원리의 기초를 다진 홉스, 루소, 헤겔의 사상을 재조명하며 저자는 자연권은 상호 승인에 근거한 근대 사회의 산물임을 피력한다. 현대 철학이 무엇을 간과하는지도 다시 한번 짚어낸다.

근데 이전의 세계에는 강력한 절대 지배 시스템만이 있었고, 자유와 인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철학이 창출해 낸 근대 사회 구상만이 인간적 자유의 의지를 서서히 확대시켜왔다. 문제는 오히려 근대 사상 쪽이 아니라 인식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제대로 극복하기 위한 보편적 사회 사상을 구상할 수 없는 현대 사상 쪽에 있다(143). 


근대 사회 권력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은 곤란하다. 저자는 권력과 폭력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권력으로 비로소 법과 정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한다. 인간 사회는 '법' 없이 폭력을 제어할 수 없으며, 또 권력 없이 '법'을 창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241). '권력=폭력=악'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버리면 루소가 말한 권력의 정통성 문제만이 남는다. 어떠한 사회가 그 통치 권력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저자는 단언한다. 인간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근대 철학에서 태동한 자유로운 시민 사회 원리 외엔 답이 없다. 그리고 시민 사회에서는 자신과는 다른 가치관을 상호 승인한다고 하는 감도가 핵심이다. 

시민 사회에서는 공동체적인 동포 감정이 아니라 시민적인 멤버십의 감도, 즉 자신과는 다른 가치관을 상호 승인한다고 하는 감도가 있어야 하고, 이 감도가 동포 감정을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적 멤버십의 육성에 실패하면, 사회는 복수의 공동성, 복수의 가치관에 의해 분열되고 그 대립에 의해 시민 사회로서의 생명을 상실한다(252). 


인식론 문제부터 사회 본질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내내 강조한 상호 승인. 나는 이를 '관용'으로 이해하고 싶다. 현대 사회는 다양성의 미덕이 아닌 관용의 미덕이 필요하다. 밀턴은 자유와 관용을 이야기하며 모두가 한마음이 될 수 있으리라 아무도 기대하지 않기에 모두를 강제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을 관용해야 한다고 했다. 책의 전반에서 강도 높게 현대 철학과 사상을 비판하고 자신의 논지를 펼치던 저자는 막바지에 이르러 묻는다. 

나는 내 이론이 유일하게 올바른 사회 이론이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 본질학의 사유를 보편적인 사회 원리로 제시하긴 했지만 이것이 참으로 보편적인 이론이라 부르기에 충분한지, 더 뛰어난 보편적 원리가 가능한지 아닌지를 사람들이 검증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293).


열린 언어 게임이라는 철학 재생의 뜻을 품은 저자에게 우리도 답을 해보자.



◎ 원탁의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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