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돼지의 낙타
엄우흠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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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작가 엄우흠과 문맥상 너무나 어색한 책의 제목 "마리의 돼지의 낙타"를 만났다. 마리와 돼지와 낙타, 그 셋이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는 동안 내 머리 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다.

 

경찰이란 직업을 가지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던 경수 아버지는, 새로운 인연과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함으로 또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경찰을 그만 두면서 커피숍에서 분식집으로, 문방구에서 통닭집으로, 재기를 위한 도전이 번번히 실패를 돌아가고, 실패만큼 빚은 쌓여만 간다. 경수 아버지가 겪은 여러번의 실패는 『마리의 돼지의 낙타』 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무동' 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한다.

 

위성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무동'은 도시에서 밀려난 실직자와 철거민들이 모여 정착하는 곳으로, 경수아버지에게는 피난처를, 경수에게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성장해가는 어릴 적 동네가 되어준다.

 

경수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이 그러하듯, 인연이란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며, 그 인연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차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연이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될 수도, 또 다른 삶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돼지의 낙타』 에서 인연이 인연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짜놓은 극본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우리의 순간적인 판단과 강하게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자연스러움이라는 가면에 가려져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는 듯 보인다. 그래서 당황스럽고, 어쩜 이렇게까지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들의 인연 이야기에 빠져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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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우뚱하며 읽었던 제목 『마리의 돼지의 낙타』 의 비밀이 드디어 밝혀졌다. 믿는다 안 믿는다의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서로를 가족의 울타리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소녀 마리와 돼지 그리고 낙타, 마리와 무동 그리고 경수아버지, 그들의 인연은 믿음에서 오해로, 죽음과 숨어버림으로 서로가 맺은 인연을 끝마친다.

『마리의 돼지의 낙타』 에는 인연이 인연으로 이어지고, 인연은 오해로 새로운 삶과 마주하게 하고, 오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번져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경수네 가족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인연이란 줄기는, 쉴새없이 뻗어나가 새로운 인연 줄기와 만나고, 그 줄기는 다시 상대를 찾아간다. 마치 이야기가 자유를 얻어 세상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듯, 그들의 인연또한 멈춤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시간으로 등장한다. 그들에게 인연은 다음 세대에 또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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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 돼지의 낙타』 를 읽으면서 나 한사람이 시작한 인연의 줄기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어디까지 뻗어나갈수 있을까? 인연이 가진 색은 어떤 빛깔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치 무동 사람들의 인연이, 인연에서 인연으로 연결되어 가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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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 돼지의 낙타』 는 그동안 읽어왔던 책과는 좀 다른 전개로 이어진다.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고, 그 관계 속에는 서로가 모르는 사이 주고 받은 상처로 무너지기도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만큼,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으며, 어떤 인연으로 관계를 형성해가는지를 따라가보는 색다른 재미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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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는 잡화점 쁘랑땅 - W-novel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구수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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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봄날, 내게로 찾아온 『봄을 기다리는 잡화점 쁘랑땅』

너무나 예쁘고 설렘이 묻어난 제목에 내 맘이 기울어 책장을 열어보고 싶은 맘이 컸던『봄을 기다리는 잡화점 쁘랑땅』프랑스어로 '봄'을 의미하는 쁘랑땅은, 핸드메이드 악세사리를 만들어 판매하는 하루의 직장이며, 소통의 창이 되는 곳이다.


하루는, 성염색체의 이상으로 생기는 터너 증후군을 앓고 있다. 대학생이 된 후에 알게 된 자신의 병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기에 이성을 사귀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사치와 같은 일상이라고 여기게 된다. 하루는, 사귄지 반년이 된 남자친구 잇세이의 프러포즈를 받고 승낙하지 못한 채 돌아온다. 자신의 가장 큰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병에 대해 말한다면, 그 또한 떠날 것임을 하루는 이미 경험했기에 망설인다.spoing3.jpg하루는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사람들을 만나고 손수 만든 악세사리를 판매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루는 잘 참아내고 자신의 일을 즐긴다. 또한 손님들의 표정과 목소리에 집중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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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귀걸이를 한쪽만 주문하는 안도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처럼 몸에 원치 않은 결점을 가진 안도는 자신의 사랑 앞에 당당하다. 귓볼이 없는 귀를 포함해서 자신을 사랑해야만 의미있는 것이라고. 안도의 사랑을 당당하다고 표현한 나는, 아마 사랑이 어렵지 않았기에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루와 안도가 원치 않은 신체의 불편함으로 상처를 받고, 사랑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선 경험을 내가 했다면, 안도의 사랑이 당당함보다는 상처받을까 하는 걱정스러움이 더 크지 않았을까 우려가 먼저 되었을 것이다.


쁘랑땅을 찾은 여대생 미쿠는, 장거리 연애와 연락이 끊긴 남자친구의 태도로 가슴앓이 중이다. 불안한 사랑 앞에서 혼란스러움으로 힘들어하는 미쿠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었고, 사랑 앞에 갈등하는 많은 이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사랑은 정해진 길이 없으며, 언제 걸림돌이 생겨 지체하게 되는지 알 수 없기에 어렵고,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사랑 앞에 직진이다.

                 

『봄을 기다리는 잡화점 쁘랑땅』은 터너 증후군을 앓는 하루와 무정자증 잇세이와의 갈등과 믿음을 바탕에 두고, 상처입은 연인들과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못한 리카코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상황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듯, 쁘랑땅을 찾는 손님들 또한 사랑도 삶도 생각도 다르기에 하루가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보면서 나는? 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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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사랑에 실패하고, 새로운 남자친구의 프러포즈 앞에 두렵다. 하루의 고민은 솔직함으로 대신하고, 그녀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잇세이에 대한 상실감과 또 다른 상처가 되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하루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며 운영하고 있는 '쁘랑땅' 안에서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을 대하면서 잇세이에 대한 상실감은 믿음으로, 자신의 병은 선택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은 선택하고 유지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을 안게 된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색을 가진다. 사랑 또한 여러 색으로 빛을 낸다. 누구와 같은 빛을 내고자 하는 것은 욕심이고 진정한 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가 가진 것을 당당하게 꺼내놓고 함께 나눌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을 의심없이 바라봐줄 수 있는 시간과 마주하는 그 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 앞에 당당한 내가 되었을 때 우리의 사랑은 빛을 낸다.

 

 보이지 않는 사랑의 색을 찾아가는 이야기 『봄을 기다리는 잡화점 쁘랑땅』 따듯한 봄날 우리 곁에 머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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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 글로벌 거지 부부 X 대만 도보 여행기
박건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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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 병문안을 갔다가 검사 시간과 맞물려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소리없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으로 스페인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20대의 한 청년은 군대를 제대하고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순례길을 한달 걸으면서 고민이 없어졌단다. 그리고는 부연설명으로 고민은 그대로 있지만, 걷는 동안 너무 힘들고 어떤 길을 만나게 될 지 모른다는보이지 않는 부담감에 고민을 할 시간도 정신도 없어졌다고 말한다.

걷기에 자신있는 나는, 커다란 베낭을 메고 순례길을 걷는 이들을 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걷는 그 행위만으로도 나에게 부러움이지만, 항상 누군가가 있는 길이 아닌, 혼자일 수도 있는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에워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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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려움이 한순간이 사라질, 부부가 함께 걸어 여행을 다녀온 '글로벌 거지 부부'의 대만 여행기를 실은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가 바로 그것이다. 험난하고 거치고 조용한 공간이라도 부부가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말소리를 들으며 걷는 그 순간, 힘들지만 얼마나 의미있을까 하는 마음에 책을 드는 순간 그들의 지나온 시간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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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가스가 아닌 땔감으로 난로를 피워 추위를 녹이는, 시골에서도 이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을 마다하지 않는, 용기있다고 하기엔 너무나 옹색한 생활을 자처하는 부부의 이야기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걸으며 여행할 수 있는 나라, 대만으로 떠날 것을 준비하고 과감하게 비행기에 오르는 부부의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68일간의 여정을 담은 글이 실린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는, 용기있는 자만이 기회를 얻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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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글로벌 거지 부부의 대만 도보 여행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용기와 밀어붙이는 강인함과 끈기에 놀라웠다. 처음 만나는 공간과 사람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 모습과 그들의 삶과 환경을 공유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대로 표출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배부르고 등 따숩고 안정된 수입이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 기준으로 잘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잘 산다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을 실천해 옮기면서 새로운 도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건우님과 아내 마키님의 여행기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를 펼치면서 글보다 사진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저렇게까지 궁상을 하는 모습에서 혀를 차다가도 용감해서 부러웠고, 처음 만난 이들과 나누는 환한 미소를 보며 편견이나 허물이 없는 이들이기에 또 한 번 부러웠다.

정해진 길도 아니고, 정해놓은 길도 아닌, 함께 걷은 이와 보폭을 맞춰 걷는 지금 이순간의 길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즐거움이며 삶의 가치인지를 알고 있는 부부의 앞날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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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숙의 나라
안휘 지음 / 상상마당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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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공주는 누구일까? 내가 배운 역사 속에서 들어본 이름이었던가. 짧은 나의 역사 지식 속에서 들어보지 못한 의순공주, 그녀는 왕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공주라는 칭호로 불리며 조선과 청의 관계를 위해 '이애숙'이란 이름 대신 불린 열여섯 꽃다운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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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란 나라는 명과 청의 간섭을 받고, 사대부는 명이냐 청이냐를 두고 명분을 앞세우며 세력 다툼을 하던 그 때였다. 스스로 바로 서지 못한 그 때 조선은 백성의 안위가 아닌 누가 먼저 권력을 잡느냐가 먼저였으며, 어느 나라에게 기대고 있어야 조선이 힘을 키울 수 있는지로 나라가 어지럽던 그 때였다. 그 때 이애숙은 조선과 왕으로부터 조선의 나라에서 청으로 오랑캐의 부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어명을 받는다. 왕의 딸이라는 가면을 쓰고 '의순공주'라는 새로운 신분을 안고 그렇게 청의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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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한 사내가 보낸 시 한 구절에 가슴에 설레는 여리고 여린 소녀 애숙은 나라의 처지는 모르나 나랏일하는 아비의 입장이 있고, 곧 나라의 부름을 받게 될 오라비를 위해 청의 수장인 섭정왕과 혼인을 한다. 오랑캐의 부인이 된다는 가족의 우려와은 달리, 섭정왕의 애정과 따듯한 미소, 궁녀 하란과 피양구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청의 생활은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애속의 삶의 달콤함은 그것이 끝이었나 보다. 권력의 압력과 다수의 전쟁 그리고 시기심을 받던 섭정왕은 결혼 7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고, 뱃속 태아는 사산하게 된다. 애숙은 청의 관습대로 동생의 첩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만, 그 또한 얼마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고, 세번째 남편을 맞게 된다.

섭정왕의 정실부인으로 살았던 7개월의 애숙은 따듯했다. 피를 토하는 섭정왕의 건강에 대한 걱정은 있었지만 고향을 떠난 여인의 삶치고는 따듯하고 평온했다. 애숙은 낯선 만주어 사이에서 들리는 조선말을 따라가며 만난 여인들의 삶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나라가 힘이 없어 포로로 끌려와 갖은 수모를 당하고도 목숨까지 위협받으며 숨어 살아야 하는 조선의 여인들. 그들을 위해 애숙은 자신이 고이 안고 있던 섭정왕이 주신 마지막 패물까지 팔아 그들이 조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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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숙은 조선의 백성이다. 조선이란 나라를 위해 청으로 보내진, 가엾고도 고맙고, 미안하고도 애잔한 조선의 여인이고 딸이다. 애숙은 아버지의 부탁과 청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그 설렘과 복받쳐오르는 따듯함에 행복했다. 조선 땅만 밟으면 그녀의 고단했던 삶은 눈녹듯 녹아내리고 따듯한 봄날이 오리라 여겼다. 조선이란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진 귀한 여인이니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녀가 조선의 땅을 밟은 것을 두고, 명분을 논하고 왕실의 기강을 헤쳤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버지를 비롯한 관료들과 오라버니들을 관직에서 내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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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부모의곁을 떠나보낸 소녀보다 조선이란나라의 존폐만을 위했던 사대부들은 애숙의 가짜묘를 만들어 죽은 사람으로 잊혀지도록 만든다.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의 부인으로 바쳤다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고, 급기야는 공주는 보호하고 종친의 자녀를 보냈다는 소문으로 전전긍긍하던 궁은 청으로 가는 길에 죽음을 선택한 애숙의 묘를 만들게 된 것이다. 가짜묘. 애숙의 어미가 청으로 떠나는 딸에게 선물한 족두리를, 딸을 그리워하는 어미에게 증표로 다시 보낸 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그 족두리를 묻어 만든 '족두리묘'. 이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청의 여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애숙이 돌아와 마주한 것이 자신의 가짜 묘라니. 조선이란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살아갔던 여인을 조선은 또다시 조선의 안위만을 위해 그녀를 버린다. 애숙은 꿈에만 그리던 조선 땅, 그 땅에서 다시 눈물을 흘려야만 했으며, 조선이 버린 많은 여인들을 보듬으며, 그들의 삶 또한 자신과 매 한가지 임에 가슴을 쥐어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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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있기에 세워진 것이 나라이건만, 어찌 나라가 백성을 버릴 수 있는지. 지금 이 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이니, 나라는 어찌 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화해도 바뀌지 않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라가 힘이 없어 포로로 잡혀갔다 만신창이의 몸이라도 내 나라, 내 가족이기에 목숨 다해 돌아온 그들에게 냉대와 차별만이라니, 이것이야 말로 개탄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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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공주도 족두리묘도 몰랐던 나에게 『애숙의 나라』 는 역사의 뒷안길 한 쪽을 내어주었다. 나약하여 자기 나라 백성마저도 지키지 못했던, 실리와 명분만을 앞세우며 희생양으로 삼았던 조선과 사대부, 그들이 세운 나라 위에 또 다시 세워진 대한민국. 나라와 백성이 공생하기 위한 기준이 바로 세워야 할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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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버텨온 백성들, 나라에 닥친 위기마다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은 많은 백성들,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까지도 보듬어 안으려는백성들, 그 백성들이 있었기에 나라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나라의 부름으로 기꺼이 오랑캐의 부인이 되기를 자처한 여인, 애숙 그리고 의순공주.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녀를 지켜내지 못한 아비의 한을 죽어서도 지키겠노라 약조한 아버지 이개윤의 삶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족두리묘와 그 곁을 지키는 아버지 이개윤의묘 앞에 따듯한 봄날 피어나는 노고초(老姑草 할미꽃)를 살며서 내려놓는다.             aesok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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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없는 소녀
황희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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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출소를 한다는 그를 막기 위한 청원이 이루어졌다. 작고 여린 초등학생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울분에 차게 만들었던 그가 이제 사회로 돌아올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그에게는 하루의 재미요, 실수라 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와 그의 가족에게는 평생의 상처이며 눈물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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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대상의 책을 좋아하는 나는,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선택한 책이 『내일이 없는 소녀』 이다. 꿈을 꾸지 못하는, 꿈초자 없는 청소년의 이야기 정도로 여긴 나의 기대는, 첫장을 열면서 나의 기대 이상으로 훅~ 하고 들어오는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잔류사념과 평형세계.

너무나 낯선 두 단어는, 내일이 없는 소녀 도이와 그의 곁에 선 지석, 석윤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되고, 시간이 되고, 공간을 만들어준다.

 

도이는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 등굣길에 술에 취한 성인 남자로부터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끌어 안고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열여덟 꿈조차 사치가 된 소녀이다. 도이의 지난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지석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상처투성이다. 지석이는 의붓아버지와 친형에게 성적 학대와 놀이감으로 전락한 채 죽지 못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단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열여덟 소년이다. 석윤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터져나온 어머니의 간절함과 아들의 삶조차 불필요하게 여겼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외로운 소년이다. 살아있다는것만으로도 고통이요, 살아가는 이유조차 희미한 빛을 내는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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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의 시계는 여덟 살 이후 멈췄다. 성장은 물론이고 마음의 문조차 항상 닫힘이다. 살아있는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여겼던 부모도 나날이 지쳐가고, 집은 한숨조차도 편히 쉴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나만 없다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여기는 도이와 도이의 생사를 매일 매시간 확인해아만 마음이 놓이는 부모, 그들은 그것만이 서로를 지탱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서로를 묶는다.      

도이는 마지막을 선택했지만, 그 순간에 보여준 새로운 공간과 시간 그리고 소리가 그녀의 삶을 새롭게 바꿔놓는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새로운 선택으로 달라질 삶을 만들어 낼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잔류사념과 우리 모두 가지고 있지만,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또 하나의 공간, 평형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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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았던, 너무도 나약했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그들의 과거가 선택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 그 선택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되고만 그들의 운명은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퇴색되어졌고, 절망 속에서 가는 숨을 뱉어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지석이의 마지막을 본 도이는, 평형세계의 질서 따위에 친구를잃을수 없으며, 자신의 상처투성이 삶과 석윤이 외로운 삶을 버려둘 수 없다. 도이는 자신이 왜 '조현조'였는지, 여전히 상처투성이 몸으로 살아가야만 했는지, 자신의 과거와 마주서는 용기를 내면서 이야기는 막바지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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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는 세상 누구의 눈으로 바라봐도 피해자이다. 보호를 받아야 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기를 기다려줘야 하는 피해자이다. 그러나 여전히 상처투성이 몸으로 상처를받아야 하고, 숨어야 하고, 숨겨야 하는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다. 『내일이 없는 소녀』 도이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숨 한 번 크게 내쉬지 못하는, 많은 피해자들의 삶을 대신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 도이가 가진 능력 따위는 없지만, 세상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나'라는 존재는 분명 있다. 과거의 시간과 마주볼 용기를 꼭 한 번은 내어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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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없는 소녀』는, 읽는 동안 쉴 수 없었다. 도이의 상처에 눈물이 났고, 상처에 화가 났다. 지석이의 아픔에 울분이 터졌고, 아픈 그 마음에 소리치고 싶었다. 석윤이의 불신에 몸서리쳐졌고, 그의 외로움에 가슴이 아팠다. 어른들의 이기심과 억지속에 병들어가는 우리 아이들의 상처가 아팠고, 그들의 삶이 고단해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도이'를 빌어 재생시키면서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하였다. 이슈로 사건을 알리고 관심을 기울였던 그 사건들은 우리에게 조금씩 잊혀가지만, 도이는 여전히 아프고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향해 내뻗은 발이 제대로 디딜 수 있는 공간에 함께 해 줄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좀 열려있기를, 좀 따듯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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