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위층에서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온다. 방학을 맞아 친구들이 놀러 왔구나 싶었다. 거실 쇼파에서 책을 읽던 우리 집 첫째 소녀가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지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한 소리한다. 그래, 맞다. 난 아래층 눈치보느라 두 아이 키우면서 거실에서 발을 조금만 굴러도 언성을 높이고, 눈치주고, 앉아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주고 그렇게 키웠는데, 좀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좀 불편했다.
그런데 좀 있으니 위층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정엄마가 편찮으셔서 작은 따님이 엄마를 보살피고, 작은 따님의 아이를 위층 엄마가 한달동안 맡아보게 되었는데, 4살이라 감당이 안 된다고 미안하다고. 사춘기 맞이하는 큰 아이, 예민할 시기인데 너무 미안하단다. 전화를 끊고 우리 가족은 다함께 웃었다. 짜증내던 첫째 소녀는, 한 소리한 것이 멋쩍은지 허~ 하고 웃어넘긴다.
사춘기. 언제부터 우리는 그 시기를 조심스러워하고 두려워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의 사춘기는 너무나 외로웠다.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오면서 조금씩 옛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졌고, 전학온 도시의 친구들은 이미 그룹이 결성되어 어느 곳에도 내 자리는 없었기에 나의 이야기를 터트릴 누군가가 없었다. 3살 터울의 오빠 또한 나와 같은 외로움으로 뭉쳐 서로 얼굴만 보면 못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엄마 아빠는 도시생활에서 책임감으로 바빴으며, 20대 언니는 항상 바빴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 점 무거워지고, 진로를 혼자 결정하고 원서를 썼던 그 때. 은비를 보면서 은비또한 외롭고 힘들지만, 곁에 진석이가 있었고, 기 죽지 않는 당당함이 있었기에 참 대견하고 그 때 나는 왜 그렇게 현명하지 못했을까, 왜 그리 나를 좀 보라고 생떼를 부리며 나의 존재를 알리려고만 했는지, 그 때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은비는 중3, 우연히 올가미에 잡힌 새끼 고라니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 치료해주려고 하지만, 몸보신에 좋다는 이유로 동네사람들이 서로 돈으로 사겠다고 몰려든다. 엄마 아빠는 농사보다 그게 낫다고 빨리 넘기라고 아우성. 은비는 부모의 잔혹함에 반기를 들듯 절대 놓을 수 없다한다. 아빠는 곧 넘기겠다는 약속으로 계약금을 받고, 은비는 부모 몰래 고라니를 야생조수협회 지부를 담당하는 털보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에서 내보는데 성공한다. 이 일로 부모님은 계약 파기로 두 배의 돈을 물어주게 되고, 은비는 가정에서 점점 자리가 좁아지고 만다.
인간의 이기심, 끝은 있을까.
나 하나 건강하고 오래 살겠다고 어미 품에서 떨어지지도 않은 새끼를 먹겠다고 고액으로 거래를 하고, 아픈 동물을 괴롭히며 그들의 고통을 웃음거리로 여기며, 내가 가진 권력을 이용해 맘껏 휘두르는, 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어리석음 정도는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그 마음,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진정 그들이 바란 것이 맞는가 묻고 싶다.
"왜 은비를 끌고 들어가? 물귀신처럼. 자기는 더 못하면서 남을 비웃는 건 범죄야, 범죄! 자기는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쳐줄 줄 알아야지!" 172쪽
"정정당당히? 싸우는데 그런 게 어딨어? 무슨 수를 쓰든 이기면 되는 거지!" 182쪽
아무리 살기 힘들고 권력이 우선인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미물에게조차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너무나 치졸한 방법이 아닐까. 법으로 금지된 밀렵을 하면서까지 야생동물을 잡아 건강을 지켜내려고 하는 그 욕심, 그것은 동물보다 인간인 우리의 힘이 세다고 믿는 마음에서 시작된 행동인 것이다. 권력만 있다면 어떠한 행위를 하고, 다른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리는 정도는 별개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서 그래도 답습한 아이들이 그대로 세상에 나온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해갈까, 읽은 동안 그런 세상 속에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끔찍하고 무서웠다. 지금도 우린 권력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런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 참 씁쓸하기만 하다.
웃음거리가 없는 시골에서 왜소증의 각설이 아가씨 자매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었다. 우스운 분장을 한 채 보잘것없는 엿을 팔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본인의 장기를 펼쳤다. 아주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해온 일인 듯 말과 행동이 자연스러워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얼굴에는 자부심마저 감돌았다. 은비는 은근히 그 두 자매가 존경스러웠다. 84쪽
은비는 지쳐가는 부모가 돈에 매이고, 농번기에 부업으로 힘들게 일하기 보다 새끼동물를 잡아 한 몫 챙기려는 그 모습을 보며 참 마음이 아프다. 너무나 매정하게 변해가는 그 모습이 소름끼치고 싫지만, 힘들게 일하는 부모를 마냥 미워하지는 않는다. 입을 닫고, 눈치를 보며, 가족들과 등을 돌리지만, 그 상황에서도 은비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며 꿋꿋하게 소신있게 버텨간다.
자기 편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외로움 속에서 진석이라는 첫사랑을 알게 되고, 부모의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진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당찬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만 싶다.
"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 모임이 상처 입은 동물은 무슨 동물이든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해주고 일정 기간만 보살핀 다음에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이중, 삼중의 그물이 쳐진 비좁고 답답한 우리에 가둬두고 늙어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는 게 아니라요. 저런 감옥 생활은 먼데이도 원치 않을 겁니다. 비록 몇달을 살다가 죽더라도 산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다가 죽기를 원할 겁니다." 218쪽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야생동물들의 현실을 마주하는 요즘이다. 생각보다 잔인하고 생각보다 그 고통이 곱절은 심하고, 우리가 상상했던 참혹함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인간으로부터 피해를 입고, 다시 인간의 손에서 보호를 받고, 자연으로 돌아갈 때 머뭇거리다 숲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볼 때 그들에게 자유는 생명과도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품에서 살아가는 안정된 삶보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숲에서의 삶은 단 1초를 살아도 스스로 선택된 죽음이기에 그들에게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은비가 구해준 먼데이를 통해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생명 하나를 살리고 보살피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보살핌이 더해지면서 은비를 포함한 학생들은 성장했고, 더 넓은 의미의 보살핌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된다. 스스로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나로 시작된 일들이 우리가 되고, 마을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당당하게 나서는 '나'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콩나물 철학이라고 있어! 비좁고 어두운 시루 속에 불린 콩을 가득 넣고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부어주지. 그러면 물은 시루에 잠시도 머물지 않고 아랫구멍을 통해 금세 다 빠져버려! 그래도 콩들은 극소량ㅇ의 영양을 섭취하며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어느 날은 말끔하니 길쭉한 콩마물로 성장해 있지. 애초 조그만했던 콩하고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말이야! 학교도 마찬가이야. 담장에 갇혀 매일매일이 답답하고 힘들다 해도, 너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는 거야!" 102~103쪽
개성도 다르고 꿈도 다르고 재능도 다른 아이들이 한 반에 들어가 똑같은 교육을 받으며, 똑같은 규율 속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교육에 대한 많은 불안 요소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며, 살아남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힘들고 지치는 그 순간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통해 위로와 자책을 퍼부으며 치열한 몸부림을 한다. 그 순간 아이들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내일을 그려본다. 그것을 끝까지 바라봐주는 것이 바로 어른들의 몫이다. 어른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아이들을 바라봐주었을 때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넓게 자랄 수 있다. 그것이 학교를, 가정을, 사회를 이루게 하는 밑바탕이 되어주는 것이다.
아이가 아이답게 그리고 내가 나답게, 네가 너답게
그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는 그 당당함 그것이 『중3 조은비』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다.
이제 곧 중학교 입학을 앞둔 첫째 소녀가 재미있다고 책장을 덮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의 중3 조은비, 화이팅! 하고 외치자, 씨익 웃어준다. 그 웃음이 바로 당당함으로 가는 시작임을 나는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