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묘지 공주 - 제1회 교보문고 동화공모전 전래동화 최우수상 수상작 ㅣ 상상 고래 3
차율이 지음, 박병욱 그림 / 고래가숨쉬는도서관 / 2017년 10월
평점 :
옛날 옛적에는 말이야 …….
우리의 역사 속 기록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내려온다. 그것이 가능하든 안하든, 신빙성이 있든 없든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치 진짜인 듯 '정말?' 신비롭고도 믿고 싶을 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느낀다.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배경까지 모두 허구는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묘지 묘(墓) 계집 희(姬)의 묘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손에 버려져 백호의 손에 키워진 무덤에 사는, 백호 엄마 범니와 구미호 오라버니 구구와 동글에서 살면서 귀신들을 친구삼아 자연을 벗삼아 자유를 만끽하며 하루하루가 재미나는 소녀이다.
묘희는 두창(천연두)의 치료법을 위해 산에 올라 시신을 살피는 청원이라는 의원에게 범니의 다친 발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한다. 묘희와 청원의 인연은, 묘희가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인간 세상의 쌍동아 오라버니를 만나게 해 주고, 청원은 묘희에게 두창에 효험이 있는 약재를 받는가 하면, 훗날 의원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가 되기도 한다. 한번 맺어진 인연은, 또 다시 만날 인연을 타고 나게 되며, 돌아돌아 또 다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다고 하는 말을 증명하듯, 묘희와 청원의 인연은 서로의 손을 나누고, 귀함을 함께 여길 줄 아는 인연으로 자라난다.
백호 범니는, 묘희에게 줄 산도야지 사냥에 갔다가 착호갑사들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 죽은 몸으로 묘희를 찾아온 범니는 쌍동아 오라버니를 따라 마을로 내려가 살라고 한다. 버려진 묘희를 키워준 범니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 항상 일부러 져주면서 자신의 편이 되어준, 호랑이 엄니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그 동안 느껴온 온기가 얼마나 따스하고 든든한 울타리였는지 가슴 깊이 느끼는 순간과 마주한다.
- 백호는 쩔쩔매며 눈물을 핥고 또 핥았다. 하지만 닦이지 않고 그대로였다. 죽음은 사랑하는 이의 눈물 닦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이 이런 거라면 싫었다. 너무 슬퍼서 더 소리 높여 구슬피 울었다. 땅이 떠나가라 울고, 또 울었다.
죽음은 또 하나를 더 앗아갔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따스했던 엄니의 품. 유일한 온기를 가져갔다. 묘희는 차가운 눈 속에 홀로 발가벗져겨 서 있는 기분이었다. 50~51쪽
혼자 남겨진 묘희, 인간세상으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범니를 죽인 자가 바로 아버지이며, 아버지가 자신을 산에 버렸다는, 알고 싶지 않은 현실과 직면한다.
- 자신은 가문과 도령을 위해 버려졌다. 그깟 미신이 대체 뭐라고. 대감마님을 탓하고 싶은데, 실은 모두 조선의 탓이라니. 대체 누굴 미워해야 할지,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두 다 원망스러웠다. 63쪽
남여 쌍둥아는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야만 했던 그 때 그 시절, 아들은 가문을 잇기에 필요한 존재였기에 품을 수 있었던 그 때, 시대가 그랬던 그 때 누가 그 흐름을 바꿀 수 있으며, 누가 거역하며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묘희의 희생이 집안을 살렸고,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음을 . 묘희는 범니와 구구로부터 아낌없는 보살핌을 받았지만, 정후는 엄마의 사랑과 아빠의 따스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했음을 알게 되면서 남는 자와 죽은 자,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음에 씁쓸하기만 하다.
-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36쪽
- "날 뻔뻔하다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정후는 살려주렴. 제발."
흩날리던 매화꽃 아래, 매화는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발짝만 가까이 다가가도 순식간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왜 그러느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저승에 가지도, 그렇다고 딸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 뿐, 그 아픔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가지 않아 가슴이 미어졌다. 114쪽
묘희에게 온 마마신을 매화꽃으로 쫓아내어준 매화나무 귀신은 쌍동아 정혜를 산에 버려야만 했던,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엄마이다. 죽기 전 정후에게 동생을 찾으라 간절히 부탁하며 눈을 감았고, 언젠가는 찾아주겠노라는, 언제까지나 지켜보겠노라는 엄마는, 인연의 고리를 알고 있었다는 듯 쌍동아 남매에게 범발톱 노리개를 나눠준다. 언제 어느 순간에 만나더라도 서로가 뱃속에 함께 있었던 남매임을 알게 하려고 말이다. 매화는 버려야만 했던 아기 정혜의 곁에 머물고 싶어 수목장으로 매화나무 아래 묻혔으며, 거기서 산을 누비며 범니를 엄마삼아 살아가는 묘희를 지켜보며 자신의 미안함을 달래고 있었나보다.
- "너를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묘희는 우뚝 멈췄다. 말하지 않아도 머리로는 그 연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오늘의 일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비 노릇을 한 것이다." 124쪽
정후 정혜의 아버지이자 착호갑사. 그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기 자식을 버려야만 했던 그 마음을, 쌍동아 중 하나만 남은 아들을 위해 멀리 사냥을 떠나 며칠씩 집을 비워 아들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 아버지의 가슴 속에 맺친 한은 그 또한 얼마나 깊을까.
『묘지 공주』는,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남존여비와 신분제도 속에서 상처받은 한 가족의 삶을 풀어냈다. 한 뱃속에서 남녀가 자란 이란성 쌍둥아 중 가문을 이을 아들에게 화를 입힐까 버린 딸. 딸은 백호의 손에 길러지고, 백호는 딸을 버린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는 딸에게 마지막 선처로 내민 키워준 어미의 가죽.
자식과 부모 사이의 인연은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또한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면 그 깊이 또한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정후, 서로의 상처를 들추기 두려워 배려한다는 이유로 눈길 한 번 마주하지 못하는, 상처로만 남은 그들에게 묘희는 가족이라는 끈을 이어주고 단단히 묶는 매듭같은 존재로 그들의 곁에 나타나 준 게 아닌가 싶다. 잊지 않으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인연인가 보다.
묘희는, 자신이 타고난 운명대로 넓은 세상을 꿈꾸며, 시대가 버린 많은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안아주는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 "아직 정혜는 닥나무와 같아. 한지가 되려면, 누군가의 손길과 정성이 필요하지." 76쪽
아무런 손길도 닿지 않았던, 닥나무 같았던 묘희가 자신이 꿈꾸는 세상으로의 첫 발은 분명 용기이다. 다른 이들의 따스한 시선을 어깨에 담고 그들에게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자신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다.
허준과 동의보감, 그리고 묘희와의 인연, 설화 속에서 피어난 이야기 『묘지 공주』
묘희의 대담함과 사랑스러움에 빠졌다가 새로운 인연들과의 만남에서 묘희의 감정을 위로하다가 다시 태어난 묘희의 따스함에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읽었다.
호랑이를 호령하는 소녀 묘희, 쌍둥아로 태어나 버림받은 딸 정혜와 버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버림받은 아이를 가슴으로 키워낼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범니와 구구, 그들의 짊어지고 가야 하는 운명의 깊이로 한뼘 자란 딸 정혜와 묘희
설화에 뿌리를 두고, 묘희라는 중심가지에 가족이라는 또 다른 가지를 쳐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필력에 매료되었다. 결코 가볍지 않으며 함께 한 이들의 가슴에 묻어둔 한들을 담담하게 읽어나가는 내내 가슴 한 켠이 먹먹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