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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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원봉사를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자원봉사의 역할과 분야를 살펴본 뒤 가까운 복지관의 의뢰로 장애인의 컴퓨터 활용과 외출을 도와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아저씨와의 만남은 사회 초년생인 나를 당혹스럽게 하였다.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눈높이를 맞추어 컴퓨터를 가르친다는 것이 조금씩 벅차오고 부담으로 자리했다. 그 분과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내가 왜 이 일을 선택했을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내가 정말 그 분을 가르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그분이 먼저 살펴봐 주시고 힘들지 않냐고, 꼭 컴퓨터를 가르쳐야 하는 건 아니라고, 사회 친구가 하나쯤 필요했을 뿐이라고 먼저 마음을 열어주셨다. 그러나 난 너무 어리고 준비가 되지 않은 봉사자였다. 그 분의 열린 마음을 나의 무능력을 탓하며 봉사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삭제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 시작은 어설프다. 나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실에 막막함을 맛보며 나에게만 일어나는 듯한 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단정 짓고 그 일을 매듭짓는다. 그것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것보다는 훨씬 내 맘을 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따지고 할퀴는 가운데 상처 입을 수 있는 내 마음에 대한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브릿마리는 지금 불편하다. 가정주부로 살아온 삶을 탈출하여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한 일이기는 하지만 해야만 한다는 현실이 그녀를 더 불안하게 하며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고용센터 직원과의 상담에서 한 치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으며, 센터 운영의 방침 정도는 그녀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브릿마리는 영리하지 못한 여자이며, 애교로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지 못하는 평범하고 책임감 강한 아내이며,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자신의 영역을 잘 지켜내는 이웃집 아줌마이다. 이런 그녀는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이웃들에게 이성적이며 냉소적인, 그래서 재미없고 사교적이지 못한 인물로만 제한되어진 삶을 살아왔다. 그녀가 이런 삶을 선택한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녀의 유일한 편이 되어준 언니의 죽음은 든든한 울타리를 빼앗아갔고, 엄마의 죽음은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마저 빼앗아가는 가혹한 일이었다. 홀로 세상에 서야 했던 그녀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작은 티끌이라도 닦아내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손길이 닿은 살림살이들은 상대방으로부터 자신를 각인시켜 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고용센터에서 브릿마리에게 준 첫 직장은, 폐쇄 조치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마을 보르그의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관리인이다. 산업화의 발달로 재개발의 바람이 일고, 경제의 침체로 많은 이들이 실업자가 되어 너도나도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마을엔 낙오자라고 이름 지어진 몇몇 사람들만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지방정부에서는 처치 곤란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뭐 하는 제대로 있지 않고, 먼지는 뽀얗게 쌓였으며,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곳, 슈퍼도 보건소도 정비소도 모두 한 곳에서 해결되는 곳, 학교에 갈 시간도 챙기지 못하여 거리를 쏘다니며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만 가득한 아이들이 있는 곳, 그곳에 브릿마리가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모습에서 말투, 그리고 행동하나까지도 맘에 드는 구석 하나 없는 이 곳에서 짜여진 틀 속에서만 움직이는 브릿마리는 앞으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 화분에는 흙만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밑에서 꽃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물을 주어야 한다. 브릿마리는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럼 믿음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그러길 바라는 마음뿐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들 다 없는지도 모른다. 68~69

 

브릿마리는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남편의 품에서, 안락하고 정돈된 집으로부터 말이다. 브릿마리는 앞으로 적응해야 한다. 모든 걸 한 곳에서 해결하는 곳의 주인인 휠체어 탄 미지의 여인에서 엉덩이에 가시가 달린 못된 소리로 툴툴거리는 보르그의 사람들 그리고 장님은 아니지만 시력이 매우 안 좋은 집주인 뱅크와 저녁마다 스니커즈를 먹으러 찾아오는 쥐까지. 브릿마리는 자신이 가꾼 침실과 발코니 그리고 남편의 다려진 셔츠의 정돈됨이 너무나 그립지만 그 시간 속에 있었던 자신의 시간을 그리워하거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은 느끼지 못한다. 그 공간 속에 있던 브릿마리는 고정된 형체였을 뿐 살아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자신에게 자유라는 향수를 뿌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 ‘현재 위치.’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186

브릿마리는 보르그에 남아 희망을 노래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부모를 잃고 투쟁하듯 살아가는 아이들과 경제 침체의 영향으로 파산된 가정에서 자신을 감추며 살아야 하는 아이들, 부모의 고된 삶을 함께 나누며 침묵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하루하루를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있으며 그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브릿마리는 그들을 동정하거나 어설픈 위로와 조언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상처는 상처일 뿐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슬픔이 그들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딱딱한 말투와 정형화된 삶의 규칙이 브릿마리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브릿마리는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보르노의 이름없는 축구단의 코치가 되어준다. 그들을 위한 출석부를 만들고, 유니폼을 빨아주고, 바보 훈련도 열심히 시키며 뻣뻣해서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브릿마리의 마음이 점점 그들에게 굽어지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몸과 감정을 움직이며 그들과의 소통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한 번도 진지하게 본 적이 없는 축구 경기를 보르노 코치가 되어 참여한 경기에서 점프하며 골인에 환호성을 지르고 쉰 목소리로 축구 경기는 그저 그랬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축구에 왜 열광하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답하는 앙큼한 여자로 돌아온다.

- 조그맣게 몇 걸음 걸어가서 있는 힘껏 공을 찬다. 이제는 공을 차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244

- 그녀는 보르그에서 그런 사람이 되었다. 여벌옷을 트렁크에 챙기고 축구 경기장에 가는 그런 사람이. 368

브릿마리는 여전히 그녀답다. 고운 말도 남을 위로하기 위한 따뜻한 말도 건네지 못한다.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다. 하면서 살아본 적이 없으며 자신을 지켜가면서 살아가는데 너무나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슬픔이 찾아온다. 소리를 치고 자신이 온 힘을 다해도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일.

 

부모를 일찍 잃어야 했던 남매의 첫째 새미가 동생들 곁을 떠나게 된다. 복수심에 불타는 막내와 오빠의 죽음과 동생의 복수라는 현실에서 말을 잃은 베가. 그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위로의 전부인 브릿마리. 그들은 지금 닥친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에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으며 위로도 사치일 뿐, 그들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 ”사이코는 위험한 또라이가 됐고 새미도 그걸 알지만, 새미는 예전에 자기 동생을 업고 도망쳐줬던 친구를 배신할 수 있는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 어쩌면 보르그는 단짝 친구를 선택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닐지도 모르죠.”

우리는 보르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요. 늘 그래왔어요. 하지만 저 아이들 안에서 끓어오르는 불길이 조만간 주변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자신을 잡아먹어버릴 거예요.” 229

새미는 자신의 아픔을 함께 나눠준 친구를 져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보르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며 의리이다. 어른들이 남긴 상처를 이겨내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미를 엄마이자 아빠로 의지하며 살아온 여동생 베가는 오빠의 죽음 앞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아무 말도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베가는 쓰러질 수 없다. 오빠는 없지만, 오빠 대신 책임져야 할 동생 오마르가 남았기 때문이다. 브릿마리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 베가를 보면서 절망을 느낀다. 이렇듯 슬픔과 절망은 자기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고, 그것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가 그 속에서 나오기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브릿마리는 알아간다. 그리고 베가는 낡은 공 앞에서 오열을 토한다. 그들에게 축구는 기쁨이고 슬픔이고 실패이고 상처이고 치유제다. 그러기에 그들은 축구를 간절히 원하며 다치고 부러져도 축구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아이들이 탄산음료 캔 사이를 왔다 갔다 달리는 동안, 브릿마리는 그 옆에 서서 거품처럼 온몸으로 번지는 행복감을 느끼며 훈련 자체도 그렇고 그걸 맞든 사람들한테도 그렇고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라고 아주, 아주 조용히 중얼거린다.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211

 

브릿마리에게 또 한 번의 결정의 순간이 온다. 한번도 꿈꾼 적 없는 보르그의 생활, 그것이 그녀에게는 마지막 삶의 종착지일 수도 또 한번의 삶의 전환기일 수도 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보르그에서의 있었던 시간을 그의 삶에 분명 빛이었을 거라 장담한다.

- “우리 어머니가 평생 사회복지 쪽에서 일을 하셨거든요. 그 쓰레기들 한복판에서, 그게 가장 두툼하게 쌍인 곳에서 눈부신 이야기가 탄생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모든 게 보람을 갖게 된다고요.” 그녀는 미소와 함께 그 다음 문장을 전한다.

브릿마리 씨가 저의 눈부신 이야기예요.” 404

 

문을 살짝 열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회색빛 머리카락을 가진 브릿마리 부인의 모습에서 세상으로의 첫발을 내딛는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순진한 표정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에서 벗어나 를 찾아가는 여행길에 오른 브릿마리. 이것은 용기이며 두려움의 시작이다. 생활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젊은 우리들에게 브릿마리의 도전과 시작은, 누구에게나 처음은 서툴고 어렵고 부산스러우며 실수투성이에 소통의 단절로 힘들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리고 그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 힘을 실어주며,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았을 때 진정한 삶이 시작됨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나이를 들면서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볼 때 항상 마음 한 켠에 남아있던 봉사와 장애인 아저씨. 브릿마리 부인의 어설프지만 진심어린 위로를 통해 '처음이라 그랬어. 어린 네 나이엔 실수할 수 있는 거야.'라고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를 보듬어주게 되었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독립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브릿마리 부인의 홀로서기를 바탕으로 보르그의 아이들의 슬픔과 희망을 노래하였다. 누구에게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슬픔과 절망, 그 뒤에는 상처뿐 아니라 분명 희망이 있으며 그것을 함께 해 주는 손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브릿마리 부인이 핸드백을 힘주어 잡은 두 손으로 새 삶을 걸어나갔듯 내 삶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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