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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유배지에서 꿈을 쓰다 - 정약용과 정약전의 실학 이야기 ㅣ 토토 역사 속의 만남
우현옥 지음, 김세현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모임 감수 / 토토북 / 2019년 7월
평점 :
우리의 '조선'은 수많은 역사의 시간들 중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시련도 변화도 발전도 참 많았다. 다양한 종교와 더불어 새로운 학문이 들어오고, 서로가 견제하고 암투를 벌이면서, 귀한 인재를 비롯해 많은 백성을 잃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은 조선에 새바람을 일으켰던 《실학》 그리고 천주학이 전해지던 그 때의 이야기를 해 보려한다.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학문을 배우고 익히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실학'은 현실에서 생긴 문제점을분석하고 해결방법을 마련하고자 한 실용적인 학문으로, 조선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길 바라는 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엄격한 신분제도로 차별이 당연시 되는 조선 땅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천주학'은 깨인 학자들에서 백성들로 번져나가면서 희생을 요구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 시기에 꿋꿋하게 뜻을 굽히지 않고 실학을 실천해 나가고, 천주학을 전파시킨 형제가 있다. 바로 정조의 사랑을 극진히 받았던 정약용과 정약전 그리고 정약현과 정약종 형제들이다.

정약용의 형제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이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다름을 인정하는, 그들의 생활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부럽기 짝이 없는 형제이다. 다른 성향을 가진 형제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켜줄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서로의 발전을 북돋워주고 힘이 되어주려는 그 마음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든든하게 한다.
정약전은, 중국에서 넘어온 새로운 책과 학문을 정약용에게 전달하며, 약용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직접 만들어보며 원리로 사용법까지 익히며 조선에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를 몸소 체험하는 실학자였다. 반면 정약용은 책을 깊숙이 파고들며 원리를 익히며, 머리에서 이해한 것이 가슴으로 와닿을 때까지 반복하며 익혀내는 실학자였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보완하면서 정조의 사랑과 기대에 힘입어 수원화성을 짓기에 이른다.

왕의 신임은 곧 다른 신하들의 시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조의 뜻에 따라 '화성' 짓기에 여념이 없는 약용·약전 형제에게 조선은 편하게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그대로 두지 않는다. '실학'과 '천주학'이라는 새로운 바람과 함께 왕에 대한 반역을 꾀하였고, 백성들을 혼란케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은 유배생활을 하게 이르게 된다.
애초에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며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약용 형제의 집안은, 죽음과 유배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유배를 떠난 약전은 삶을 포기하는 대신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면서 "자산어보"라는 입으로 전해지는 해양 생물들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섬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펴낸다.

그 동안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 속 한 사건으로 전달되었으며, 그들의 업적 위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조의 사랑이 담긴 이야기가 전부였다. 『형제, 유배지에서 꿈을 쓰다』 는 정약용의 가족 특히 형제들의 생활을 중심으로 실학과 천주학의 도입 그리고 전파, 희생의 과정을 말해주고 있어 그들의 겪은 삶의 시간을 더욱 실감나게 알 수 있으며, 그들 형제가 나누는 의리와 형제애의 애틋함이 더욱 간절하게 전달되어 왔다.

『형제, 유배지에서 꿈을 쓰다』 를 통해 약용과 약전 형제가 유배지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산어보"라는 책을 쓰기 위해 기울인 정성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처지를 한없이 한탄하고 힘들다 할 수 있는 시간임에도 두 형제는 서로의 걱정과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 애씀이 감사하고 그들의 노력에 감동과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내려앉는다.
약전이 세상을 떠나고 2년 뒤 1818년 9월, 형제에게 내려졌던 유배가 풀렸다. 해배 소식에 약용은 마음이 더 찢어지는 것 같았다.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가 백 년 같았을 형님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약용은 혼자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재는 변함이 없었다. 뱀처럼 휘어 흐르던 강과 사시사철 우거진 나무가 건네는 위로에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그러다가도 불쑥불쑥 야속함이 밀려왔다. 변함없이 푸른 산도, 말없이 흐르는강물도 상처 깊은 골을 메우지 못했다. 마재에 돌아온 뒤 몇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약용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묘지명을 비롯해 특별히 아끼던 사람들의 묘지명을 지으며 보냈다. 150~151쪽
조선이란 나라에 자신들의 희생을 앞에 두고도 백성을 위해 끝까지 자신의 능력을 펼친 학자들 그리고 그들의 정성에 아낌없는 감사함을 느끼며 그들을 멀리서 지켜봐준 많은 백성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펼친 기술력이 기초가 되어,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편리한 생활을 하는 한 사람으로 그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고픈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