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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나무 ㅣ 독깨비 (책콩 어린이) 58
캐서린 애플게이트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19년 5월
평점 :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세월이 흐른 만큼 줄기도 굵고 단단하며, 뿌리는 그 주위를 에워싸며 뻗어나가고, 줄기에서 뻗은 가지에는 푸르른 잎사귀가 바람따라 노래를 부르고, 햇살따라 그늘로 덮어준다. 보는 이들에겐 웅장함과 자랑스러움이 깃들고,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는 보금자리와 놀이터가 되어 서로를 보듬어준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은 서로 함께 살기로 무언의 약속을 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에 그늘이 지게 되면, 그 약속은 언제든 깨어진다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다.
'레드'로 불리는 적참나무는, 인간들에게 '소원나무'로 불리며 매년 5월 첫날이면 소원을 주렁주렁 매달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하는,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소원을 담은 종이조각, 헝겊등을 꽁꽁 묶어두고 시간이 지나면 태워버리는, 마을을 지킨지 216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많고 많은 소원, 어마어마한 소원, 바보 같은 소원, 이기적인 소원, 귀여운 소원.
내 늙고 지친 팔다리에 이 모든 바람이 바쳐진다는 건 크나큰 영광이다. 20쪽.
『소원나무』 레드는 1인칭 시점 '나'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에 불과하지만, 집이고 작은 사회이다. 둥지를 틀고 뿌리 아래 굴을 파고, 잎사귀에 알은 낳는 동물 가족들에게는 집이 되고, 그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 곳은 작은 사회로 그들을 성장시켜나간다. 또한 내가 만들어주는 그늘에서 쉬어가는 인간들까지 더해지면 나는 '사회'라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나무 또한 의사소통은 인간 못지않게 복잡하고도 놀랍다. 햇살과 당분, 물과 바람과 흙의 신비스러운 춤 속에서 우리는 세상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다리를 만든다. [중략]
우리네 나무는 어떨까? 그건 우리만의 비밀이고, 알아내는 건 여러분 목이다.
자연은 즐거운 비밀을 좋아한다. 29쪽
평온해 보이는 레드와 단짝 친구 봉고 그리고 동물 가족들. 그런데 그들의 평온은 레드의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집에 '사마르'가 이사오면서 레드와 그의 가족, 마을까지도 혼란의 시간을 겪게 된다. 파란집에 이사온 열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녀 '사마르'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수줍음 많고 경계심 가득한 눈을 가졌다. 사마르의 소원이 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떠나라"란 글씨가 나에게 새겨지고, 날달걀이 날아온다. 사마르에 대한 무언의 공격인 것이다. 사마르, 그녀는 이슬람교도인으로 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로부터 마을 주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이 드러난다.
우린 그 누구와도 같지 않으며, 닮아가려고 하지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와 다른 종교, 다른 모습, 다른 능력을 가진 이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행위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착각을 하곤 한다. 레드는 마을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은 사마르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단짝 봉고의 도움을 받아 작전을 시도한다. 사마르와 이웃집에 살고 있는 소년 스티븐이 어른들의 잘못된 인식을 이겨내면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의견 충돌도 잦았다. 그러나 내가 주인으로 있는 한, 이웃을 잡아먹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했다.
나로서는 아무리 식구가 많아도 좁고 붐빈다는 느낌은 없다.
내 덕분에 다른 이들이 편안하다면 그야말로 멋진 인생이 아니던가. 34쪽.
자연은 우리에게 말한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면 잎사귀를 펼쳐 그늘을 만들고,많은 비가 내리면 뿌리가 있는 힘껏 흙을 잡아 견디면서 살아가라고. 또한 크고 작은 동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은 누구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되, 서로가 뿌리를 내리고 집을 지었다면 그 영역은 함부로 침범하지 않겠음을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지켜주며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잘 사는 방법이자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자연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레드와 봉고, 사마르와 스티븐. 그들은 서로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가 함께 하는 순간을 누릴 줄 안다면 그것이 친구이고 그것이 함께이다.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것이 종교와 국경이 한계를 넘어 더불어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