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랑이의 눈 ㅣ 창비청소년문학 84
주디 블룸 지음, 안신혜 옮김 / 창비 / 2018년 5월
평점 :
주디 블룸.
두 소녀와 함께 읽은 <주근깨 주스>와 <별볼일 없는 4학년>을 통해 익숙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들게 되었다. 그
동안 읽은 책과는 다른 느낌을 안겨주는 제목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붉은 노을이 지고, 협곡이 굽이진 배경이 마치 황무지를 연상하게 한다. 배경 속의 남녀의 모습은 하늘과 땅의
모습만큼이나 대조적이다. 상대를 향해 물병 하나를 건네는 남자와 상대의 호의가 반갑지 않은 여자. 그리고 낯선 이를 향해 경계하는 눈빛을 가진
여자의 모습이 제목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느낌에 읽기 시작한 글은, 책을 덮을 때까지 나를 의자에서 뜨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데이비는, 장례식을 가기 위해 엄마의 구두를 신는다. 발에 맞지 않아 정신이 온통 발에 생겨날 물집에 집중할 수 있어 좋을 만큼 힘든
자리이다. 데이비는,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배도 고프지 않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편안함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하는 장례식, 아빠의 부재를 알리는 마지막 절차였던 것이다.
가난하지만, 서로 구속하지 않고, 사랑했기에 믿었던 가족. 데이비의 가족은 그러했다. 아빠가 곁에 있는 순간까지는. 아빠가 운영하는
편의점에 강도가 들어 아빠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총성을 듣고 달려간 데이비는, 도와달라는 아빠의 마지막 음성을 들었고, 아빠의 몸에서 흘러나온
많은 피를 온 몸에 새겨야만 했다. 그렇게 아빠를 떠나보내야 했던 데이비. 아빠의 간절한 부탁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그
시간을 들춰내고 싶지 않다.
바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감정이 복받쳤다. 이 모든 순간을 아빠와 함께하고 싶다.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 왔다. 나 혼자 협곡을 내려왔다고, 아빠에게 말하고 싶었다. 무섭지 않았다고. 그리고모든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날 밤 이후로 일어난
일들을. 내가 생각하고 느낀 모든 것을. 67쪽
주디 블롬은 데이비의 감정과 동선을 천천히 따라간다. 아빠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데이비의 감정을 담담히 그려내면서, 그녀의 마음과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다. 독자가 궁금해하는 그 순간까지도. 오직 데이비가 스스로 그 굴레가 깨고 나오기까지
기다려준다.
데이비는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모가 사는 도시로 옮기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지난 날과는 다른 일상을
맞이한다. 계획대로 움직이는 고모네가족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부담감에 술로 대신하는 친구 제인,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오티즈
아저씨와 아빠를 떠나보내는 중인 울프와의 만남 속에서 데이비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데이비는, 오티즈 아저씨가 남기고 간 춤추는 곰인형을 받는다. 아들 울프가 아저씨에게 준 춤추는 곰인형을. 데이비는 아저씨의 죽음 앞에서
울음이 터졌다.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의 눈물이 병원 봉사에서 만나 정이 든 아저씨의 죽음에 감정이 복받쳐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아빠에게 갑자기 닥친 위험이 아빠의 부재로 연결되리라고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데이비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운다면 정말 아빠를 만나지 못할까봐,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게 될까봐, 참고 참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데이비는, 심리 상담사에게 무서웠던 지난 시간을 조심스레 꺼낸다. 피묻은 아빠의 몸을 안고 기다리는 동안의 공포와 아빠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너무나 무섭고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한번도 꺼내놓지 못했던 속마음을 열면서 데이비는 아빠의 죽음과 처음으로 마주서게 된다. 할 수
없다고 감춰두었던 옷장 속 갈색 종이 가방을 연다.
'잘가, 아빠. 사랑해요. 앞으로도 항상 사랑할 거예요. 이제 아빠 생각을 안 하겠다는 뜻이 아니야. 그날 밤 일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겠다는 뜻도 아니고. 그건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니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잖아. 하지만 이제부터는 좋았던 순간들만 기억할 거야.
이제부터는 나도 아빠를 활기차고 사랑이 가득했던 사람으로 기억할게.' 265~266쪽
너무나 갑자기, 너무나 무서운, 너무나 슬픈 일을 겪어야 했던 데이비.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의 기억을 잊고, 치유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최선이 아님을 배운다. 그리고 자신의 슬픔을 여는 순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우리는 감정을 누르고, 이겨내는 것만이 슬픔을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했으며, 잘 이겨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슴
속에 담아둔 그 슬픔은 슬픔으로만 자리하며 추억이라는 좋은 감정까지는 덮는 힘을 발휘한다. 그 슬픔을 깨고 나오는 순간, 우리는 슬픔은
슬픔으로, 추억은 추억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데이비를 통해 알 수 있다.
데이비가 아빠의 빈자리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자리를 찾기까지의 시간을 천천히 따라가며 기다려준 주디 블룸은 독자가 데이비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착각을 들게끔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데이비가 느끼는 감정과 변화를 읽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결말은?'과 같은
궁금증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데이비가 경험하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져 그녀의 가족도 친구도 아닌 채 그녀가 스스로
이겨내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안도하게 되고, 애잔한 흔들림이 생기고, 흐믓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린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 성장한다는 것을 데이비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함께 하는 이가 있을 때 우리는 최고의 모험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