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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문지 스펙트럼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평점 :
-왜냐하면 내가 늘 젊은 상태로 있을 수 없음을, 여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가을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내 부르주아적인 혼이 말해주어서,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p20)
-부지불식간에, 아무리 어설프고 허망하게 존재했더라도, 내가 존재하는 사실을 느끼는 일은, 옛날 같았으면 나를 감동시키는 선물이었다.(p143)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의 이름으로 가장 잘 알려진 책일 듯 싶다. 사뮈엘 베케트에 관심을 가지고 구입했던 그의 전집중 한 권은 한 페이지를 채 읽지 못한 채 책장에 꽂혔고 여전히 대기 중이다. '무엇을 말하는 걸까'의 의구심을 가질 만큼 그의 낯선 글쓰기 방식과 난해하고 어려운 글들은 글을 읽는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번 문지 스펙트럼의 《첫사랑》은 완전히 다른 형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공원 벤치에서 안느라는 한 여자를 만나고 그녀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안느의 방에서 생활하던 중 안느가 매춘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안느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던 그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 집을 떠난다.<첫사랑>
추방당한 '나'는 길을 걷다 마부와 만나게 되고 마부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마부와는 달리 마부의 부인은 그를 거북하고 불쾌한 태도로 대했고 잠을 자기 위해 헛간으로 간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난다.<추방자>
'나'는 거리를 떠돌며 암염소를 끌고 가는 소년, 싸움을 벌이는 남자들, 매춘을 하는 여자등을 만난다. 큰 사건 없이 방황하고 떠도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진정제>
자선기관에 머물던 '나'는 그곳에서 쫓겨난다. 터키인인 한 여자의 집 지하실에서 거주하게 되지만 그녀는 그의 여섯 달 월세를 가지고 사라진다. 진짜 집 주인이 나타난 후 그는 지하실에서 쫓겨나게 되고 결국 '나'는 구멍 뚫린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끝>
《첫사랑》의 모든 이야기들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네 편의 이야기들 속 주인공들이 가지는 삶에 대한 미련이나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연히 찾아오는 행운이나 그럴듯한 희망 또한 없다. 그저 하루를 살아갈 뿐이며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는 꽤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건조하고 거칠어 보이는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의 인생이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같은 상황, 비슷한 이야기들의 반복일지 모른다.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행복을 찾아가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불안과 초조함이 느껴지던 주인공의 모습들과 내 모습이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