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스스로 존재할 이유를 깊게 고민하게 됐다. 만 13세부터 20대 중반까지 오랫동안 고뇌했고, 답을 찾지 못하거나 매번 바뀌었다. 때문에, 스스로 존재할 이유를 찾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필수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인간은 없으니까. 수천 명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도 세상은 돌아가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다. 나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게 무섭지 않다. 개인의 존재 이유는 이기적이게도 오롯이 나를 위해서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고, 내가 죽으면 세상도 사라진다. 나를 제외한 타자의 인생은 내가 없어지는 순간 연동이 끊긴다. 하지만, 그것이 죽어서 사라져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죽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빨간색만 보려고 작정하면 세상이 온통 붉게 보인다. 존재 가치를 의심하거나, 죽음의 이유를 찾고 세계를 배회하면 결국 그에 상응하는 것만 나타난다. 존재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는 상황이 거듭되고, 사는 것보다 죽음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렇게 스틱스강에 비친 한심한 몰골에 주먹을 내지르다가 강에 빠져 타르타로스가 되어 하데스의 거친 손길을 맞이한다.
남에게 불행을 강요하는 행위만큼 저열한 행동은 많지 않다. 개인적인 화를 해소하기 위해 타인과 함께 있는 공간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분노를 쉽게 표출하는 행위는 너무도 멍청한 행동이다. 불행은 감기처럼 전염력이 강하고, 인공색소처럼 착색된 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 부정한 행위는 타인을 서서히 죽이는 것과 같다. 세상엔 부정에 물든 인간들이 넘친다. 꿈을 짓밟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포기를 종용한다. 그들은 대체로 실패자이거나 시도조차 해본 적 없는 게으른 인간이다. 그들은 기력 흡혈귀이자, 감정 살인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고, 무시하는 것은 하책이며, 맞서는 것은 실책이다. 가족 중에 있으면 반드시 따로 살아야 하며, 친구라면 끊어내고, 회사라면 이직해야 한다. 물론, 어딜 가든 그런 인간들을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매번 도망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건강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버틸 필요는 없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밭에 가뭄이 오기 전에 미리 물을 줘야 한다. 설령 그 선택 때문에, 남들보다 밭이 초라해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의 밭은 누구보다 윤택할 것이니까.
나의 삶
나만의 인생에서 쓸모없는 남을 빼면 불행도 없어지고, 도태라는 단어가 두렵지 않게 되었다. 비교와 질투는 암과 같아서, 더 증식하기 전에 도려냈다. 째마리 같은 인간들을 최대한 멀리했다. 나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힘썼다. 남들이 어떻게 살든 그것은 그들의 삶일 뿐이다. 적게 벌었을 땐 적게 썼고, 못 벌었을 땐 벌 수 있도록 노력했다. 기대감을 객관적으로 살피면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적절하거나 넘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욕심이라는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교와 질투도 저 멀리서 대가리를 빼꼼 내밀고 있다.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억지로 외면하지 않았다. 비교하고, 질투했으며, 비대해진 욕심에 거만함이 올라와도 일단 해야 할 일을 반복했다. 결실 없는 여러 해가 흘렀고, 지쳐 주저앉았을 때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쩐지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희망적인 영화나 소설처럼 툭툭 털고 바로 일어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여전히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언젠가 다시 돌아볼 현재의 길을 아주 견고하게 다지며 걷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