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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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히 논술상을 받으면서 혼란스러웠다. 수상의 자격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간 읽었던 책은 빈한한 데다가, 다시 읽어보니 틀린 게 어찌나 많던지 줄로 박박 지우고 조금씩 채워넣다가 다른 이들보다 한 시간 반쯤 일찍 퇴장해버렸다. 자포자기보다는, 될 대로 되란 식의 감정으로. 그러니 수상 발표에서 내 이름 석자가 박힌 것이 오죽 의심스러웠으랴. 그래서 당일 상장을 받고 하교할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진득하게 여쭤보았다. 상을 받은 것도 믿기지 않지만 (상을 받은 값어치는 해야겠으니) 앞으로 논술을 어떻게 해보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의외로 적잖은 물음에 당황하지 않은 선생님은 바로 하나하나 방법을 말씀해주셨던 걸로 기억난다. 모든 신문의 사설을 눈여겨보고, 정리하고, 요약하고, 내 이야기를 담으라는 선생님 말씀이 지금은 한두 신문의 사설을 보는 것으로 축소되었지만 '무작정 공부만 하라'고 다그치는 답변은 아니었다. 어쩌면 남들보다 조금의 특기가 있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개발해보도록 작으나 깊은 언질을 주신 것처럼. 마치 <삶을 바꾼 만남>에서 다산 정약용이 제자들의 재능을 발굴해 다독이며 키워가는 부분이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맞춤식 공부라 생각이 될 정도로, 다산은 문예 중심의 문학文學과 학문 중심의 이학理學으로 나눠 제자들의 전공을 살려주었다. 당시 학문을 바라보는 관점인 듯하다. 글을 탐구하는 능력과 새로운 글을 창조하는 능력 말이다. 여기에 일과와 초서, 시를 짓는 숙제도 있었고, 격려와 훈계도 빠지지 않았다. 이런 과제가 일괄적으로 해오는 것이 아닌, 각자의 성취 정도에 따라 다르다는 점은 지금 보아도 여간 놀랍지 않다.

 

전남 강진 18년 유배길 그중 1802년 10월에 다산은, 머무르던 주막집 봉놋방에 작은 서당을 열었다. 15세 된 황상은 다산의 제자가 되어 배움을 청한다. 이쯤에 다산은 삼근三勤('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을 황상에게 일러준다. 이런 '부지런함'은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 처음부터 꾸준한 습관을 길들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 향후 과거에 제약은 물론 출세길에도 장애물이 적지 않은 황상이 학문이라는 거대한 도道를 맞닥뜨린다는 건, 열다섯 된 소년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있으나마나한, 밥을 빌어먹기에도 시원찮을 법한 길의 시작점에서, 한양에서 왔다던 높디높은 스승의 가르침 중 그의 심장을 유독 벌렁이게 한 한마디는 아니었을까. 반대로 다산의 입장에서라면 천주교 박해로 인해 폐족의 길을 걷게 된 집안의 나이 어린 아들들을 눈앞에서 한 자 배우는 황상에게서 떠올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전에 다산은 본가에 있는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혹 부지런히 공부를 한 게냐.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뜻을 지극히하고 힘을 부지런히 쏟아 책을 읽고, 책을 베끼고, 글을 지어야 한다. 허투루 시간을 보내면 못쓴다. (...) 보통 사람보다 백 배의 노력을 더 해야 간신히 사람 축에 낄 수 있을 게다. - p. 27

 

아비의 뼈아픈 한 마디가 녹아 있는 듯하다. 여기서도 '부지런히'라는 말이 눈에 띄는 걸 보면, 스승 다산에게 있어서도 이 부지런함은 학문의 원동력임과 동시에 후일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이라는 수많은 저서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과연 정학연, 정학유 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언젠가 신분이 회복되어 귀하게 쓰일 그 학문을 열심히 갈고 닦았을까. 책에서 아들들이 한 번씩 강진으로 내려올 때면 다산이 공부를 손봐주었다고 했다. 큰아들 학연은 자주 아버지를 찾아 황상, 혜장과 함께 연구시(운으로 삼을 자를 옹기에서 뽑아 즉석으로 두 구절씩 돌려짓는 것)를 두기도 하며 황상처럼 시에 재능을 보였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아버지의 질책과 격려가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반면, 둘째 학유에게는 우려가 스민, 그야말로 스승이자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는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익히 들어 유명한 황상과 다산의 문답도 이쯤에서 제시되었다. 학문에 있어 너무 둔하고, 앞뒤가 꼭 막혔으며, 답답하다는 황상의 말에 다산은 배우는 사람의 세 가지 문제로 완전히 제것이 아닌데도 민첩하게 금세 외우거나, 예리하게 글을 잘 지음으로써 재주를 못 이겨 들뜨거나, 깨달음이 재빨라 일명 대충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느낀 공부란 말이 복잡하고 난해해졌다. 이해를 못한다기보다는 이해에 있어서의 궁금증이 더럭 는 것이다. 이제껏 공부를 대해온 나의 태도를 보면 다산이 제기한 말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재빠르다는 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런 깨달음이 그때그때는 넘어가기가 쉬워도 이후에는 그 깊이가 너무 얕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상하게 같은 책으로 같이 주어진 시간 안에서 공부를 해도, 나중에 받아본 성적이 극과 극이라면 배운 것을 소화하는 데에 있어 안일하게 넘어간 것은 아닐까하며 조금 더 주의깊게 되새겨보게 되었다. A=B라면, 왜 A가 D도 E도 아닌 B와 같을 것이며 의외의 변수일 C는 없을지 탐구해보았다면 좋았을 법한데, '그래. A는 B야.'라는 단답을 그냥 단답식으로 넘겨버리는 꼴 같은 문제가 모름지기 반복되었다. 바로바로 넘어가버리고픈 이상한 심리도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괜히 문제를 보면 견디기 힘든, 저 많은 도출과정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해야한다는 강압적으로 다가왔던 그 마음을 모처럼 다산의 꾸지람을 듣고 나니 이제 조금은 문제를 문제답게 과정을 하나하나 열어가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의 변환이 생긴 것이다. 다산에게 배움을 받고 행하던 황상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목이 메어 말조차 떼지 못하고

헛된 눈물 주룩주룩 흘러내렸지.

꿈에 곡함 아침에 누가 알리오.

모습은 내 눈에 여태 선한데.

(...)

한 마음 순수하긴 처음과 같아

잠자리서 전날 공부 펼쳐본 것을. - p.451 「몽곡夢哭」中

 

개인적으로 다산을 만나 하나하나 배워가는 황상을 나에 이입해 바라보았다. 시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는 황상의 시구를 해석과 원문의 위치를 잡아가며 읽어보면서 당시 황상이 느낀 감정, 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떠했는지 궁금했으므로 그것을 지켜보는 과정은 제3자이자 독자의 입장으로서 쉽게 느껴보기 힘든 희열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시구보다도 시간이 훨씬 흐른 1851년 3월 30일 밤에, 황상이 꿈에서 뵌 스승 다산을 떠올리며 깨어나 지은 시 「몽곡」이 별안간 마음을 흔들었다. 다산이 18년 유배생활을 다 마치고(심지어 마지막 8년은 강진에서 본가로 돌아가기까지를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떠나, 1836년 2월 12일 다산의 회혼년(혼인한 지 60년이 되던 해)에 이르러서야 상경하여 겨우 만났다고 하는데, 제자인 자신을 바로 알아보고 돌아갈 여비를 손수 챙겨주며 안부를 물어오는 노년의 스승이 황상의 눈에도 사뭇 밟혔을 것이다. 쉬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 솔찬히 어울리던 상황이었다.

 

마재에서 스승과의 첫 대면은 결국 영결이 되고 말았다. - p. 409

 

고향으로 내려가던 찰나에 들은 스승의 영면 소식으로, 황상은 떠난 그의 곁을 절차를 자식처럼 지켰다고 했다. 그런 황상이 위의 시를 쓸 쯤은 60대로,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배운 수많은 지식이 여물어 하나의 기록으로 남을 시기가 아니었나. 어렸을 적 깐깐한 스승 다산에게, 너른 세상을 함께 다니며, 발길이 뜸하거든 스승이 편지를 보내며 찾아오라며 일러주던 그 참된 스승을 회고하는 시기에 적힌 시가 조금 더 날렵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더군다나 애잔했다, 스승이 자신의 눈 앞에 선한 모습을 시로 읊어내는 제자의 마음이. 그래도 진작 다산을 찾아 상경해 자주 만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동반한다. 마치 오래 전 자신은 강진에 내려와있지만 언제고 본가에 있는 아들들을 걱정하는 그때 그 시절 다산의 모습처럼, 황상도 마냥 바쁜 삶에만 좇기지 않고 스승을 걱정하며 한번씩 시간을 내어 찾아주었으면 하는 그 마음 말이다. 사실 책에서의 황상은 공부에 매진할 기회가 마땅찮았다. 아버지의 가업(아전 일)을 이었으며, 이미 공부를 오래 두고 하기에는 나이가 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산 덕분에 그 이상으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문화적인 교류(다산의 친형 정약전이나 후에 추사 김정희에게 글을 좋게 평가 받는다. 추사와는 후에 만남을 자주 가지기도 했다.)도 있었고, 책에서의 그는 스승의 말씀대로 부지런하게 학문에 임한 듯했다. 특히 위 시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렇다. '처음과 같아' 순수하게 학문을 임할 수 있게 해준 스승 다산,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읽어보며 부쩍 황상의 생각이 궁금했던 부분이자, 근면성실하게 스승을 본받아 살아왔던 제자가 훌훌 털어놓는 사무친 그리움이 배어 있다.

 

다산은 깐깐하다고 했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학문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다산은 깐깐한 것이 맞았다. 누구든 그렇다며 에둘러 넘어가고 싶지만, 흔히 공부를 하면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유혹이 있지 않던가. 공부의 적인지 공부의 동반자인지 모를 스마트폰과 컴퓨터, TV라는 전자기기부터, 이상하게 공부만 하려고 하면 눈에 띄는 먼지며 어질러져 보이는 책상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그렇고. 황상에게는 1805년에 들었다는 장가가 그러했던 모양이다.

 

진실로 능히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뜻을 고쳐, 내외가 따로 거처하도록 해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글공부에 힘을 쏟을 수 없다면, 글이 안 될 뿐 아니라 병약해져서 오래 살수도 없을 터. - p. 138

 

스승의 불호령이 내렸다. 결론은 애정이 뭉실 오를 신혼 초, 황상 부부는 따로 거처했고 황상은 공부에 부지런하게 매진한다. 이후 아이가 잘 생기지 않자 내심 걱정한 스승은 천웅을 주었고, 이후 태어난 황상 아들의 이름이 그대로 천웅天雄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다산은 학문에 앞서, 기본적인 의례에 있어서는 엄격한 스승으로 보인다. 황상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룬 일을 보면 그렇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바란대로 가묘를 쓴 데다가 삼우제를 지내지 않은 황상에게 화를 내며 1년 소상小祥까지 지내게 한다. 그쯤 황상에게 이제 그만 내려와서 공부를 하기를 권하는 편지를 보낸다. 다소 깐깐한 스승에게 반발하기는커녕 황상은 잘 따라왔다.

 

다산에게 황상은 참 정이 많이 가는 제자였는지도 모른다. 책의 처음에는 다산의 비상飛上적인 공부 방법과 이를 따라 시라는 재능을 펼쳐나가는 제자 황상의 이야기였다면, 조금씩 그들의 삶과 정이 하나씩 묻어나면서 정말 막연히도 인간적이다, 라는 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작약을 좋아하는 스승과 치자를 좋아하는 제자처럼 꽃을 좋아한다는 점도, 말년에는 제자들로 송사로 시끌하며 편히 보내지 못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산은 다산초당, 황상은 일속산방을 지어 학문을 닦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면 서로 닮아간다는 말처럼,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느새 나의 뒷모습과 닮아 있다는 이야기처럼, 끈끈하게 이어져왔던 두 사제의 만남은 한 권의 책에 오롯이 담겼다. 별안간 나의 인생에 있어서 특정한 누군가와 만나 삶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은, 다산과 황상의 만남이 처음이다. 그것도 정情을 내포하고 있는 사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특별하다. 물론 누구나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사귀고 만나며 조금씩 삶이 변하기는 한다. 이제껏 없었던 뚜렷한 목표가 생기기도 하고 되려 허물어지기도 한다. 왠지 이 사람을 만나면 괜스레 즐거워진다. 뭐, 이렇게 단편적으로나마 부산하듯 남발스러운 느낌을 받아왔다면, 다산과 황상의 만남은 학문으로 시작해 조금씩 삶의 변화가 생긴다는 점이 진중하다. 황상의 나이 열 다섯에 만난 이 영향이 그가 4언 8장 시경체 시로 자신의 일생을 들여다보던 노년의 삶까지 부단하게 바뀌어오고 있었다는 것. 이 점에서 이 둘의 만남은 여느 만남보다 특별한 의미를 둘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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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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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은 하나뿐인 인생을 염두에 둘 때 가치가 있지만 자칫 잡념으로 뭉쳐 해석될 여지도 있다. 활약과 눈부신 성공에 환희하고 부러움을 떠안는 사회에서 우리는 한 길을 선택할 기회를 앞둔다. 개개인의 적성과 능력에 맞추거나 단지 열망하듯 원하는 길이 있다면 둘 사이의 고뇌는 중압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장래 희망이라 쓰여왔던 많은 직업들이 바스라지듯 먼지가 되어 훌훌 털어버렸는데, 눈 앞의 길은 미명처럼 갓 밝아온다면 추구하는 삶의 기준도 어느샌가 흐릿해진다. 개봉으로 상경해 진사 시험을 허튼 실수로 끝낸 조행덕의 심정도 이러할까. 무디게 마무리짓기에 백면서생하며 살아온 영겁의 삶은 버거울지 모른다. 그 순간부터 찾아올 탄식과 좌절은 또 어떻겠는가. 오롯이 한 길을 선택해 거쳐온 삶은 차곡차곡 올려낸 모래성이 이제 '항복이요!'를 외치며 무너질 지경이다. 그러나 생은 포기하지 말라며 미지의 길을 하나 남겨놓는다. 그에게 미지란 호기심이었을테니. 글을 읽던 선비가 발견한, 알몸의 여자가 건네준 글자가 적힌 천 조각은 못내 자글거리던 마음을 당혹감과 놀라움으로 바꾼다. 만만치 않은 첫 여정은 의외의 물음이 함께하고 있었다. 단순히 맞닥뜨렸다면 지렁이가 단체로 기어다닌다는냥 땅으로 곤두박질쳤을 자질구레한 물음 덩어리는 새로운 삶의 지표로 다가온다.

 

흔들리는 모래폭풍에 맞서고 실컷 두드려맞으며 털어내는 묵은 때 뒤로 여정은 등불을 밝혔다. 1900년에 발견되기 시작한 5만여 점의 경전이 마지막 보루인 둔황 석굴 뒤로 자취를 감춘 비밀을 말이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 비틀어 묵묵히 걷기 시작한 길은 되려 많은 고행이 뒤따르기도 한다. 이왕 선택했으니 후회보다 전진이 앞서는 첫 때는 더 쓰러지기 십상이다. 피하지 못할 망설임이 재재소소 만연해있기에. 선택은 다시 선택을 판가름하며 되돌아온다, 그렇게 다시 되묻는다. 선택한 길에 더 이상 후회가 없는지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지를 재빠르게 올라갔다 곤두박질하듯 추락하며 변화무쌍한 사막의 온·한기로 대답을 한시 빨리 재촉한다. 그러할 때 이노우에 야스시 作 <둔황>은 은근한 빈틈으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띄엄띄엄이라 평하면 좋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곳곳의 빈틈은 독자의 상상력을 더할 틈을 마련해준다. 행덕이 몸소 느끼는 바락바락한 기온도 짧은 연민과 옛 추억도 알 수 없었던 서하 문자라는 틀을 잡고 나니 거센 모래바람으로 곁을 스쳐간다. 집필한지 숱한 세월이 흘러서야 실제로 둔황을 방문했다던 저자의 이야기가 실로 무색할 정도로 견고한 석굴과 선봉대로써 많은 나날을 긴장하며 싸워야 했던 주왕례의 군대가 포효를 지르며 맞선 백절불굴의 전투, 낙타 떼들과 모는 이들 사이로 장사 수완과 배짱 좋은 위지광이 바람을 헤치며 오가던 모래사막까지. 멋쩍게 석연하던 후회가 곱절로 떨어져감은 바로 이들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고민으로부터 행동에 옮기기까지의 시간은 짧고 도약까지의 기간은 길다. 저마다 여정을 떠났더라도 혹한 바람은 멈출줄 모른다. 천으로 둘러매 꽁꽁 얼굴을 감싸더라도 바람결따라 숨어드는 모래알까지 막기란 쉽지 않다. 질기게 견디고 싶지만 흔들릴 때는 어쩔줄 모른다. 그때마다 불안정한 앞길을 잡아주고 끌어주며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곁이 든든하지 않을까. 혼자 해결하기 힘든 마음을 훌훌 털어놓는 것처럼 속 시원한 일은 없을테니. 간단히 웃음 짓기조차 힘들어 했던 내가 어느 날 가족에게 속내를 털어 고민이 끝끝내 잠식되었던 것도 불안정한 미래가 뼈저리게 다가오던 그때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친구의 눈을 보며 잠시 잊어냈던 시절도 뭇내 떠오른다. <둔황>을 읽으며 모쪼록 많은 생각이 든다. 한편의 모험 같은 소설이라며 어디선가 파편으로 들은 기대의 말이 잊혀지고 본질을 보니 행덕의 삶 곳곳에서 수많은 이야기는 기다린다. 괴롭고 걱정스러울 때 느꼈던 위구르 왕족 여인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을, 일촉즉발의 위기와 불타오르는 성에서도 경전을 지켜내고자 투합해 동분서주하며 선택했던 마지막 길을 말이다. 불안정하며 떨던 시간은 어느새 잊혀져 간다. 어느새 새로운 길을 선택해 달려가는 행덕이 뇌리에 박혀 잠시 그와 동일시하며 직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하루가 다르게 피로하고 고단했던 삶을 보내면서 새로운 내일이 다가오기를 두려워하거나 오늘 하루 '이뤄낸 일이 없다'를 되새기며 잠든 나날을 지켜보던 나는, 행덕이 주왕례와 끝내 의리를 지키며 맞서싸우던 용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얼마나 지났을까, 행덕은 무심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사방에는 병사들이 여전히 말이나 낙타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행덕의 눈에는 그런 병사와 말의 무리가, 마치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부터 같은 자세로 이곳 사막의 한구석에 방치된 석조 조각상의 무리처럼 느껴졌다. - p. 170

60마리의 큼지막한 동물들이 각기 최대한 실을 수 있는 분량의 경전을 싣고 달빛이 쏟아지는 사막을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감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행덕은 이날 밤을 위해 이제껏 그 오랜 세월을 사막을 떠돌아다닌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 p. 211~212

 

단 하나뿐인 생을 살며 의뭉스러운 점은 적지 않았다. 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것에 조금씩 지쳐버릴 때와 내게 주어진 길을 각고의 노력으로 뼈저리게 이겨내야 하는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은 물론이고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도, 도중에 일시하차해 멈춘다면 슬쩍 보이는 주변 눈치에 점차 침잠해가는 마음도 말이다. 마음으로 그려낸 길을 현실로 불러 이루어내려면 간절함도 필요하지만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이제는 행덕을 통해 새록하게 다가온다. 면난한 얼굴을 내려놓고 다시 곧게 출발하려면 지난 일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용기의 씨앗으로 삼아야 한다. 새파란 호기심만 있다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삶과 인생 전체를 직관할 수 있는 또 다른 눈인, 용기라는 그릇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척박하고 쓰린 모래바람을 견디고 내가 정해 걸어가는 길을 물리지 않도록 힘차게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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