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삶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은 하나뿐인 인생을 염두에 둘 때 가치가 있지만 자칫 잡념으로 뭉쳐 해석될 여지도 있다. 활약과 눈부신 성공에 환희하고 부러움을 떠안는 사회에서 우리는 한 길을 선택할 기회를 앞둔다. 개개인의 적성과 능력에 맞추거나 단지 열망하듯 원하는 길이 있다면 둘 사이의 고뇌는 중압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장래 희망이라 쓰여왔던 많은 직업들이 바스라지듯 먼지가 되어 훌훌 털어버렸는데, 눈 앞의 길은 미명처럼 갓 밝아온다면 추구하는 삶의 기준도 어느샌가 흐릿해진다. 개봉으로 상경해 진사 시험을 허튼 실수로 끝낸 조행덕의 심정도 이러할까. 무디게 마무리짓기에 백면서생하며 살아온 영겁의 삶은 버거울지 모른다. 그 순간부터 찾아올 탄식과 좌절은 또 어떻겠는가. 오롯이 한 길을 선택해 거쳐온 삶은 차곡차곡 올려낸 모래성이 이제 '항복이요!'를 외치며 무너질 지경이다. 그러나 생은 포기하지 말라며 미지의 길을 하나 남겨놓는다. 그에게 미지란 호기심이었을테니. 글을 읽던 선비가 발견한, 알몸의 여자가 건네준 글자가 적힌 천 조각은 못내 자글거리던 마음을 당혹감과 놀라움으로 바꾼다. 만만치 않은 첫 여정은 의외의 물음이 함께하고 있었다. 단순히 맞닥뜨렸다면 지렁이가 단체로 기어다닌다는냥 땅으로 곤두박질쳤을 자질구레한 물음 덩어리는 새로운 삶의 지표로 다가온다.

 

흔들리는 모래폭풍에 맞서고 실컷 두드려맞으며 털어내는 묵은 때 뒤로 여정은 등불을 밝혔다. 1900년에 발견되기 시작한 5만여 점의 경전이 마지막 보루인 둔황 석굴 뒤로 자취를 감춘 비밀을 말이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 비틀어 묵묵히 걷기 시작한 길은 되려 많은 고행이 뒤따르기도 한다. 이왕 선택했으니 후회보다 전진이 앞서는 첫 때는 더 쓰러지기 십상이다. 피하지 못할 망설임이 재재소소 만연해있기에. 선택은 다시 선택을 판가름하며 되돌아온다, 그렇게 다시 되묻는다. 선택한 길에 더 이상 후회가 없는지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지를 재빠르게 올라갔다 곤두박질하듯 추락하며 변화무쌍한 사막의 온·한기로 대답을 한시 빨리 재촉한다. 그러할 때 이노우에 야스시 作 <둔황>은 은근한 빈틈으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띄엄띄엄이라 평하면 좋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곳곳의 빈틈은 독자의 상상력을 더할 틈을 마련해준다. 행덕이 몸소 느끼는 바락바락한 기온도 짧은 연민과 옛 추억도 알 수 없었던 서하 문자라는 틀을 잡고 나니 거센 모래바람으로 곁을 스쳐간다. 집필한지 숱한 세월이 흘러서야 실제로 둔황을 방문했다던 저자의 이야기가 실로 무색할 정도로 견고한 석굴과 선봉대로써 많은 나날을 긴장하며 싸워야 했던 주왕례의 군대가 포효를 지르며 맞선 백절불굴의 전투, 낙타 떼들과 모는 이들 사이로 장사 수완과 배짱 좋은 위지광이 바람을 헤치며 오가던 모래사막까지. 멋쩍게 석연하던 후회가 곱절로 떨어져감은 바로 이들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고민으로부터 행동에 옮기기까지의 시간은 짧고 도약까지의 기간은 길다. 저마다 여정을 떠났더라도 혹한 바람은 멈출줄 모른다. 천으로 둘러매 꽁꽁 얼굴을 감싸더라도 바람결따라 숨어드는 모래알까지 막기란 쉽지 않다. 질기게 견디고 싶지만 흔들릴 때는 어쩔줄 모른다. 그때마다 불안정한 앞길을 잡아주고 끌어주며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곁이 든든하지 않을까. 혼자 해결하기 힘든 마음을 훌훌 털어놓는 것처럼 속 시원한 일은 없을테니. 간단히 웃음 짓기조차 힘들어 했던 내가 어느 날 가족에게 속내를 털어 고민이 끝끝내 잠식되었던 것도 불안정한 미래가 뼈저리게 다가오던 그때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친구의 눈을 보며 잠시 잊어냈던 시절도 뭇내 떠오른다. <둔황>을 읽으며 모쪼록 많은 생각이 든다. 한편의 모험 같은 소설이라며 어디선가 파편으로 들은 기대의 말이 잊혀지고 본질을 보니 행덕의 삶 곳곳에서 수많은 이야기는 기다린다. 괴롭고 걱정스러울 때 느꼈던 위구르 왕족 여인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을, 일촉즉발의 위기와 불타오르는 성에서도 경전을 지켜내고자 투합해 동분서주하며 선택했던 마지막 길을 말이다. 불안정하며 떨던 시간은 어느새 잊혀져 간다. 어느새 새로운 길을 선택해 달려가는 행덕이 뇌리에 박혀 잠시 그와 동일시하며 직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하루가 다르게 피로하고 고단했던 삶을 보내면서 새로운 내일이 다가오기를 두려워하거나 오늘 하루 '이뤄낸 일이 없다'를 되새기며 잠든 나날을 지켜보던 나는, 행덕이 주왕례와 끝내 의리를 지키며 맞서싸우던 용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얼마나 지났을까, 행덕은 무심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사방에는 병사들이 여전히 말이나 낙타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행덕의 눈에는 그런 병사와 말의 무리가, 마치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부터 같은 자세로 이곳 사막의 한구석에 방치된 석조 조각상의 무리처럼 느껴졌다. - p. 170

60마리의 큼지막한 동물들이 각기 최대한 실을 수 있는 분량의 경전을 싣고 달빛이 쏟아지는 사막을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감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행덕은 이날 밤을 위해 이제껏 그 오랜 세월을 사막을 떠돌아다닌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 p. 211~212

 

단 하나뿐인 생을 살며 의뭉스러운 점은 적지 않았다. 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것에 조금씩 지쳐버릴 때와 내게 주어진 길을 각고의 노력으로 뼈저리게 이겨내야 하는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은 물론이고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도, 도중에 일시하차해 멈춘다면 슬쩍 보이는 주변 눈치에 점차 침잠해가는 마음도 말이다. 마음으로 그려낸 길을 현실로 불러 이루어내려면 간절함도 필요하지만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이제는 행덕을 통해 새록하게 다가온다. 면난한 얼굴을 내려놓고 다시 곧게 출발하려면 지난 일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용기의 씨앗으로 삼아야 한다. 새파란 호기심만 있다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삶과 인생 전체를 직관할 수 있는 또 다른 눈인, 용기라는 그릇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척박하고 쓰린 모래바람을 견디고 내가 정해 걸어가는 길을 물리지 않도록 힘차게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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