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없음 - 기독교인의 인생을 빛나게 할 삶의 태도 10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기독교 목사님이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일생에 대하여 쓴 글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년 동안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붙여주는 이름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이름들의 상위랭킹을 발표하는데, 그 때 빠지지 않는 이름 3개가 David, Joseph, Daniel이다. 

 

 

이 이름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다윗왕, 요셉, 그리고 다니엘을 뜻한다.  성경에서 그려지는 이 세 사람의 삶은 그 시대도 처해있던 상황도 달랐었다.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 전 이집트에서 살다가 노예에서 총리까지 올라갔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다윗왕은 이스라엘이 드디어 왕국을 이루려는 시기, 들판의 목동에서 시작해서 죽음의 온갖 위험을 넘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원한 자긍심을 줄 중동의 거대왕국의 기초를 닦은 초대임금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렇게 형성된 왕국에서 왕족 또는 상위귀족의 자제로 태어나 그 나라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철저히 무너지고 파괴되는 시점에 바빌로니아궁으로 끌려가 언제라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전쟁포로에서 (성경연구가들에 의하면 아마도 거세되어 내시가 된 이후) 당시 대제국이었던 바빌로니아제국에서 재상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 명의 공통점은, 보잘것없는 신분에서 (아무리 부유한 가정이나 귀족가문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노예로 전락했기에) 끝에는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오르거나, 또는 영원한 왕국의 계보에 그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동경의 눈으로 볼 만한 이들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엄청난 고난과 시련,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 행동과 마음을 갈고 닦았기에 결국 들어쓰셨다는 부분에서 큰 도전인 동시에 위로가 되는 인물들이다.  사실 성경에는 상상할 수도 없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 결국 돌이키지 못 하고 그대로 스러져간(하지만 물론 믿음 속에서) 인물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들은 분명 지구 상에 발을 붙이고 육체를 입고 살아가야하는 인간 입장에서는 어쨌든 그 끝만큼은 부러울 수밖에 없는 삶이긴 하다.  그러다보니 기독교관련 서적에서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 연구해서 나오는 저작물들 중 이 세 사람의 일생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는 참 '4가지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책이 요셉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하지만 다 읽고나니, 그 제목의 속뜻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개념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그 어렵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나긴 터널 속에서 끝까지 우직하게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의 행실과 마음을 지켜낸 요셉의 자세를 분석한 내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요셉의 삶에 대한 연구와 성찰에 관한 내용은 다른 여러 저서들이 많으니 여기서 굳이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읽으며 내게 크게 다가온 부분이 있어서 잊지 않고자 적어본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서 걸어가다보면,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자기성찰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해가나 알 수가 있는데 그렇게해서 발휘된 덕목들을 나누어 설명한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다툼, 관계의 파괴"였다.  서로 생각이 다르니 당연히 의견도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 의견이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춰서 거기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며 다시 합의를 도출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때로는 그로 인한 감정싸움으로 서로에 대한 비방과 비난으로 돌이킬 수 없는 관계파탄으로 가는 경우는 크게는 국가 간에서부터 작게는 가정 내 부부간의 대화, 그리고 더 작게는 어린아이들의 다툼까지 하루에도 지구 상 어디서나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 끝은 최악의 경우는 전쟁일 것이고 이혼일 것이고 또는 절교일 수 있다.  그로 인한 피해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모든 그러한 결과의 공통점은 바로 관계의 파괴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식으로 관계를 파괴하기보다는 조용히 인내하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섣부른 해명으로 오히려 상대를 자극하기보다는 - 어떨 때는 나를 위한 해명 또는 변명이 본의 아니게 상대의 틀림을 지적하는 비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이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알게 되었다 -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내 죄없음을 아십니다" 하고 믿음으로 견뎌내는 모습으로 그 스스로를 단련시켜갔기에, 요셉의 관계는 파괴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무시하고 잊었던 이들이 나중에는 그를 천거해주었고, 또 정황 상 그가 파라오의 궁에서 재상이 되었을 때 함께 일하며 그를 성심껏 보좌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란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용된 글이 바로 저 제목에 있는 글귀였다.

 

終身讓路不枉百步 終身讓畔不失一段
종신양로불왕백보  종신양반불실일단 
 
"평생 길을 양보해도 백보에 지나지 않고, 평생 밭고랑을 양보해도 한 이랑에 지나지 않는다." <唐書> (小學에서 인용)

 

이 글귀를 보는 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느낌에 잠시 멍했었다.  나는 운전하면서 간혹 차선을 안 지키고 오다가 끝에 가서 살짝 끼어들려고 하는 차들을 보면 많이 폭발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어디 부딪히려면 부딪혀 봐, 너같은 얌체한테 내가 비켜주나.'라는 마음으로 독하게 앞 차의 꽁무니에 내 차의 코를 갖다대면서 옆에서 들어오려는 차를 오히려 밀어부치며 진행한다.  일반차량도 마찬가지지만 택시가 그렇게 할 때는 더 화가 나는 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전문가가 있고, 그 전문가는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타의 모범이 되야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운전에 있어서 전문가들은 바로 택시나 버스를 운행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업무에 자부심을 갖고 차선과 신호를 준수함으로써 그 자부심을 주변인들에게 보여주고 그로 인해 운전질서의 교본으로 또 보이지 않는 경고장으로 주변의 운전자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분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런 역할을 산뜻하게(?) 내버리고 "나 하나만 편하다면.."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운전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용납하기가 어려운 편이다.  또 길을 걸을 때는 현재 내 발이 딛고 있는 그 작은 공간 하나 하나가 내게 귀속된 것인 동시에 내 옆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귀속된 땅을 순간순간 이동해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넘겨주고 넘겨받는 입장이니, 결국 공유하는 입장에서 서로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며 주변인들을 배려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작은 곳에서부터 옳바름의 씨를 뿌리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행여 길을 걷다가 어딘가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때, 내가 잠시 뒤에서 오는 사람이 있나 어깨너머로 확인하고 사람이 있을 경우 그 문을 몇 초간 잡아줄 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달리 짧은 눈인사나 목례 또는 예의 상으로 그 유리문에 살짝 손을 대는 시늉을 함으로써 그 사회적 통념 상의 기본예의를 내게서 넘겨받아 다시 뒤로 전달하는 중간역할에 소홀한 보행자를 만날 때는, 바로 그 유리문을 그 사람의 코 앞에서 놔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뒷사람이 부딪힐 것같은 위협감을 느끼며 급하게 문을 잡고나서 내 뒷통수를 향해 눈을 흘기거나 욕을 하거나, 내 입장에서는 더 신경쓸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인간 모양의 생물체가 하는 행동이기에 난 그대로 편히 내 갈 길을 간다.)

 

그런데 책에서 접한 위의 글귀는, 실은 길에서 만난 그들이 얌체이고 인두껍을 쓴 동물이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이 인간으로써 사회 속에 살아갈 때 갖춰야 할 덕목을 못 갖춘 사람꼴의 생물체였단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다 한 번 뻥 뚫린 좌회전차선을 신나게 타고 달려와 길게 꼬리를 물고 서있었던 직진차선의 앞머리에서 슬쩍 끼어들려고 하는 차량에게 양보를 해주고 그 차가 비상등 정도로라도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고 그냥 가버릴 때, 또는 문을 잡고 일부러 서서 기다려줬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오히려 내 앞을 지나쳐서 그대로 먼저 통과해서 가버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불쾌하고 그로 인해 더 그런 차량들이나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게 되었나를 돌이켜보면, 결국 내 입장에서는 "이 만큼씩!!이나 양보했는데"라는 마음과 그에 대한 보상을 은연 중에 바라고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런데 저 글귀를 보면, 그렇게 아무 댓가 없이 평생을 길을 양보해봐야 사실은 백보가 채 안 된단다.  어디 길 뿐이겠는가, 누군가가 물건 하나 빌려달라고 했을 때 또는 시간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내 물건 내 시간 귀한 것만 생각하고 이리 재고 저리 재서 yes or no를 내놓은 나의 편협함은 타인의 예의없음을 탓할 자격이 있으며, 배려 운운하며 단순한 행동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남의 집 아이들을 빗대어 그 부모들을 흉볼 수준이나 되었겠는가 싶으니 정말 낯이 뜨거워졌다. 

 

 

그 날 저 책은 저 글귀가 있었던 부분에서 일단 덮여졌다.  저 글귀를 외우고 음미하느라 그 뒤로 페이지를 바로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낮에 읽었던 부분을 계속 되뇌이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어 옆에서 곤히 잠든 아들의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떠오른 생각은, '어쩌면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그 사회를 점점 더 각박하고 예의없고 배려없는 곳이 되도록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 살아온 사람은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이 아이에게 물려주고픈 사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싶어 많이 미안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저 글귀를 외우며 운전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조금씩 더 양보하기 시작했다, 내가 손해보는 것이란 착각에서 깨어나고나니 화낼 것도 억울할 것도 없었던 그 단순한 행위를 왜 진작 깨닫고 실천하지 못 했었는지..  아니,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나부터 이 세상에 알게모르게 좋은 씨를 뿌리게 된다는 사실을 왜 생각 못 했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선인들의 글과 지혜는 자꾸 접해야하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행여 이 앎이 무뎌지거나 잊혀질까 두려워 역시 리뷰로 남겨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