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백의 그림자

황정은 │ 민음사  │ 2010.06.05  │ p.192

 

 

 

白,  흰색은 눈이나 우유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한 색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책은 하얀색을 흉내내지 않고 당당하게 전혀 밝고 선명하지 못한 채로 회색 혹은 크림색을 닮고 짙게 어두운 검은색의 그림자까지 갖고 있으면서 白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너무 당당하면 - 설령 상대방이 틀린 듯 하여도 -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지요. 지난 해 자주 눈에 밟히던 책을 손에 쥐고도 한참이나 익히고 익혀 읽었습니다. 은교의 그림자가 자라듯 기대가 자라면 두려운 법입니다.  이야기는 당혹스러울만큼 덤덤한 빛으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사랑한다는 말은 끝까지 내놓지도 않습니다.

 

그림자를 따라 나선 은교와 그런 은교를 말리는 무재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은교와 무재, 그들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퇴락한 40년 된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현실에 닿으려해도 싹둑싹뚝 매몰차게 잘라지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일어섭니다. 재개발로 상가는 하나씩 철거되고 그 곳에 공원에 들어서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작아 은교는 흠짓 놀랍니다. 길을 잃고 헤매이던 공간이 사실은 한 눈에 보이는 공원이 되었다니. 전자상가, 40년의 시간이 담긴 그 곳에서 삶의 쳇바퀴를 무던히도 밟던 사람들의 먹먹해서 너무 먹먹해서 슬프지 못한 이야기가 밋밋하게 흘러갑니다. 그것을 그대로 닮은 은교와 무재의 사랑도 그렇게 새빨간 붉은빛이 아니라 회색빛이 도는 붉은 그러니까 인디핑크, 그정도랄까.

 

마주 앉아 갈비탕과 냉면을 먹으며 - 은교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만큼 땀을 흘리면서 갈비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만 열심히 삼켜내지요 -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p. 39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은교와 무재의 대화는 늘 심심하지만 그 덤덤함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것은 무채색이 지니는 채도탓일까요? 소란스럽지 않은 사랑, 그 사랑에서 억지스럽지 않은 진심이 가득 스며 번집니다. p. 123 무재 씨가 보내오는 공은 너무 높아서 힘껏 팔을 뻗어도 머리 위로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높다고 불평하자 높아도, 언젠가 떨어지잖아요, 그때를 노리면 되죠, 라면서 무재 씨는 은근히 약 올리듯 말했다. 어느날엔가는 번성했을 그래서 높이 솟았던 전자상가 건물의 쇠락처럼,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을 수는 없는거니까.

 

그리고 그림자.  (나는 이 책을 구입해서 한 번 더 읽을 량으로 작품해설은 앞 장을 좀 넘기다 덮었습니다.) 그림자와 관련된 시가 한 편 생각이 났습니다.

 

 

비둘기 그림자는, 비둘기 곁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쪼아댄다. 제법 곁눈질이 늘어 비둘기보다 큰 부리로 비둘기보다 더 깊이 바닥의 침묵을 흠집 낸다. 기회를 보아 비둘기를 생포할 자세다. 그러나 비둘기가 날아오르면 제 아무리 큰 보폭으로 쫓아가도 얼마 못 가 비둘기의 속도를 놓쳐 버린다.

 

꽃이 꽃을 버리는 줄 모르고 꽃 그림자는, 홀로 취해 제 향기를 날린 적이 여러 번 있다.

 

  심언주. 『4월아, 미안하다 』 에서 <관계>

 

 

그림자,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것, 그림자와 내가 똑같은 크기인 순간이 존재할까요? 나보다 작거나 혹은 나보다 크거나 그러한 순간들. 내것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내 것인 그림자.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김애란이 떠오릅니다. 김애란보다 조금 더 덤덤하고 김애란이 조금 더 씩씩하고 김애란만큼 위트 있고 김애란만큼 문장력이 좋은 작가입니다. 삶의 터전의 몰락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노을이 지기 전 그림자가 가장 길어지는 늦은 오후의 나른함만큼 부들거리며 그러나 또박또박 흔들림없이 쓰여져 있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 위태롭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쌀밥 한 공기처럼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 소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소설을 만났습니다.

 

 

 

p. 141

 

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에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