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또는 유년의 기억 펭귄클래식 110
조르주 페렉 지음, 이재룡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W 또는 유년의 기억│조르주 페렉│펭귄클래식코리아│2011.06.27

 

 

기억(記憶)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3. 계산에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시간만큼 수용하여 두는 기능


 

 

기억을 잃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몇 해 전 리사 제노바의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라는 책을 읽었지요.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50세의 앨리스(남편도 하버드 교수, 큰 딸은 법대, 둘째는 의대, 막내는 배우입니다. 미국 상류층 백인의 전형이죠)가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피아니시모처럼 여리게 소멸해가는 기억의 과정을 앨리스의 목소리로 이야기하죠. 알츠하이머, 는 더 이상 흥미로운 소재는 아니예요. 하지만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에서는 늘 이야기되던 알츠하이머 환자의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으로서가 아니라 기억을 잃어가는 주체가 겪는 상실감을 애잔하게 그러나 담담히 그려냅니다. 이 소설의 원제는 STILL ALICE입니다. 기억의 빛이 소멸해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입니다.

 

<W 또는 유년의 기억>은 W와 유년기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흐릅니다. p. 57 나는 쓴다. 나는 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함께 살았고, 나는 그들 속에 있었으며, 그들 그림자 속의 그림자, 그들 몸 가까이에 있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게 지울 수 없는 그들이 흔적을 남겼으며 그 흔적의 자국이 바로 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억은 글쓰기에서 죽는다. 글쓰기는 그들 죽음의 기억이며 내 삶의 확인이다. 반듯반듯하게 첫번째 씌여진 이야기는 실종된 진짜 가스파르 뱅클레를 찾아 가는 여정입니다. (사실은 퐌타스틱한 이야기를 살짝 기대했었지요, 기대는 와르르!) 두 번째 이야기는 안개처럼 흐릿한 자신의 이야기를 삶의 연장선 어디쯤에서 살짝 벗겨나 담담하도록 이야기합니다. 쫄레쫄레 그의 이야기를 뒤따르다가 어딘가에쯤, 두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리라 기대헀지만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속시원히 까발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W 에서는 가스파르 뱅클레가,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유년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와 기억의 실종.

 









W섬, 올림픽의 이상(理想)이 지배했던 공간이라 말합니다. p.180 직위가 아무리 낮더라도 하급 관리자들은 선수에 대해 전능한 권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를 동반한 야만성을 발휘해서 잔혹한 스포츠의 법을 준수하도록 강요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잘고, 더 편하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운명은 영원히 감독관의 성난 시선과 부심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 주심의 기분이나 장난에 좌우된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運命)을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운(運)일 뿐입니다. 여자의 숫자를 제한하기 위해 태어난 여자 아이의 다섯 중 하나만 살려 두죠. 아이들은 집단 양육되며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를 거머쥐면 관리자가 될 수 있고 누군가의 운을 마음껏 주무릅니다. 페렉의 가정을 붕괴시키고, 유년 시절의 기억을 누락시킨 2차 세계대전은 W섬 그 자체, W의 변질된 이상(理想) 나치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런지.

  



그리고 그의 이야기. 2차 셰계대전이라는 사실을 배제한다면 기억의 소실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이야기들이 끊어질 듯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아쉬움과 전장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아버지의 죽음으로의 실망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누락 등을 태연하게 조근조근 설명하지만 오히려 담담해지려는 그의 노력에 콧날이 시큰하기도 하였습니다. p.78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해양경비대보다 내가 아이를 찾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믿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패렉(가스파라 벵클레의 이름을 빌린)은 실종된 가스파라 벵클레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 숨길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발견되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기억에 없다고 못 박았던 - p.17 나에겐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없다 -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지우고 싶은 것일까요. 그렇게 'W 혹은 유년의 기억'은 'W 그리고 유년의 기억'으로 전혀 다른 공간의 이야기이지만 어디쯤에도 손을 댈 수 없이 엉키고 설킨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p193

따라서 기억의 무재는 죄의식을 동반하는 동시에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기방어가 아니었을까.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이름조차 그 어원상 "구멍"을 뜻한다고 설명한 것은 바로 결핍, 구멍이 자신의 뜻과 무관한 천부적 숙명임을 강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망각은 나의 책임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체성이며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은 애도 작업의 일환이 될 것이다.

 

 

아마도 독서모임, 이라는 기회가 아니였다면 마주하지 못했을 페렉은 내게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입니다. 하지만 옹송그리던 나의 독서는 이렇게 조금씩 기지개를 켭니다. 한 권의 책을 7번 읽은 기분이라서 1타 7피랄까, 쉽게 너무도 많은 걸 얻은 듯 하여 조금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은걸요. 그리고 나도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어야겠다고 그래서 당신께도 내가 제대로 1피의 몫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녀, 어른이되다.

copyright ⓒ 2011 by. Yuju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