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가미│구병모│자음과모음│2011.03.30

습기가 가득한 나른함이 어떠한 여분의 공간도 허락치 않을 기세로 빽빽하게 메워져 있습니다. p.47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렇네요. 딱 아다지오의 템포로. 이내호의 녹슨 철망과, 어정쩡하고 흉물스럽기까지한 구조물들, 제멋대로 훼손된 숲의 모습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며칠을 보내도 끈덕지게 나를 따라붙습니다.

사실은 마음이 좀 바쁘긴 했는데, 추석 연휴 틈틈히 이 책을 읽었어요. 그리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 정말, 화가 난 복어같아요 아니 꼬리와 지느러미가 달린 풍선? - 어항 속 금붕어들을 한참이나 바라봅니다. 아빠는 농삼아 곧, 매운탕을 끓여도 될 것 같다며 웃어요. 사실은 손가락 두마디만하지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금붕어를 손바닥에 건져올렸어요. 아가미, 가 보고 싶어서. 생각해보니 나 너무 잔인했던 것 같기도 하고. 생의 처음, 생사(生死)가 달린 위기의 순간, 그 무기력한 존재의 움직임에 직면했어요. 세 살배기 사촌동생이 "눈아, 물고기 죽어요." 하길래 황망하게 물 속에 손을 담갔습니다.

이야기는 택시비가 없어 강다리 다 건너지 못하고 내린, 기적적으로 다리 가장가지에 반쯤 걸쳐져 놓인 휴대전화를 주우려다가 강물에 떨어져 사람인지 물고기인지 모를 인어왕자로부터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해류로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이야기는 과거로 흘러갑니다. 삶의 벼랑끝에 몰린 남자와 그의 아이, 그리고 우발적인 사고까지 덮쳐 그는 이내호를 찾습니다. 그리고 이내호에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내촌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할아버지는 그 물소리를 듣고 이내호를 살피고 아이를 발견합니다. 노인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아이의 귀 뒤에서 이상한 상처를 발견합니다. 칼을 수직으로 꽂아 도려내다만 듯한 곡선, 흡사 아가미와 같은. 도대체 이 아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p.21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강하와 할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인 곤, 그 세상에서 떨어져 강을 앞에 둔 어느 민박집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살고 있는 곤의 삶은 불행할까요? 거스를수 없는 운명처럼,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을 아가미를 가진 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작가는 말합니다. p. 202 아무리 산란회유를 하는 물고기처럼 힘차게 몸을 솟구치려 해도, 이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이에요. 누에고치처럼 틀어박쳐 자신만의 잠사로 온몸을 감싼 채로는, 코가 뚫리고 건강한 폐를 가졌다 해서 숨 쉴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누구나 아가미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곁에 두고 살아야만 하며, 내 옆에는 다행이 그런 분들이 있다고 말이에요. 그래요, 중요한 것은 곤이 가진 '아가미'가 아니라 곤의 목숨을 건져 준 할아버지, 곤을 냉대하는 것 같지만 그의 삶을 이끌어 준 강하, 그리고 곤에 의해 삶을 얻고, 곤이 자각하지 못했던 곤이라고 불리우는 자신의 기억의 소실점을 찾아주는 해류, 그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 입니다. 곤의 진짜 아가미들.

그녀의 문장은 물과 같아요. 끊임없는 흐름이랄까. 제법 긴 호흡을 필요로 하지만 잘 세공된 보석 같은 곤의 몸처럼 반짝반짝 빛납니다. 또렷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순간의 장면들이 거친 묵화처럼 그려집니다. 친절하지 않지만 "참혹하면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설!" 이라는 띠지의 문구처럼, 매혹적이네요. 그녀의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책 뒤에 붙은 해설은 나와 같은 이들에겐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고, 의욕을 저하시키는 쓰디쓴 촉매제일 뿐이예요. 그저 내 몫만큼 즐거이 읽어내면 되는건데, 어려움직하고 그럴싸한 말들을 열거한 해설은 나를 위축시키니까요. 다음부터는 과감히 덮어버려야겠어요. (놀부심보, 예요) 겨우 200페이지 남짓한 장편소설이라기엔 좀 얇은 듯한 이 책은, 결코 가볍지 않게 단단하게 여물어 있음에 이내호의 풍경이 그리고 오늘도 어딘가를 유영(游泳)하고 있을 곤이 아마도 제법 오랜동안 내 주변을 배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녀, 어른이되다.

copyright ⓒ 2011 by. Yuju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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