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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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읽어낼 줄 알았던 얆은 한권의 책은, 더디고 묵직한 시간을 요구했다. 또한 작품마다 실려진 '해설'은 내겐 또 다른 짐이 되어서 그저 온전히 나의 시선을 따라가며 나의 그릇만큼 읽어내던 소설에서 정답지가 뒤에 붙어 있는 문제집을 풀듯 답을 헤매이며 명치 끝 어딘가에 얹어진 우둔해진 책임감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함에 대한 부끄러움까지 보탰다.


김애란│물속 골리앗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라는 농밀한 문단으로 시작하는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은 작가노트에서 p.51 맞다. 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했듯이 긴 장마의 축축한 끈적임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끊임을 모르는 장마의 공포는 그득 채워진 빗물에 녹아 들지 못하고 그 알갱이 알갱이가 그저 섞여 부유(浮遊)하고 있다. 어떠한 틈새도 없는 끊임없는 절망과 p.46 주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놀랍게도 비가 거의 멎은 듯했다. 이러다 다시 내릴지, 완전히 개려는지 알 수 없었다. 라고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아득함 안에서도  p. 47 젖은 옷가지가 바람에 마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밖에 나오니 물속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추운 느낌이었다...."누군가 올 거야."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라고 중얼대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p.51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그녀가 발명해내는 희망은 버거운 장마 끝 곱게 피어오른 무지개 빛이 아니라 갓 수그러든 빗방울에 찌뿌드드한 먹구름 사이의 여린 한 줄기 빛과 닮았다. 


김유진│여름

김유진의 소설 <여름>은 p.93 사소하고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받는 감각들에 목적 없이 몰두하는 용기와 서로의 완벽한 다름을 강조함으로써 은연중에 그 다름 안에 같음이라는 균열이 발생하기를 꿈꾸는 과잉적 욕망의 표출만큼이나 에로틱한 것이 또 있을까. 라는 해설처럼 바람 한 점이 없는 뜨거운 여름날에 시계 바늘도 더위에 늘어진듯한 더디고 곰지락거리는 움직임. 소설 속 목소리를 따라 건물을 감싸안듯 가지를 드리운 늙은 체리 나무가 있는, 집안 구석 구석 먼지가 내려 앉은 - p.64 면을 가진 모든 것들 위에, 먼지는 있었다. 먼지는 살아 있는 듯 끊임없이 태어나고 이동했다. 번식했다. - 모습이 눈 앞에 살아 있다. 그런데 무어랄까. 아쉽다. 단편소설이라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책상을 만드는 B와 녹취된 내용을 글로 만드는 Y는 뜨거운 여름날에 녹아버린 살얼음 위의 걸음처럼 불안하다. 살아있음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던, 개수구의 벌레와 마주치며 Y의 위태로움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그저 쌓이는 먼지를 바라보고, 양말을 신고 잠자리에 들며, B와의 시간을 피해 일을 하며, 어두운 한 구석을 응시하는 것으로 두려움을 떨쳐 내던 Y는 p.85 Y는 힘껏 뛰어, 길게 늘어진 체리나무 가지를 꺾어 보였다. 로 삶에 의지를 보여 준다. 삶의 관객에서 배우로의 이동이랄까. 김유진의 소설 <여름>은 그렇게 못내 아쉽지만 그녀의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른함을 가장(假裝)한 느린 템포로 지리하거나 꿈뜨지 않게 제 몫을 잃지 않으며 글의 무게는 흔들림이 없다. 

 
이장욱│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소설은 허구이나 사실은 그대로가 삶이다. p.103~104 스틸녹스를 삼키고 잠을 청했지만 내내 얕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발이 닿는데도 숨을 쉬기 어려운 느낌이다. 깨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잠든 것 같기도 한, 그런 시간이 이어졌다. 어릴 적에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면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다. 몽환적인 노오란 불빛의 백열등 불빛이 구석구석을 밝히지 못하는 낡은 재래식 화장실이 무서워 엉거추춤한 자세로 제대로 볼일을 보지 못하고 급하게 뛰어 나오곤 했었는데(다행히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할아버지댁은 깔끔한 화장실을 갖춘 양옥집이 되었다), 순간도 견디지 못하는 그 작은 심장의 쿵쾅거림과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대상이 모호한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의 불안감. 이장욱의 소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그 불투명한 공기가 배경음악처럼 깔려있다. p.128 운하를 흐르는 강물은 평화롭고, 성당들은 오랜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온화하고 장엄한 아름다음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몸이 조금씩 서늘해지고 심장에서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히할 수는 없다. 이것은 감상적인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인, 그런 느낌이다.

 
이장욱의 작가 노트에서도 말했듯 p.131 나는 어두운 돌계단을 뚜벅뚜벅 걸어내려왔다. 밖은 여전히 흰 밤, 밤이며너 동시에 낮인, 어떤 기이한 경계이다. 끝나지 않는 백야의 날들에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던 걸까?


김사과│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는 무섭다. 이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가 뿜어내는 분노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p.143 난 나에 대해서 뼛속 깊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객관적인 전문가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난 내 의지로 뭘 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p.144 안다. 난 지나치게 얄팍하다. 셀로판지 같다. 그러한 당연한 분노는 - 원인은 '나'가 아니라 나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외부의 것이지만 - '나' 안에서 어그러진 채로 하지만 잘 참아져 왔다. p.144 난 A의 옷을 벗긴 다음에 왼쪽에서 다섯번째 몽둥이처럼 생긴 커다란 선인장을 뽑아서 때리는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게 다 A의 반짝거리는 금빛 매니큐어 때문이다...그 손톱들을 모두 뽑아버리고 싶다.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금방이라도 넘쳐 버릴 듯 위태로운 냄비의 끓는 물처럼, 혹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뜨거운 연기를 뿜어내는 휴화산처럼. 왜 '나'는 금빛손톱 따위에 그렇게 분노하는 것일까.

p. 151 화가 난다. 더이상 이 분노를 차곡차곡 몸속에 쌓아만 둘 수는 없다. 왜? 어떠함이 그를 참지 못하게 하였을까. 웅그리고 있던 분노를 건드린 것을 무엇이었을까? 여자를 통해 삶을 본 '나'는 p.150 삶이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자꾸만, 난 울고 싶다. 두께를 가지고 싶다. 무게를, 색깔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나는 보호되어왔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깊은 폭령성으로 드러난다. 

김사과는 작가 노트에서 p.182 그러니까 사실 다들 스타벅스에 정말 가고 싶은 건 아니고 스타벅스에 가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스타벅스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직은, 증명하기 위해서 가긴 가는데 역시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지는? 그런 식의 괴로움? 현대인의 삶의 고통? 그것에 대해 뭘 말하지? 라고 했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세대, 사실은 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하고 헤매이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무엇이 자신이 원하는 삶인지도 모르고 타인의 잣대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모든 것을 누리도록 이전 세대의 뼈를 깍는 희생 속에 모든 것을 누리게 된 허나 사실은 아무것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이제 움직여 보자고 스타벅스가 그 기준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것은 아니였을까.  

p.172
삶이란 견뎌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에 대해 매우 이상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삶을 즐긴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런 고통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단지 견딜 수 있을 뿐이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 살아남고 싶다. 누구보다도 끝까지.

 
김성중│허공의 아이들

소설을 읽는 동안 김이환의 <절망의 구>가 내내 걸음을 따라다녔다. 사람들을 삼키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절망의 구'의 존재 앞에 놓인 인간의 내면, 인간다움의 존엄성을 버리고 본능에 지배당하게 되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그 과정을 긴장감 있게 그려냈던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떠한 의미일까? p.205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른스러워졌다. 살아남으려면 빨리 철이 들어야 했다. 그 재앙의 한가운데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던 소년과 달거리를 거르지 않는 소녀에게 과연 어떠한 어른스러움이 필요한 것인가. 허공의 집에서 증발해버린 소녀와의 기억과 홀로 남은 소년은 도대체 어떤 삶을 더 기록해야하는 것인지 막막하다. 뼈가 자라는 소리는 어떠한 희망이란 말인가. 지워지지 않는 물음표를 잔뜩 그려 놓고 그렇게 그만이다.


김이환│너의 변신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을 읽는 동안 김이환의 <절망의 구>가 발목을 잡았더랬다. 그만큼 처음 만났던 그의 소설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었다. 그래서 가득한 관심과 기대로 시작한 <너의 변신>은 동성애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던 '너'가 결국은 '몸을 버리는' -p.263 완벽한 몸을 추구하던 네가 왜 몸을 버렸는지, 왜 나와 의사소통할 수도 없는 몸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 - 다소 극단적이지만 이 시대의 가치관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물질만능주의의 포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의 어그러짐은 누구의 잘못인가. p. 240 "우리나라 성형수술 시장이 얼마나 큰데. 압구정에 가봐. 두 건물 건너 하나가 성형외과야."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의 그릇됨인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다리를 늘려 '나'보다 키를 키운 것? 발육이 부진했던 팔? 탐미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완벽한 몸?그도 아니면 여성의 성기?하루종일 오르가슴만 추구하는 실체가 없는 존재?  

p. 240 "외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망과 인간다움의 윤리,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나는 손을 떼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정용준│떠떠떠, 떠

p.277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겠지. 상처를 주면 두 배로 증식하는 플라나리아처럼 점점 많아질 뿐이야. 나는 지쳤어. 더이상 그것들에게 붐벼 거품처럼 버글대며 희미해지고 싶지는 않아. 더 이상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자탈을 쓴 남자와 '갑자기' 잠드는 시간이 생각처럼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판다탈을 쓴 여자의 사랑이야기는 달콤한 로맨스를 흉내내는, 사실은 어떤 사랑의 말도 전할 수 없는 굳은 혀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웃고 있는 판다의 탈을 쓰고 '재롱을 떠는' 연기의 과정인듯 보여주어야 했던 쓰디 쓴 삶의 이야기다. 하지만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말로 전하는 '사랑해'는 그저 삶을 비극 가운데 떨어트려 놓지 않는다.

정용준은 작가노트에서 p.310 시간을 앞당겨 어떤 방법을 서둘러 배우지 않겠다. 좀더 느려지고 둔감하기를 원한다. 뭔가를 지연시키려고 몸부림치는 소년처럼 언제나 새파랗게 쓰도록 힘쓰고 애쓰겠다. 라고 말했다. 그 마음이 쿵, 하고 나에게 내려 앉는다.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성글은 리뷰를 적기까지 꼬박 2주가 넘는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고도 다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한 찜찜함이 퍽퍽하다.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누락된 듯, 대부분의 이야기는 씁쓸하고 암담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과연 소설의 역할은 무엇인가? "문학이 해야 할 일은 '치유'가 아닌 것 같아요. 따뜻함이나 위로를 바란다면 친구들을 만나고 맛있는 것을 사먹는게 훨씬 효율적이죠." 라는 글을 본 기억이 가물하다. 어떠한 확신의 과정을 거치고 이러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을까. 휘청거리는 크레인 위에서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누구가를 희망하면서, 삶을 짓누르던 체리나무의 가지를 꺽으며, 혹은 뼈가 자라는 소리에 우리는 아무런 치유를 얻지 못하는가.

작품마다 덧붙여진 그럴싸한 해설도, 사실은 7편의 작품도 정말 잘 쓰여진 이야기인지도 나는 구분하기 어렵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이 시대의 젊은 작가들도 쓰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들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소설은 '즐거움'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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