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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시다 - 100권기념 발간시집 세계사 시인선 100
최승호 지음 / 세계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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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현금이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떨리고
사막의 폭풍은 시작되었다. CNN은 바그다드 시내의 폭발음을
생방송으로 들려주고 있다. 우리는 전쟁도 프로야구처럼
생방송으로 즐기게 되었다. 다국적군의 사기는 높고
현금이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떨리고
수첩갈피에 적힌
BC카드의 비밀번호를 확인해본다. 끼리리릭,
끼리리리릭, 현금자동지급기의 검색은 계속되고
모래 밑으로 묻혀 가는 병사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가고
등허리로 땀이 흐른다. 눈앞이 캄캄하게 어두워오고
섬광처럼 지나가는 저 불빛들.
바그다드 상공에선 야간공습이 진행되고
현금이 빠지지 않는다. 비밀번호가 틀렸단 말일까,
거래은행이 온라인망을 닫아버린 것일까,
계기판의 디지털 숫자는
의혹의 눈빛을 풀지 않는다. 누가
이 도시의 온라인망을 쥐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그렇게 묻혀가고
은행잔고가 바닥이 나버린 것일까, 누가
나의 잔고를 빼내간 게 아닐까, 누가
온라인 회로의 끝없는 터널 뒤에서
저렇게 웃고 있는가. 현금자동지급기는
BC카드를 돌려주지 않는가. 자기테이프에 감긴
나의 生,
그들은
그렇게 죽어가고
모래무덤 속으로 영원히 갇혀가고
현금자동지급기는 끝끝내 나를 돌려주지 않는다.

-<현금자동지급기 앞에서의 불안>, 오정국





2
...현금이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떨리고

아까부터 담배를 피고 싶은데 주머니에 돈이 없다. 집에서 용돈을 보내주지 않아 통장은 비어있고, 이미 가까운 친구들과는 심각한 채무관계가 맺어진 지 오래이다. 길바닥에는 십 원 짜리 동전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 배고픔과 금단 증상으로 손가락이 떨려온다. 빈 주머니 속에서 푸석푸석한 서글픔이 만져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돈이 곧 생명이고 때로 죽음이다. 이제 우리는 칼이나 총이 아닌, 지갑 속에 들어있는 지폐들에서 죽음에의 강박을 느낀다. 그 종이는 아주 무거우며, 또 神적이다.
자본은 하나의 네모난 틀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가치들을 그 가공의 틀 속에 가둔 채 살아간다. 그 틀은 매우 견고하고, 불투명하다. 처음에 우리가 그 틀을 고안해냈을 때 우리는 그 틀이 그렇게 거대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틀은 성장을 거듭했고, 마침내 우리 "안"이 아닌, "밖"으로 나와 우리를 가두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요지경인 텔레비전은 그래서 이 무자비한 틀과 닮아있다.

인간의 날개와 눈물마저도
당신 가슴속에서만 재생산된다니
두려워요 이제 다시는
빼앗긴 꿈의 신화를 찾을 수 없나요
오 놀라운 전능의 네모난 신전
우린 모두 당신의 불쌍한 종이에요

-<텔레비전 광시곡>, 김형술


돈과 자본이라는 감옥에 우리는 투옥되어 있다. 인간적인 자유를 빼앗긴 채,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꿈꾼다. 하지만 천장은 낮고, 바닥은 차갑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자본이라는 수단을 쟁취하지 못했을 때, 그러니까 경제학적으로 죽었을 때, 우리는 사회학적으로도 죽는다.
자본이 삶과 죽음을 지배한다. 생과 사의 선택권은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적이지 않다. 숫자와 몇 가지 경제학 공식, 우리의 생은 그 차가운 기준들에 의해 분류된다.

사막의 폭풍은 시작되었다. CNN은 바그다드 시내의 폭발음을
생방송으로 들려주고 있다. 우리는 전쟁도 프로야구처럼
생방송으로 즐기게 되었다. 다국적군의 사기는 높고
현금이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떨리고



절망이 거기에서 온다. 우리는 현금 인출기 앞에서 명세서의 잔고 액수를 보며 절망한다. 그 숫자들이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들을 지배하고 있기에, 우리는 명세서를 받아들고 그것이 마치 신의 지령인 듯 긴장한다. 이 긴장은 우리 사회의 아주 거대한 부분이다. 자본은 우리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것에 더해, 이러한 식으로 우리 삶의 방법 역시 강제한다.
그 방법에 따르자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어서는 안된다. 동물적이어서도 안된다. 디오니소스는 잊고, 아폴론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기계를 닮아야 하며, 본능이나 감정 대신 이성을 극도로 발달시켜야 한다. 인간에게 내재한 본연의 코드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인간"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태초에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멸망의 그 날까지 인간일 수밖에 없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틀이다. 인간이 창조해 낸, 그 불합리한 틀이다.
그런데 이 틀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그 틀의 본질을 알 필요가 있다. 문제는 틀의 주인이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강박 역시 무엇엔가 귀속되어 있다.

...누가/이 도시의 온라인망을 쥐고 있는 것일까
...누가/나의 잔고를 빼내간 게 아닐까, 누가/온라인 회로의 끝없는 터널 뒤에서/저렇게 웃고 있는가.

모순적이게도, 다수의 우리들에게 비합리한 삶의 방법을 강제하는 틀의 주인 역시, 인간이다. 그 틀에 효과적으로 적응한, 소수의, "우리들"이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인 것이다.
연속된 실패는 체념은 부른다. 하지만 계속되는 시도는 실패를 언젠가는 극복한다. 체념은 그래서 아직 이르다. 김수영 시인이 이야기한 "풀"은 아직 죽지 않았다. 황지우 시인이 이야기한 "풀잎 뒷면의 은빛"도 아직 살아있다. "흑염소"는 여전히 자신을 속박하는 "줄을 더욱 세게 잡아당기고" 있다.

혁명은 꼭 완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역 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저탄더미
환승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검게 말한다
.......
함께 누운 원시림들 엄청난 지압 견디며
물먹은 목질 켜켜이 불꽃 채워 숨기며
그 때 이미 혁명은 시작된 것이었다...

-<저탄더미를 보며>,김윤배


시인의 말처럼 기다리는 일은 분명히 고되긴 하지만, 변화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틀 속의 우리들이 그 틀의 본질을 깨닫고, 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뭉치는 것은 언제나 힘이 된다. 힘이 처음부터 힘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작은 힘들이 모여야 큰 힘이 된다.

묶이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 되는가.
......
낟알이 털어지면서
빈 짚단 더미가 되어
삭풍받이로 쌓였다
......
꿈꾸는 낟알들을 위해서는
묶이는 것도 황홀한 기쁨이 된다.

-<볏단>, 이근호

[내 몸이 시다]는 89년부터 흘러온 우리 시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시집이다. 이 시들은 앞서 말한 "틀"에 대한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자세들을 표출하고 있다. 어떤 시도 틀을 떠날 수 없다. 시는 현실이며, 우리의 현실은 그 틀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의 진실은 현실의 그러한 양태들을 무엇보다도 극명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시는 틀의 본질을 본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시인의 생각들을 함축하여 제시한다. 독자는 그 시대의 시들 속에서 시대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것들이 계산되고 짜여지는 이 공장 같은 세계에서 시는 이 견고한 틀의 "틈"을 공략하는 하나의 무기다. 시는 우리가 있고 있는 인간적 가치들을 일깨운다. 우리는 잊고 있던 "잃은 것"들에 대한 기억을 시 속에서 찾아낸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디
안길 수 있을까
비는 어디 있고
나무는 또 어디 있을까
그들이 만드는 품은 또
어디 있을까

-<품>, 정현종

시는 꿈의 설계도다. 정현종 시인의 시 속에서 나는 이 무자비한 틀의 틈을 본다. 시인의 "품"은 분명히 그 자신의 시 속에도 있다. 그의 시를 보며 나는 깨닫고, 위안 받고, 행동한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시 역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명령들이다. 하지만 그 명령들은 강제적이지 않다. 우리는 시 속에서 서로의 현실을 인식하고 저마다의 방법론들을 펼쳐나간다. 시의 힘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그 설계들 속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변화에 대한 굳은 신념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는 내 꿈의 몸이며, 그래서 내 몸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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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민운동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박원순 지음 / 당대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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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이라크 전쟁 이야기.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결과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하긴, 시작하기 전부터 말이 많았던 전쟁이었다. 세계는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고, 각국은 팍스 로마나의 계보를 잇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노골적인” 등장에 이래야 할 지 저래야 할 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한창 속셈을 해보는 중이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뒷북치기에 나섰고, 영국은 이라크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전후복구사업의 알맹이들을 거의 전부 빼앗기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에 전쟁할 “터”를 내주려다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개전에 임박해 고개를 저었던 터키는 그 날로 집안 경제가 파탄 났고, 주제를 모르고 입바른 소리를 해대던 시리아도 칼끝이 턱 밑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는지 슬슬 꼬리를 내리는 모양새다. 악의 축 3인방 중에서 동북아시아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는 북한은 어떤가.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그간 고집해온 양자회담을 포기하고 다자회담도 괜찮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CNN과 폭스 뉴스가 전한 21세기 민주주의 십자군들의 용맹(勇猛)은 김정일의 안가(安家)에도 적잖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참여정부의 거두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회에 나가 파병안 결의를 호소했던 마당이다.
유럽과 미국의 갈등은 이제 공공연해졌다. 2차 대전 이후 (명맥상으로는) 유엔에 의해 유지되고 있던 세계 질서는 이제 미국, 혹은 미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주장에 의하면, 이제 이라크 주민들은 손도 안대고 민주주의라는 거룩한 기본권을 얻게 되었다. 확실히 후세인도, 그의 공화국 수비대도, 그의 악랄했던 독재의 역사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권 주민들이 미국이라는 국가와 화해할 날은 아무래도 수십 세기, 혹은 수백 세기 정도 뒤로 미루어둬야 할 듯하다.
전쟁의 끝에서, 비로소 어정쩡했던 1막이 끝났고 이제 “새롭고 강력한, 그러나 부적절한 정의, 미국”이라는 이름으로 좀 덜 어정쩡한 2막이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망연히 이 부조리극의 전개를 바라보고 있다. 과연 어떤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2
이제 시민운동 이야기다. 참여연대는 우리 군대의 이라크전쟁 파병이 결정되기 얼마 전, 국군장병들에게 참전 거부권 행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혹시 국회에서 파병이 결정되더라도,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해 결연히 거부권을 행사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조선일보의 한 칼럼은 이를 두고 시민단체들이 낙선운동 불법시비를 거치고도 아직까지 법을 우습게 안다고 질타했다. 군은 국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업으로 하는 단체이며, 따라서 이유야 어떻든 이들에게 명령에 대한 불복종을 사주하는 일은 범죄에 해당한다는 논조였다. 악법도 법이라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자체가 한 편의 희극이라면, “적법성”이라는 가치를 둘러싼 시민단체와 보수주의자들간의 이러한 해묵은 갈등 역시 어쩌면 한 편의 희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쟁점이 되는 것이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외형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전개와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논쟁이라는 점이 그렇다.
이러한 논쟁에서 우리는 가치우위에 대한 해답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불살생이냐 준법이냐, 충돌하는 두 가지 가치 중 어느 가치가 우위의 것이냐가 이 논쟁의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가치우위의 문제는 칼로 두부 자르듯 쉽게 결판이 나는 문제가 아니며, 핵심이 되는 기준이 평정되지 않는 한 논쟁은 공허한 일이 된다. 따라서 불살생과 정의의 지향에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법의 권능을 어그러뜨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조선일보도 옳고, 헌법의 권위와 기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명분 없는 살생은 마땅히 거부하는 것이 인간(혹은 “시민”)의 도리라고 주장하는 시민단체도 옳다. 결국 우리가 이 싸움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양진영 중 누가 옳은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이 논쟁을 통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언론과 시민단체가 이렇게 서로 왈가왈부하며 다투는 흥미진진한 풍경의 내막이다. 언론이건, 시민단체건, 양자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리판단 하에 정색을 하고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쳐두면 사실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서로의 이해에 대한 갈등이 그 내부에 숨어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3
사실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같은 영역 안에 있다. 활동하는 방식이라거나 지향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사회에서 그들이 가지는 역할은 비슷하다. 권력을 비판하고, 해결해야할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중지를 모으며, 잘못된 지점에 찾아가서 그 내부를 파헤치고, 해결점을 모색한다. 그들에게는 보장된 권력이 없으며, 따라서 활동의 동력은 강제성이 아니라 자발성이나 사명감에서 나온다. 결국 언론과 시민단체는 무대 위에서 같은 역할을 맡은 두 배우이고, 그 배역의 이름은 감시자, 혹은 고발자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공통의 목적에 좀 더 효율적으로 도달하기 위해서 그들은 공존하고 상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지형 위에서 그들은 상생한다기보다는 경쟁하고 있다. 문제는 그 경쟁이 생산적 경쟁이 아니라 소모적 경쟁이라는 것이다. 물론 비판자로서 그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데는 합리적인 토론과 대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시민단체와 언론들의 전쟁 아닌 전쟁에서 우리가 이러한 과정들을 찾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보수언론들은 시민단체의 도덕성에 대해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해왔지만 그러한 보도들이 충분한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다수의 기사들은 개개의 작은 사건들을 시민단체 전체의 문제로 확대해석하고 있으며, 때로는 일방적 매도, 악의적 흠집내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시민단체들의 언론에 대한 공격 역시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언론개혁을 지향점으로 삼은 많은 시민단체들이 있지만 최근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차베스 정권의 언론탄압을 지켜보면, 언론을 개혁한다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작업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언론 ‘개혁’과 언론 ‘탄압’ 사이에는 종잇장 하나 정도의 차이밖에 없으며, 그 지향과 방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언론개혁’은 쉽게 ‘탄압’으로 변질될(혹은 그렇게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개혁을 화두로 삼고있는 시민단체들의 고민은 그 활동에 얼마나 많은 양의 신중함을 담아내느냐에 있다. 그러나 최근 독립기념관에서의 조선일보 윤전기 철거 사건 등을 볼 때 그러한 활동에 우리 시민단체들이 어느 정도의 고민과 신중함을 투입했던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결국 문제는 서로 힘을 모아 같은 역할을 해주어야 할 두 집단이 상호간의 소모적인 갈등과 긴장에 힘을 소진함으로써 집단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데 있다. 권력의 중앙집중과 그 부패의 역사가 깊은 한국사회에서 언론과 시민단체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중요한 요인들이다. 핸들을 쥐고 있는 것이 중앙정부라면 운전자에게 끊임없이 교통정보를 제공하고, 졸거나 신호위반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언론과 시민단체가 해야할 일이다. 따라서 양자는 줄기차게 서로 협조하고 대화하며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또한 언론은 시민단체를 감시하고 시민단체는 언론을 감시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그 긴장과 견제의 힘이 상호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언론과 시민단체의 이상적인 관계설정은 ‘생산적 상호긴장’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앞서 필자는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소모적인 긴장관계를 논하면서,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며 양자는 화해하고 상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것이 다분히 낭만적인 생각이며, 한국사회라는 특이한 환경 속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밝히지 않았다.
헤비급 권투선수와 라이트급 권투선수가 시합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헤비급 선수가 날리는 잽 한 방은 라이트급 선수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의 스트레이트 펀치가 될 것이다. 강자와 약자는 절대로 서로 ‘싸우지’ 못한다. 강자와 약자가 싸우기 시작할 때 그것은 머지않아 강자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변할 것이며, 일방적이라면 이미 그것은 상호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잔인한 폭력일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언론은 헤비급 권투선수로 비유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언론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굳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거대언론들에게만 화살을 돌리려는 생각도 없다.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기득권의 자리에서 물러날 날이 있을 것이며, 지금 소외 받고 있는 여느 언론들도 언젠가는 권좌에 오를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지금’ 권력의 위치가 아니라, 그 권력의 집중과, 행사되고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 언론은 그 탄압의 역사가 깊은 만큼, 변절의 역사 또한 유서 깊다. 현재 유력한 언론사들의 대개는 지난 시절 독재정권과 결탁함으로써 이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생존’하기 위해 권력에 빌붙은 이러한 언론의 비극적 역사는 거꾸로 그들이 더 이상 ‘생존’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 언론의 존재이유가 정부, 시장이 아닌 ‘제 3섹터’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결국 정부 및 시장과 결탁하여 중립성과 객관성을 잃은 언론은 존재의 이유를 잃은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 경계의 애매함으로 인해 이러한 언론들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는 곧잘 벽에 부딪히곤 한다. 이미 고질화되고 시스템화된 중앙정부의 게으름과 부패를 개혁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거대공룡이 된 ‘언론’을 개혁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며, 라이트급 권투선수가 헤비급 선수를 이기기 위해서는 헤비급 선수의 연습량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를 라이트급 권투선수로 놓고 보면, 앞에서 논한 시민단체와 언론간의 갈등 역시 사실은 양자간의 ‘싸움’이 아니라 거대언론의 시민단체에 대한 ‘일방적 폭력’ 수준이라는 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보여준 여러 모습들과 놀랍게도 닮아있다.
사실 이라크의 테러위협과 대량살상무기 보유, 그리고 이라크 국민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후세인 독재정권의 횡포는 전쟁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석유개발에 관련한 이권)을 위해 전쟁이 꼭 필요했고 결국은 이라크가 보이고 있는 여러 악의적 면모들을 확대하면서 ‘예방적 공격’이라는 새로운 방어개념을 짜내는 추태를 보였다.
이것은 보수 언론사들이 최근 반미무드 조성과 노무현 참여정부의 출범을 거치는 가운데 세대간의 갈등과 진보세력의 권력화를 적극적으로 공론화 하면서, 스스로를 ‘기득권’이 아니라 핍박받는 소수로 자처하려 하는 것과 방법론적 측면에서 비슷하다. 그들에 의하면 월드컵 이후로 ‘합리적 진보’가 아닌 ‘감정적 진보’ 세력들이 한국 사회의 권력을 점유하게 되었으며 결국 ‘온건보수’들은 설자리를 잃고 약자의 자리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합리성과 도덕성이 의심되는 ‘감정적 진보’ 세력에 의해서 ‘기본’이 무너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더 많은 비판과 특단의 예방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라크 전쟁 파병과 관련된 참여연대의 참전 거부권 촉구 성명 발표와 이를 비판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도 이러한 틀로 설명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엄살떨기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라기보다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더욱 공고하게 하려는데 목적을 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5
오랜 기간 참여연대에서 사무처장으로 일했고 현재는 아름다운 재단의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는 지난 2002년 그간의 시민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시민운동-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책을 펴냈다. 시민운동가가 쓴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약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권력이 부패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할 언론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며,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할 시민들이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척박한 환경의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이 일구어낸 여러 성과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아마 저자의 절절한 호소를 들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시민운동이 우리의 공익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게 해야한다는데 쉽게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원순 변호사가 이 책 머리말에서 인용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시민운동도 비판받아야 하며 또한 견제되어야 한다. 시민운동가의 자질 역시 까다롭게 검증되어야 하며 시민운동단체의 각종 활동 또한 감시해야 할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힘들여 이루어놓은 성과들을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향유하면서 정작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어도 안되고 짧아도 안 된다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순수한 자발성으로 사회 개혁을 위해 뛰고 있는 그들에게 가혹한 일이 아닐까. 그들만큼 고민해 본 적이 없다면, 개혁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상처 입어 본 적이 없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들을 비판하는 데 좀 더 신중해야할 것이다. 또한 사실 시민운동 이외의 대안을 대해서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는 지금, 우리는 그들을 희망으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프로크루스테스는 부패한. 정치권력일수도, 자리보전에 총력을 기울이는 보수언론들일 수도 있지만, 바로 우리들일 수도 있다.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실현과 항구적인 평화, 자유와 평등, 공공선으로 향하는 대로 위를 이제 그들이 밤에도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는 부조리하다’라는 명제의 거대한 증명 같았던 이라크 전쟁 직후라서 인지, 행군을 멈추게 하기엔 가야할 길이 너무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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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11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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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신이야기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편이다. 공포영화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공포영화가 현실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좋아한다. 귀신은 (당연) 무서워하지만 귀신을 상상하는 일은 자주 해보곤 한다. 고백하자면 이 나이에도 가끔은 혼자 귀신을 상상하고는 괜히 오줌을 참곤 한다; 담력은 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때의 나는 "혼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며, 혼자 있을 때 자신 내부의 불안과 싸워야 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귀신은 그런 불안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귀신은 그런 것이다. 죽음 너머에 있는 것. 현실이 아닌 것.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고 믿어지지만 실체에 접근하기는 두려운 것. 귀신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 귀신들의 세계는 우리의 현실세계와 길항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그 현실 속에 들어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나라마다 대표귀신들의 모습이 다르듯이, 당연, 나라마다 이 기묘한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도 다르다.

일본이란 나라는 샤머니즘의 나라, 즉 귀신의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는 모든 게 다 귀신이다. 키우는 개도 귀신이고, 쓰던 장롱도 귀신이고, 하여간 무언가 의미있고 오래된 것들은 다 귀신이 된다. 일본인들은 늘 귀신과 함께 산다.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은 특이한 만화다. 공포영화에는 공포영화로서의 cliche가 있고 공포만화에도 공포만화로서의 cliche가 있다. (다른 단어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귀야행은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있다. 이 만화는 귀신세계와 중첩되어 있는 현실을 그린다. 그러나 그 귀신들은 전혀 무섭지 않다. 사실 귀신들은 과거의 우리다. 귀신들의 세계는 과거를 재현(과거의 '한'의 재현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하고 귀신들 역시 과거를 재현한다. 그리하여 백귀야행의 귀신들은 현대문명 속의 인간을 부정한다. 이 부정은 부정이되 체념에 가까운 부정이다. 이 귀신들은 그들에게는 소중했으나 이미 잊혀지고 만 오래된 가치들, 상실한 덕목들을 인간세계에서 다시 찾으려 한다. 귀신이기에 그들은 맹목적이다. 때로는 죄없는 사람들을 여럿 죽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목적은 살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고대와 근대, 현대가 계승된 '선'의 구조가 아닌, 단절된 '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점을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귀신들의 요구는 불가해한 것이고, 귀신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죽어나가지만 나는 귀신들을 욕할 수 없다. 귀신의 맹목은 순수한 것이며, 이 경우 정당하기조차 하다.

주인공의 이름이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나의 장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핸디캡이다; 이 만화는 (아마) 대여점에도 꽤 많이 비치되어 있을 것이므로, 시험기간이라 당장 보라는 말은 못 하겠지만 빠른 시일내에 보라고는 말하겠다.(이게 무슨 말이냐;) 그림도 편하고(펜선이 마음에 든다. 묘하게 귀신스럽다) 감초같은 캐릭터들(주로 새들: 작가는 최근에 문조를 키우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새 만화를 출간했다)도 많다.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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