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귀야행 11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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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신이야기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편이다. 공포영화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공포영화가 현실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좋아한다. 귀신은 (당연) 무서워하지만 귀신을 상상하는 일은 자주 해보곤 한다. 고백하자면 이 나이에도 가끔은 혼자 귀신을 상상하고는 괜히 오줌을 참곤 한다; 담력은 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때의 나는 "혼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며, 혼자 있을 때 자신 내부의 불안과 싸워야 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귀신은 그런 불안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귀신은 그런 것이다. 죽음 너머에 있는 것. 현실이 아닌 것.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고 믿어지지만 실체에 접근하기는 두려운 것. 귀신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 귀신들의 세계는 우리의 현실세계와 길항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그 현실 속에 들어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나라마다 대표귀신들의 모습이 다르듯이, 당연, 나라마다 이 기묘한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도 다르다.

일본이란 나라는 샤머니즘의 나라, 즉 귀신의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는 모든 게 다 귀신이다. 키우는 개도 귀신이고, 쓰던 장롱도 귀신이고, 하여간 무언가 의미있고 오래된 것들은 다 귀신이 된다. 일본인들은 늘 귀신과 함께 산다.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은 특이한 만화다. 공포영화에는 공포영화로서의 cliche가 있고 공포만화에도 공포만화로서의 cliche가 있다. (다른 단어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귀야행은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있다. 이 만화는 귀신세계와 중첩되어 있는 현실을 그린다. 그러나 그 귀신들은 전혀 무섭지 않다. 사실 귀신들은 과거의 우리다. 귀신들의 세계는 과거를 재현(과거의 '한'의 재현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하고 귀신들 역시 과거를 재현한다. 그리하여 백귀야행의 귀신들은 현대문명 속의 인간을 부정한다. 이 부정은 부정이되 체념에 가까운 부정이다. 이 귀신들은 그들에게는 소중했으나 이미 잊혀지고 만 오래된 가치들, 상실한 덕목들을 인간세계에서 다시 찾으려 한다. 귀신이기에 그들은 맹목적이다. 때로는 죄없는 사람들을 여럿 죽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목적은 살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고대와 근대, 현대가 계승된 '선'의 구조가 아닌, 단절된 '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점을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귀신들의 요구는 불가해한 것이고, 귀신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죽어나가지만 나는 귀신들을 욕할 수 없다. 귀신의 맹목은 순수한 것이며, 이 경우 정당하기조차 하다.

주인공의 이름이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나의 장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핸디캡이다; 이 만화는 (아마) 대여점에도 꽤 많이 비치되어 있을 것이므로, 시험기간이라 당장 보라는 말은 못 하겠지만 빠른 시일내에 보라고는 말하겠다.(이게 무슨 말이냐;) 그림도 편하고(펜선이 마음에 든다. 묘하게 귀신스럽다) 감초같은 캐릭터들(주로 새들: 작가는 최근에 문조를 키우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새 만화를 출간했다)도 많다.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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