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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도시 백서 - Snow White City
이신조 지음 / 열림원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대로다. '만토'는 가상의 도시다. 그것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도시이다. 강물이 흐르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네 어쩌구가 아니라 저기 물이 흐르게 할테니 가서 사시오 어쩌구다. 만토의 시민들은 모집되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 안에 갇힌다. 그리고 살아간다. 살아가다가 묻는다.
이 도시는 가상의 도시야, 가짜 도시란 이야기지. 그럼 나는? 이 가짜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물론 나도 가짜다. '가상도시백서'의 인물들에게 정체성이란 그저 몇 줄의 컴퓨터 데이터, 혹은 몇 장의 서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늘 두 가지 일을 한다. 가짜 일(표면적인 직업)과 진짜 일(모종의 국가계획을 위해 비밀리에 주어진 임무). 사람들은 가짜 일을 하는 서로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늘 의심한다. 정말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시민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결합은 요원하다. '진실'은 통제소인 시청에만 있는데, 이 시청의 명칭이 '거울탑'이다. 거울은 비추되 속을 보여주지 않고, 받은 것을 돌려주되 자기 것을 내주지는 않는다. 진실은 거울 속에 갖혀있다. 아무도 서로가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 사실 나도 내가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싶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기계화된 사회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박동하는 심장을 가졌고, 그 심장의 피는 늘 뜨겁고 붉다.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고싶다. 외부에 대한 체념은 사실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아무도 정말 체념하지는 않고, 내가 누구이며 내 욕망이 누구의 것인지, 또 이 욕망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끝없이 궁금해한다. 그래서 담배갑속에 비밀 쪽지를 넣고 음지에서 불법적인 일을 의뢰한다. 아닌 줄 알면서 기대하고 거짓인 줄 알면서 믿는다.
'스노우 화이트'라는 술집에 모인 여섯 사람들도 그렇다. 사실 가상도시 '만토'의 시민들은 이미 한번 죽은 사람들이다. 제각기 목적이 있어서 이 도시의 시민이 되기를 자원했지만, 가상도시의 시민이 되고나서 그들은 그들 역시 '가상'시민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그 중의 몇몇은 여기에 끌려 이 도시에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쨋든 그들은 뽑혔고, 만토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폐쇄와 가식의 도시인 만토의 시민이다.
술집 '스노우 화이트'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여자가 여섯 사람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여자는 거울탑에 살고있고, 사실 이 여자 자체가 거울이다. 그 여자가 정말 무얼 하는지, 정말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여섯 사람은 그 여자에 비친 자기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되쏘인 자신의 이미지를 보면서 묻는다. 저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는 여기 나는 누구인가.
물론 대답은 없다. 거울은 대답하지 않는다. 여섯 사람은 독백처럼 자신의 생활을 진술한다. 하지만 진술할 뿐이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누군가는 파멸의 길에 접어들기도 하지만 변하지는 않는다. 여섯 사람들 중 아무도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못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는 생은 변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울이 변한다. 그 여자, 거울탑에 살고 있는 그 여자가 변한다. 사랑해서는 안되는 거울탑 위층의 남자를 사랑해버린 그 여자가 변한다. 그 여자는 그 사랑 때문에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진실을 궁금하게 했고 그 어두컴컴한 허위와 은닉의 내부에 불을 밝혔다. 안타깝게도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만토에서 추방된다. 이 여자가 여섯 사람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균열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여자 스스로가 이미 균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만토의 균열이었고 결국 만토시민들의 균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추방된다. 발목이 잘려 불구가 된 채로.
1세계, 2세계, 3세계라는 식의 세계구분과, 북한과 남한을 연상케하는 제국/공화국의 구분, 그리고 통일국가로서의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연합국의 존재와 그 상징도시로서의 가상도시 '만토'의 설정은 이 소설을 현실과 굉장히 닮은, 그러나 현실에서 약간 엇나간 공간에 던져놓는다. 그 공간은 현실도 아니고 상상도 아닌,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모호한 공간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카프카와 헉슬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고, 때로는 폴 오스터를 생각케 한다.
가상도시 만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실세계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은 한 가지다. '가상'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가상도시 만토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다르지만 충분히 닮았다. 여섯 사람 각각의 이야기는 사실 현대인 내부의, 외부에 대한 여섯 가지 투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