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 가다
양혜원 지음 / 비아토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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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원 씨의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

 

지인이 양혜원이라는 분이 기독교와 페미니즘에 관해 글을 쓰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서 이분의 책을 보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근본/복음주의자의 별거 없는 이야기 같다는 감상(기존 보수 기독교 담론의 반복)이다. 우선 나는 종교학과 여성학에 대해 잘 모르고, 그저 개인적인 감상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글은 한 감상이면서 의문이다.

 

먼저 양혜원 씨는 본인은 종교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학자임을 강조해서 말하면서,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결국 길이 다르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같아질 수 없음을 학문적으로 검증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게 에세이 몇 편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주제인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니 그걸 믿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냥 에세이라 양혜원 씨가 힘주어 말하는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다르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학자적으로 논증한 글을 보기 위해 논문을 검색해봤다.

 

아마도 일본에서 학술 활동을 하시는 분이셔서 내 검색이 한계가 있으나, 양 씨의 박사 논문 주제는 “Lived Gender in the Confucian Culture of Korea: Lives of Park Wansuh (1931-2011) and Gong Jiyoung (1963)”, 2017이다. 논문 자체에 접근을 못해서 내용을 볼 수 없지만, 박완서와 공지영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 같은데, 이게 도통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기원을 다룰만한 주제는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학술논문 한 편을 둘러봤는데, 거기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비판과 기고하는 글처럼 이슬람, 유교 페미니즘 등을 언급하면서 사례로 박완서와 공지영을 들고 있었다. 나는 박완서와 공지영이 한국 개신교, 페미니즘이라는 어떤 모집단을 대표할만한 사람인지 의문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에세이고 양 씨가 주장하는 내용에 관해서 설득 당할 만한 논증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고, 거기에 부족함을 느껴서 읽어본 학술논문도 내가 과문한 탓에 그런지 그렇게 설득력을 느끼지 못했다. 양 씨가 사용한다는 자기서사방법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방법론은 어떤 사례기술적 목적을 위해 쓰일 방법론이지, 그게 그렇게 일반화될 수 있는 방법론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박완서와 공지영의 사례연구를 제외한 직접적인 경험 연구를 해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고 논증하는 글은 내가 찾아본 자료에서는 없었고, 어떤 학자들을 인용할 뿐이었다. 그렇다. 첫째, 나는 양혜원 씨의 논증이 설득력 있는지 모르겠다.

 

둘째는 첫째와 이어지는데, 과연 양혜원 씨가 한국교회 연구를 했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분은 페미니스트는 기독교와 페미니즘이 다른데도 융합하려고 한다라는 식의 주장을 많이 하는데 과연 한국의 사례가 그럴까? 한국의 개신교 & 페미니즘에 속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기독교의 근본 서사를 여성학으로 대체합시다!’라고 주장하냐는 것이다. 나는 지방에 살아서 모르겠지만 그런 운동이 한국 개신교에 유의미하게 포착되느냐, 그래서 기독교의 근본 서사가 해체될 지경이냐 묻고 싶은 것이다. 저런 구호가 나올 교회는 굉장히 극소수의 특별한 교회 몇몇이지, 한국 개신교라는 모집단을 대표할 사례는 아닐 거다.

 

내가 아는 바로, 교회에서 페미니즘을 얘기하면 한다는 이야기가 성폭력 없앱시다”, “전근대적인 성차별적 성경 구절 다시 해석합시다이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양혜원의 문제 규정이 경험적으로 의미 있는지 궁금하다. “예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구호를 가지고, 아무도 예수가 근대적 의미의 페미니스트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런 구호는 기존 기독교에 평등사상을 고취하자는 구호이다.

 

끝으로 궁금한 건 이 책이 굳이 종교학과 페미니즘을 전공한 학자라는 권위를 내세우고, “학문적 검증 운운하며 쓸만한 글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양혜원은 내 종교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내 종교의 기반을 허물 생각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를 위하는 척하면서 두 전통을 혼합하려는 노력은 결국 기독교가 아닌 페미니즘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등 이런 얘기를 서슴지 않고 하는데 이런 건 신앙 수기, 선언문, 대자보에 가까운 글이지, 종교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학자가 기독교와 페미니즘이 길이 다른 것을 주장하는 글은 아닌 것 같다.

 

양혜원 씨의 주장은 학위라는 권위를 덧붙여 포장했을 뿐이지, 기존의 근본/복음주의에서 몇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게 느껴진다. “CCM에 뉴에이지 쓰면 다른 세계관인 기독교는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다.” 그런 선언에서 주제만 바뀔 뿐이다. 그리고 글 속에서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즘은 근대적 토대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하는데 내가 보기에 양 씨의 주장은 중세적 토대주의, 근본주의적 토대주의 같다.

 

물론 유의미한 얘기들도 있었고, 신선한 부분도 있었지만, 총체적으로 논증은 부수적이고 호교론적 구호가 난무하는 이 글이 이게 굳이 학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쓸 글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게 일기인지 뭔지 모르겠는 것이 제일 큰일 같다. 예를 들면 양혜원 씨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 복음주의 운동이 여성 인권 증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이게 굉장히 수도권, 대졸 이상들에게 집중된 이야기인 건 아시는지 모르겠다. 또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적 변화가 있었는지도 서술하지 못한다.

 

헨리 나우웬, 유진 피터슨 같은 작가들을 통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근거가 없다. ‘나우웬의 글은 여성적이다라고 규정하는데 무엇이 남/여성적인 것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나우웬, 피터슨이 수입되고 읽힌 전후로 한국 복음주의 내부에 어떤 경험적인 변화가 있었는지 하나도 근거를 대지 못한다. 그냥 내가 그랬던 것 같으니까 그런 거다.

 

무조건 자기 서사 뿐, 자신의 경험뿐이다.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에서도 그랬다. 본인이 힘들 때 위로가 된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종교였다고 그러면서 종교가 더 좋다 하는 그런 수준이다. 이분은 내 경험상 종교가 아니라 페미니즘이 내 구원이었다는 분들께는 뭐라고 할까? 아마 둘은 길이 다르니 교회 다니지 말라고 할 거다.

 

예전에도 이야기했듯, “내 경험으로도 그렇지만 교회는 기본적으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식이다. 저런 진술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아 그렇군요;;”밖에는 딱히 대답이 생각이 안 난다. 한국 복음주의가 여성인권에 기여한 적이 없다고 언급하면서 비판하는 김나미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도 내 생각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었어. 잘못된 것 같은데?’정도로 시비를 걸 뿐이지 한국 복음주의가 경험적으로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실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경험을 들어 뇌까리는 정도다. 개인주의적 오류(individualistic fallacy)로 보인다. 돈도, 시간도, 잉크도, 종이도, 노력도 다 아까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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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 2020-07-22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짝 고민했습니다. 살까말까...ㅋ 전작에 비해 더 나은 생각이 나왔을까...하고요. 평가가 매우 매섭습니다^^

두크나이트 2020-08-04 01:04   좋아요 3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양혜원 씨는 ‘학적인‘ 글을 쓰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긴박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게 단점 같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와 페미니즘에 기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양혜원 씨의 글은 그런 교착상태에서 하나의 갱신도 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천견입니다만, 그렇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 성경 주해와 해석 : 동성 성행위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느헤미야 렉처 시리즈 2
김근주 지음 / NICS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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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고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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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호 세대 인문 잡지 한편 1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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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적으로 또 연구주제, 방법론적으로 다양한 필진 구성을 하려고 애쓴 게 보이네요. 좋은 구성이고, 그래서 다양하면서도 수준있는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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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청을 설립하라 -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
박상익 지음 / 유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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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번역이 필요한 이유 <번역청을 설립하라>

1. 핵심: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번역은 반역인가>를 집필한 역사학자 박상익 교수님의 한국에서의 번역에 관한 문제의식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요는 한국의 번역문화에 큰 문제가 있으며 이를 위해선 시장이 아닌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한다는 겁니다.

2. 저자: 박상익 교수님은 서양사학자로 이미 20여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시고 또 굵직굵직한 고전 번역을 해오신 연구/번역자이십니다.

3. 내용: 이 책은 “고전을 영어로 읽으면 되지 굳이 번역해야 되냐”는 식으로 고전번역 예산을 삭감해버린 기재부 관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정말 미천하고 비루한 인식이죠.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책은 번역의 중요성, 한국 번역의 현실, 그리고 구체적인 대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됩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왔던 문명연구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을 한껏 칭송했습니다. 언제나 있는 한글 찬양의 이면에는 컨텐츠 빈곤이라는 한계가 숨어있죠. 마음먹고 고전이란 걸 읽는다거나 어떤 자료가 필요할 때,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자 박상익 선생님은 그 지점을 지적하십니다. 한국의 열악한 번역현실과 그를 가로막는 관료들과 학계까지 지적하며 번역의 현실을 다루시고 번역은 지식의 문제인 동시에 국가 경쟁력이며, 이를 위해서 더는 이 문제를 방치하면 안 되고 번역청, 그러니까 국가가 나서서 번역문제를 위해 힘써야 된다고 촉구하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4. 느낀점: 박상익 선생님은 <번역청을 설립하라 -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 출간과 번역청 설립 국민청원을 통해 여러 운동도 하셨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번역사업의 진전은 미미했습니다. 물론 박상익 교수님과 여러 번역증진 운동 덕에 번역사업 예산이 2배 가량 증액되며 노무현 정권 때 수준으로 복구되었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되려 퇴보한 거죠.

일례로 번역 문제는 지식의 민주주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지식에 도달하고 이걸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 겁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공화국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국의 개인들이 민주주의의 기원이 됐던 사상들과, 현대 민주주의 담론에 대해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죠.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는 고전들은 번역되지 않았고, 현대 담론들 역시 그렇습니다. 개인 스스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는 요원한 구조인 것입니다.

굵직한 고전번역을 해오신 박상익, 김덕영 선생님께서는 거의 비슷한 말을 하시곤 했습니다. 외국어를 한 30년 정도 공부하면 이게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라는 얘기었습니다. 심지어 김덕영 선생님은 독일에서 독일어로 강의까지 하시는데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로 읽고 사유할 때 가장 쉽고 독창적이죠. 한국어로 번역된 고전의 기반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르디외도 학자 초기에 자신이 직접 후설과 베버를 번역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프랑스의 학계가 후진적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직접 출판사를 통해 번역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죠. 그 프랑스도 후진적이라고 생각하며 번역에 힘썼는데 한국은 할많하않입니다.

이 책은 한국사회의 번역에 관해 문제제기한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입니다. 책이 얇고 쉬운 편이니 두루 읽히며 번역에 관한 문제의식과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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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물론 연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 현실문화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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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는 세계적인 마르크주의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르크스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의 정수에 도달하여 사유하면서도, ‘마르크스를 위하여‘ 어떻게 오늘 날 이 사상을 재전유할 수 있는지 천착한다. 이 책은 20세기 지성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마르크스주의 계보의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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