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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210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추인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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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18세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진리에 대한 열정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키케로의 사상이 그의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니교에 심취했다. 마니교는 여러 종교가 섞인 복합적 종교 성격을 지닌 종교였다. 이런 성격에 따라 당연히 그 당시에는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마니교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 이후에는 철저한 배척의 대상이 된다. 또한 당시 로마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젖은 회의주의가 대세로 자리매김 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지적 상황속에서 플라톤주의로 상황을 타파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저서 신국론에는 곳곳에 플라톤 철학이 모든 철학자들의 관점보다 우위에 있음을 피력한다.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 철학에 대한 애정은 철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윤리학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철학을 지적도구로 삼아 자신의 신학을 전개시켜 나간다. 회의주의자들 틈바구니에서 절대적인 진리인 신을 설파해야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차용하여 설명한다. 이데아는 절대 불변한 고정적 가치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에 효과적인 틀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인식론을 전파했다. 당시 외부의 경험세계에서 인식을 시작하던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내면의 영혼에서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이성을 통해 확증했다. 또한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육체와 영혼의 이원적 관계에서 인간의 존재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플라톤을 지적도구로 삼은 그였지만 그래도 신학자이기 때문에 플라톤주의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플라톤은 왜 절대적인 신을 인식했음에도 그를 경배하지 않았는가?’, ‘플라톤은 신과의 매개로 정령을 채택하고 정령제사를 주장했지만,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고 말하며 플라톤과의 차별성을 언급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과 사람의 왕국을 제시하며 이원적인 분석틀로 정치철학을 전개해나간다. 그에게 있어 신의 나라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따라는 나라이다. 이에 반해 지상의 사람의 왕국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 얼룩져 있는 나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적 권위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악한본성을 지녔고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서술한다. 신을 믿는 선한 사람에게도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의외로 현실주의적 정치의 시각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 그리스도교의 가치에서 사랑은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그가 말하는 신의 도성에 속한 사람들은 인간의 도성의 사람들도 돌볼 의무가 있으며 사랑의 의무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회·윤리적 측면에서 국가 구성원의 기본소양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답게 그는 역사는 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게 역사는 신의 구속사(救贖史)이다. 또한 역사는 신의 주권이 미친 신의 가공물이라고 표현한다. 신은 역사를 통해 신의 나라의 도래를 경고하고, 그 영광과 권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의 최후목표가 신의 나라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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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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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의 정치철학 플라톤의 정치사상과 많은 차이가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철학적 지혜’와 다른 실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하며 자신의 생각을 전개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 측면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플라톤의 주지주의적 철학에 주의주의(voluntarism)적 철학을 덧붙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과 함께 이상을 실현할 실천적 요소를 함께 고려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의 ‘국가’와는 다르게 이론만으로 책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체제에의 여러 종류와 그 변형과 발생 과정과 전개 붕괴와 원인이나 보존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에 대한 이해를 주목했다. 기존의 플라톤 철학이 이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에서 설득의 3가지 요소를 에토스, 로고스, 파토스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이성만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감정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핵심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는 감정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서 사회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에서 구성되는 감정에 초점을 두었다. 이렇게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에 대해 설명하며 정치학의 개연성에 대해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적인 진리에 집착하지 않거나 전문성성이 없어도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조건들로 인해 정치학을 필연적인 법칙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우연의 학문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극단적 통일성에 대해 비판한다. 이런 관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시대에 앞선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으로의 개인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좋은 개인이 곧 좋은 시민, 좋은 통치자라고 여겼다. 좋은 사람이란 실천적 지혜인 ‘중용의 덕’을 지닌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도덕적 성품이 좋은 지도자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통치자의 탁월함도, 개인의 탁월함도 모두 중용이라는 도덕적 성품에서 나오고 통치자는 과부족의 양극단을 경계하고 중용으로서 올바른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켰던 근대 이후의 정치사상가들의 생각들과는 상이한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체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해왔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올바른 3가지의 정체인 왕정, 귀족정체, ‘혼합정체’(politeia)에 대해 언급하고 이것들이 왜곡된 왕정의 왜곡된 참주정, 귀족정이 왜곡된 과두정, 혼합정체가 왜곡된 민주정체를 구분했다. 이것은 최선의 정체를 찾기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세 가지 올바른 정체 가운데 신적 권위를 가진 정체가 왜곡된 것이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왕정이 왕의 탁월함에 근거하여 통치되지 않는다면 참주제가 최악이고 올바른 정체에서 가장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정체가 좋은 정체일 때 최악인 것은 민주정체이고 모든 정체가 나쁜 정체일 때 최선인 것은 민주정체라는 플라톤의 주장을 계승한 것이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의 전제를 중용이라고 보았다. 가능한 최선의 정체는 중산계급(middleclass)에 결정권이 있는 정체라고 보았다. 따라서 중간계급을 양성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중산계층이 강하면 극단적 민주정체나 극단적 과두정체가 참주정제로 발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에 관한 언급도 빠뜨리지 않는다. 특히 생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에 고리대금업을 강도 높게 비판한 서술이 있다. 고리대금업은 노동이나 생산이 아닌 불로소득에 해당한다고 파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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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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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gnez-Vous! Resistance! Engagement! 앵디녜부! 레지스탕스! 앙가주망! 이들는 불어인데, 풀이하자면 "분노하라! 저항하라! 참여하라!" 정도가 될 것이다. 번역 상으로 레지스탕스와 앙가주망은 명사형이지만 맥락상 저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최근 나는 레지스탕스 출신의, 현재는 93세인 프랑스의 노투사(老鬪士)인 스테판 에셀이라는 사람이 쓴 '분노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레지스탕스란 독일이 프랑스를 강점(强占)하던 시기에 독일과 비시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프랑스의 독립운동가인 것이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는 넓은 의미로 파시즘, 나치즘 등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글쓴이는 항상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편에 서서 분노하고 그를 통해 저항하고 참여하는 삶을 살아왔고, 현재의 젊은이들에게도 이를 촉구하고 있다. 특히 그는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선포된 세계인권선언문을 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이 선언문의 의의는 인간의 인권을 세계인의 보편적인 인권으로 진일보 시킨 데에 있다. 그는 책에서 직접 자신의 노고나 고통을 피력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분노하는 삶' 그 삶 자체가 평탄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봤다. '스펙' 쌓기에만 연연하고, 쉽게 소비하며, 약자의 고통을 단순히 그들의 잘못으로만 생각하고, 경쟁으로만 삶을 채워 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청년들에게 스테판 에셀은 주위를 둘러보고 부조리한 현실이 있다면 분노하고 저항하고 참여하라고 한다. 침묵은 가장 큰 죄악이며 무관심은 최악을 태도라고 우리를 꼬집는다. 93세의 노인이, 인생의 황혼기이며, 외교관 출신으로 경제적인 삶도 궁핍하지 않은, 그냥 편하게 삶을 영위하다가 삶을 마무리하면 녹록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나도 지금을 살고 있는 청년으로서, 더욱 부단히 사회의 부조리들을 개선하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토마스 제퍼슨의 격언처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기본권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닌 누군가의 처절한 투쟁의 결과이다. 또한 책에서 스테판 에셀은 저항의 방법론으로 평화적 봉기를 주장한다. 그는 학교 선배였던 사르트르의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수긍한다."라고 했던 말을 인용해가며, 비폭력적 방법을 주장한다. 넬슨 만델라나, 마틴 루터킹을 예로 든다. 어떤 형태로든 폭력은 잘못된 형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목적이 훌륭하다면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정의를 위한 폭력은 형용모순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또한 글쓴이는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인의 인권을 옹호한다. 에셀은 자신이 가진 어떤 스탠스가 아닌 원리와 원칙으로 신념을 세워나갔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면서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들을 해내는 것이 삶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항상 불의에 저항하고 행동하고 분노했던 프랑스의 노투사 스테판 에셀은 90이 넘은 나이에도 정의를 위해 싸우며 행복하다. 그것은 그가 사랑하는 신념과 행동의 조화에서 나오는 행복일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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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 한 오라기의 혁명 - 자연농법 철학
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최성현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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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노부는 책 처음에 짚 한 오라기로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그것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와 인위를 모두 거부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도교, 불교, 그리고 유교 등 동양사상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고 자라게 된 영향 때문인지 이런 마사노부의 접근법은 낯설지 않았을 뿐더러 반가웠다. 글에서 읽은 마사노부의 이력을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을 피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사노부도 어느 정도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인식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사상적 흐름을 보면 양차 세계대전 이후 보통 사람들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된다. 중세의 신성에 반한 하나의 이성적 조류와 함께 발생했던 ‘근대’라는 이름은 인류사 최악의 결과를 맞이함으로써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반이성적 사상의 조류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 서구중심적인 내용이고 이것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는 이런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전후인식은 마사노부의 인식과 유불선(儒佛仙)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과 일정부분 함께 공유하는 상(像)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가치는 문제의 근본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사노부는 무위(無爲)의 자연(自然)농법을 주장한다. 인위도 없고 또한 자연이란 낱말의 의미 그대로인 스스로 그러한 농법을 주장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이것이 나에게는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현대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정말 ‘혁명’에 가까운 인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마사노부는 무위와 방임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충격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마사노부의 주장을 잃으면서 한 가지 생각난 것은 나도 이미 현대에 젖어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대중사회 속 소비주의 세대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났고, 서구화 된 삶을 살며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냥 몇 가지 ‘-주의’들을 적었지만 이것들이 내 삶에 꽤나 구속력 있게 작용할 것 같다. 나는 이런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또한 나의 삶이, 사회가 많은 부분 앞에 나열한 인식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현대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정말 ‘혁명’에 가까운 인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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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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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멸감(侮蔑感)이란 무엇일까? 모멸이란 단어는 낯설지 않지만 딱히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기도 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모멸에 대해 막연한 느낌은 받지만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이름의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사회학자 김찬호는 모멸감이란 감정의 사회성과 파괴적 속성에 대해 논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책을 내놓는다. 모멸감이란 모멸스러운 느낌을 뜻하고 모멸이란 업신여기고 얕잡아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일종의 무시·굴욕·모욕을 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책에서 저자는 사회학자답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개인의 심리상태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감정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소통되는지 그 감정이 생성된 사회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노력한다. 특히 한국은 정동적(情動的) 요소가 많은 나라로서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한다. 책에서는 모멸감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밝힌다. 책에서의 내용으로는 모멸감은 한국사회에서 꽤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이지만 연구가 전무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 책은 우선 감정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도미니크 오미시의 감정의 지정학을 예로 들며 이슬람권의 굴욕감이라는 코드는 세계적인 공격성의 발로가 되었다는 내용을 전달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역사에서 오랜 시간동안 유럽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이슬람 국가들은 근대 이후 앞서가는 유럽에 굴복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것이 폭력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슬람권의 굴욕감에 대한 논거는 흥미로웠다. 다음 장에서는 한국사회의 정서적 지형을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한국사회에서의 감정의 특수성과 문화로 모멸을 풀어나가고 요점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위신을 확인하려는 문화관성은 있는데 오히려 공동체는 붕괴되며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 한국인의 정서지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는 인간세계의 7가지 방식의 모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로 한국사회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밀접한 사례들을 들어 이를 제시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적인 사회’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인간적 사회의 조건들은 품위와 타인에 대한 감수성, 생리·환경적 조건, 개인 간의 유대관계, 시장가치를 넘어선 가치관, 안정의 공동체 등이다. 또 저자는 모멸에 대한 내성을 키울 것은 강조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노력이다. 모멸에 대한 내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보길 권한다. 또한 내면이 강해져야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감정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감정을 운용할 것을 당부한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모멸감에 취약한 까닭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명예와 품위에 대해서 의미를 다시 다져보고 스스로 돌아보고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할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과 깊은 내면의 성숙을 가진 개인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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