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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그저께 김연수 님의 작품을 읽기로 결심한 이후로,
어제 아람누리 도서관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고 5시간에 걸쳐서 읽었으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오늘 3시간에 걸쳐 한 번 더 읽게 되었다.
솔직히 책을,
그것도 소설책을 연달아 2번 읽은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에 어떠한 매력이 있었길래 나는 그러했을까.
워낙 복잡한 구성인 탓에 내용을 좀더 잘 이해하려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책을 읽고난 후의 그 감정을 한 번 더 느끼고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 감정이 무어라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어느정도 방향을 잡자면 올바른 역사를 알고 싶어졌고 그런 역사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고 싶어졌다.
이 소설은 나에게는 생소했던 역사 개념인 분신정국인 발발한 1991년 즈음을 주 시대 배경으로 하여, 그로 부터 30여년 전 이야기도 전개된다. (단순히 제목만 보고 연애소설인가? 오해했던 내가 순간 부끄럽기도 했지만, 뭐 연애이야기도 많이 나오니 피박은 면한 심정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0년도 되지 않았던 역사인데, 나는 몰랐었다. 그 때 어머니와 손 잡고 교회를 가다가 종로3가 지하철 역에서 최루탄을 맡고 눈물을 비오듯 쏟았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20년 전에 최루탄이 날렸으며 분신을 하고 강제폭력이 난무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무서우릴만치 망각의 동물이니깐.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일단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커서 뭘해도 올바른 사람이 될 것 같다.
문득, 며칠 전 보았던 무릎팍도사 안철수 씨 편이 생각난다.
우리는 뛰어난 사람이 되기전에 일단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한다.
p.표지
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은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내 인생에 있어, 과연 그 빛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언제쯤 평생에 걸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p.42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 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聖人)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 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 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여러번 읽어보았지만, 아직도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 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다;
p.64
문제는 그게 연인이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인류를 유일한 존재로 만들고, 또 그러므로 이 우주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
p.67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
p;70
가장 육체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랑은 그런 온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약간 더 따뜻한 상태. 하지만 한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전해지는 그 정도의 온기면 충분했다.
평소보다 약간 더 따뜻한 상태,
그런 온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p.88 투르게네프의 작품 '첫사랑'
"나는 언제나 불안한 마음으로 뭔가를 기다렸고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으며 무엇인가에 끊입없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을이 질 때면 나는 제비떼처럼 날아다니는 환상에 빠져 주위를 빙빙 돌면서 장난을 쳤다. 뿐만 아니라 나는 많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우울한 심정에 빠지기도 했다."
p.227
음악은 본질적으로 역설이지. 침묵을 이겨내기 위해 태어나지만, 결국 또다른 침묵으로 끝날 뿐이니까. 삶이 그런 것처럼.
p.292
"이건 브레인워싱, 즉 세뇌(洗腦)를 은유하는 표현이지. 누군가를 브레인워싱할 때는 제일 먼저 그 대상을 고립된 상황에 몰아넣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털어놓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잠을 안 재우면서, 사람을 바꿔가면서 심문하고, 수십 번에 걸쳐서 진술서를 쓰게 하고, 다시 그 진술의 내용에 대해서 더 깊이 따져묻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결국에는 비밀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지는, 말 그대로 벌거벗은 상태가 되지. 그때부터 세뇌작업이 시작되는 거야."
세뇌의 한자어를 보는 순간, 몸에 있는 가느다란 솜털들이 쭈뼛 서는 느낌은 무엇일까. '뇌를 씻는다.' 정말 무서운 단어다.
p.298 옥중의 네루가 어린 딸 인디라에게 쓴 글
'역사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더 매력적인 것은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
p.322
히로뽕은 필로폰(philopon), 즉 '일을 사랑한다'는 희랍어에서 유래한 상표명을 붙이고 대일본제약이 1940년부터 시판한 각성제로,
카미카제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히로뽕.
그러고도 그들은 카미카제를 신풍이란다...
그리고 놀라웠던 것은, 히로뽕의 어원.
p.346
광주항쟁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내 머릿 속은 너무나도 복잡해졌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고도 6년뒤에 태어난 나도 이런데, 80년대에 20대였던 사람들은 느낌이 어떨까...
p.352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천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충돌이라고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간에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의 속도가 변하게 된다. 그게 바로 섭동이다. 천왕성의 경로가 불규칙한 까닭은 그 근처에 있는 다른 행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p.378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데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책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 제2악장'을 듣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단다. 신기하게도 들어보니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에 나왔던 곡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들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