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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리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0년 7월
평점 :
불현듯 정신을 차린 나는 숲에서 홀로 있으며 엄청나게 굶주리고 온몸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내가 누구인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주변을 헤매던 나는 정체 모를 생명체와 조우하게 되고, 그것을 먹고 싶다는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것의 살점과 내장을 찢어발기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한참을 먹고 나니 허기가 가심은 물론 상처가 치유된다. 나는 뛰어난 자가 치유 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인 것 같다. 다시 주변을 탐색하다 한 젊은 인간 남자를 만난다. 아까와 같은 알 수 없는 본능에 이끌려 그의 목과 손을 물고 피를 빤다. 다행히 이 남자는 그전과 달리 죽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피를 빨리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듯하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나는 그와 함께 내 정체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날 것이다. 나 정체를 되찾고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버틀러는 '쇼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했다. 언뜻 보기에 트와일라잇 시리즈 같은 영어덜트 장르 소설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전통적인 공포의 존재인 뱀파이어를 인류 친화적인 존재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정말로 색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나'라고 불리는 이들 종족은 인류를 포식하는 것이 아닌 공생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이나가 인간을 물어 피를 빨 때 인간에게 흘러 들어가는 독 같은 무언가는 인간을 이나의 흡혈 행위와 이나라는 존재 자체에게 중독되게 만든다. 생리적으로, 나아가 심리적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이나는 이런 인간들을 공생인이라 부르고 이들을 보호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이나에게 식량으로서의 피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쾌락과 보호를 제공받는 것이다. 이나는 모든 인간의 피를 빨 수는 있으나 그중 자신에게 맞는 특별한 인간들만 공생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들은 인종, 성별, 나이 등의 인간이 차별받는 그 어 떤 요소도 무차별한, 완벽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무차별한 사랑에 기반한 공동체라니, 이 얼마나 완벽한 사회인가.
쇼리는 공생인과 부계 쪽 혈연 관계의 이나 가족들의 도움으로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몰살시킨 자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쇼리는 자신이 이나 유전공학의 산물로 인간과 이나에게서 태어났고, 그래서 낮에도 활동할 수 있으며 다른 이나보다 더욱 뛰어난 신체 재생 능력 등의 특별함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시도 자체가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이나 종족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일부 이나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자신의 가족이 몰살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 소설의 전반부는 전통적인 미스터리물과 뱀파이어 액션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범인이 특정된 후반부는 법정 스릴러물의 흐름을 따라가며 이나 사회의 규율과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재판 과정에서의 논리적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뱀파이어 장르문학'으로서의 특별함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후반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정의 대담함 때문에 후속편을 기대했건만, 버틀러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60대 초반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타계했다. 아쉬움은 접고 그녀의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을 기대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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