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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공가의 행운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길(도서출판) / 2024년 12월
평점 :
우리나라의 일반 대중에게는 그저 ‘프랑스에서 가장 불효자는?’이라는 넌센스 퀴즈의 답으로 거론될 정도로 존재감이 매우 낮은 에밀 졸라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린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행동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몰려 그를 애도하였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제르미날’에 감명받은 탄광 노동자들이 수시간 동안 ‘제르미날’을 연호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생의 대표작인 ‘루공 마카르 총서’는 아직도 완역되지 않았는데, 저는 그 이유가 그의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빅토르 위고,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르셀 프루스트, 프랑스와즈 사강,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아나톨 프랑스, 알베르 까뮈, 오노레 드 발자크, 기 드 모파상, 조르주 페렉… 얼마나 ‘프랑스’적이고 아름다운 이름들입니까! 그런데 왜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만 하필 그렇게 들리는건지...!
최근 ‘목로주점’, ‘제르미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등 졸라의 주요 저작을 번역하였던 박명숙 님이 에밀 졸라의 필생의 역작 ‘루공 마카르 총서’의 대망의 1권인 ‘루공가의 행운’을 번역 출간하여, 당연하게도 바로 구매하여 들뜬 마음으로 열심히 읽어보았습니다. ‘루공 마카르 총서’는 ‘프랑스 제2 제정 하의 한 가족의 자연적, 사회적 역사’라는 주제로 아델라이드 푸크라는 이름의 여성이 루공, 마카르와 각각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의 5개에 걸친 이야기를 다룬 방대한 시리즈 물입니다. 아델라이드 푸크와 정원사인 ‘루공’과 결혼하여 낳은 피에르 루공과 그 자손들은 상류층이 되어 푸크의 장손인 피에르의 부와 욕망을 물려받고, 그녀와 알코올중독자 밀렵꾼인 마카르와 동거하여 낳은 앙투안 마카르, 위르실 마카르와 그 자손들은 하류층이 되어 가난과 유전적 결함을 물려받습니다. 루공과 마카르 가문이 물려받은 바로 이 유산이 시리즈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어 후손들의 다사다난한 인생사의 천형으로 작용하는 것이죠.
‘루공가의 행운’은 이 가문의 유산의 시원(始原)을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푸크의 적자이자 별볼일 없던 소심한 기름장수인 피에르 루공이(그러나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은 그 누구보다도 드높은)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초대 대통령인 루이 나폴레옹의 친위 쿠데타와 이에 대항하는 공화파와 민중의 봉기가 뒤섞였던 극도로 혼란했던 사회인 제2 제정 성립기에 어떻게 기회를 잡고 성공했는지를 적나라해 보여줍니다. 피에르의 조카인 열렬한 공화주의자 실베르와 연인인 본능적이고 순수함 그 자체인 미예트가 봉기군을 따라 나섬에 따라 맞이하는 허탈한 죽음은 그가 혈육을 짓밟고 얻어낸 권력과 부의 행운과 비교되며 그 비극성이 배가됩니다. 루공가의 행운은 상기 두 인물 외에도 가문의 시조이자 후손들의 원형인 아델라이드 푸크의 일생, 가문의 그 어떤 유산도 물려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가족들의 행태를 관찰한 피에르 루공의 아들인 파스칼 루공, 아내와 자식들에게 빌붙어 살며 폭력을 일삼았던 마카르 가의 장남인 앙투안 마카르 등 가문의 초기 세대 인물들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루공 마카르 총서’의 프리퀄로서 에밀 졸라의 팬이라면 꼭 구매해야 할 책인 것이죠. 팬으로서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가문의 혈연관계와 등장인물들이 총서의 어떤 소설에 등장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에밀 졸라가 첫 소설을 집필하기도 전에 작성하고, 총서 완간 이후 최종 수정하여 발표한 ‘계통수’가 실려 있다는 점입니다.
계통수를 보니 아직 번역되지 않는 작품 목록이 눈에 띕니다. 제가 죽기 전까지는 꼭 모든 작품을 읽고 소장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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