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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삶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과 같이 만남에도 반드시 이별이 따르며, 이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위로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깊은 슬픔 속으로 침잠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러나 그 선택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면, 여러분은 하시겠습니까?
오늘 리뷰할 ‘시간의 계곡’은 이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계곡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있습니다. 계곡의 서쪽과 동쪽의 마을은 각각 20년 전의 과거와 20년 후의 미래가 펼쳐지는 곳입니다. 마을 간의 이동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만이 예외적으로 과거나 미래의 마을로 ‘애도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오딜은 어머니의 강권으로 이 ‘애도 여행’ 신청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자문관을 미래의 직업으로 선택하였으나, 추천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동쪽 마을에서 온 애도여행의 방문객을 목격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나 그들은 분명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부모님 이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바, 그녀는 큰 갈등에 휩싸입니다. 질서를 깨뜨리고 그를 죽음에서 구할 것인지, 아니면 침묵하여 그의 죽음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SF 애호가로서 시간 여행을 다룬 수많은 소설을 읽어봤지만 이 소설과 같이 과거와 미래를 물리적으로 설정한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계곡을 경계로 20년의 시간을 간격으로 한 마을들이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저는 높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반면에, 이 설정을 통해 수많은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애인의 죽음을 막기 위한 시간여행’이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를 선택한 작가가 과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주인공 오딜은 가난한 집안의 소심하고 예민한 십대 소녀로 소위 ‘왕따’의 삶을 살고 있는데, 동급생 에드매가 그런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줍니다. 이후 같은 친구 무리가 된 그녀는 그를 점차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짝사랑에 불과했던 그 마음은 마을의 질서를 거스를 만큼의 용기를 주지는 못했기에, 결국 그녀는 그의 예정된 죽음을 침묵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많은 이들의 불행한 미래를 초래하게 되었죠. 그의 부모는 자식 없는 삶을 살고, 오딜은 통과가 유력했던 자문관 심사를 포기하고 모두가 꺼려하는 계곡을 경계하는 헌병을 자원합니다. 그녀는 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 죄에 따른 형벌이라 여기고 고단한 세월을 수십년 간 묵묵히 버텨냅니다. 어느덧 중년이 된 그녀에게 에드매를 살릴 수도 있는 선택의 순간이 다시 찾아옵니다. 평생을 걸친 비난과 따돌림을 견디며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그 결과를 수없이 곱씹었을 그녀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정된 고단하고 비참한 노년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자신의 삶을 대가로 과거의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주는 것 중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소설은 철학을 전공한 작가의 글답게 이야기 전체에 철학적 사유가 깊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큰 줄기인 오딜의 성장기가 ‘독일풍 철학적 교양(성장) 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과, 오딜의 마지막 선택이 다분히 철학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런 면이 다소 진부해 보이는 소설의 스토리를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서로간의 개입이 모든 시간대의 마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같은 공간에 존재한 마을의 모습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소설이 왜 철학적 SF 또는 철학적 스릴러로 평가받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철학과 과학 모두 우주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목적으로 하니 의외로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후회를 남기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후회의 순간에, 오딜을 떠올려 봅니다. 그녀의 용기를, 그녀의 승리를 기억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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