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요의 바다에서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7월
평점 :
1912년 에드윈: 영국 귀족인 아버지로부터 추방당해 먼 나라로 떠나온 에드윈은 숲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기이한 경험을 합니다.
2020년 미렐라: 실종된 친구 빈센트의 행방을 찾던 미렐라는 빈센트의 비주얼 아티스트인 동생 폴 스미스의 예술 공연에서 빈센트가 어린시절 촬영한 비디오를 보게 됩니다. 그 비디오에서 그녀는 숲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기차역처럼 보이는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2203년 올리브: 팬데믹을 다룬 인기 소설 작가인 올리브는 우주 비행선 터미널에서 바이올린 소리기 들리며 시공간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2401년 가스페리-자크: 시간 연구소에 고용된 개스퍼리는 과거의 기이하고 유사한 특정 사건의 조사를 위해 과거로 가서 당사자들과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시간 연구소의 물리학자인 그의 누나는 그에게 이 사건들이 시뮬레이션 우주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엄청난 홍보가 곁들어진 책을 읽을 때는 이에 휘둘리지 않는 객관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독서 경험’을 기준으로 설명해 보자면, 적은 이는 이것에 경도될 것이고, 많은 이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후자 쪽이었으나, 오랜만에 들린 도서관에서 이 책을 첫 번째로 발견하였는데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호기심에 굴복하여 결국 읽게 되었고, 호기심의 원인이 되었던 홍보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버리고자 노력했습니다.
다 읽고 난 소감은 ‘포스터를 잘못 써서 망한 영화와 같은, 잘못되고 과한 홍보가 독이 되어버린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 소설은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 아닙니다. 배경과 설정, 이야기의 전개 등 소설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가 SF 장르문학 독자에게 낯섭니다. 시간 여행의 원리와 작동 방식은 뭉뚱그리고 근미래의 배경은 거칠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은 셰익스피어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에 가까운 순문학이라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사변 소설은 SF 장르문학의 거장 로버트 하인라인에 의해 과학 소설의 동의어로 처음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환타지나 호러 등과 차별되는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 소설의 우월성을 부각할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비현실적인 내용을 다루는 대부분의 장르문학을 통칭하는 중립적이고 포괄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부 작가들도 자신들이 '사변 소설'을 쓴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며, 문학 내에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요즘의 소설들에 있어-애초에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보면-이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SF'를 강조한 덕분에 이 소설은 엄근진한 SF 독자들의 비판을, 순문학 독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이죠.
이 소설을 '장르문학'이 아닌 것으로 보고 읽는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주제의식들, 팬데믹 하에서의 인류의 상실감, 종말을 대하는 인류의 자세,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들의 삶의 방식에서 드러나는 묘한 인간성의 동질감, 시뮬레이션 우주라는 가능성에 대한 진중한 사고 실험 등은 독자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 줍니다. 언뜻 유사해 보이는 이 주제의식이 하나로 엮이지 않고 겉도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 생각하는데, 이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결말을 생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만든 미국 드라마-이지만 시즌이 거듭될수록 산으로 가는 전개로 결말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한 편을 보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습니다.
#고요의바다에서 #에밀리세인트존멘델 #SF #장르문학 #장르소설 #문학 #소설 #책리뷰 #책읽기 #독서 #독서리뷰 #도서관 #서평 #도란군 #도란군의서재 #열린책들 #서울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