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주인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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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현대문학의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매년 빠지지 않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며 애드거 앨런 포에 비견되는 공포소설의 대가라 불리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단편집을 읽었습니다.

리뷰에 앞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있는데, 역자가 후기에서 본서의 원제인 ‘The Doll-Master and Other Tales of Terror’를 언급하며 강조하였듯이 오츠의 소설은 ‘호러(horror)’가 아닌 ‘테러(terror)’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공포’로 해석되는 두 단어를 영한/영영사전으로 찾아보면 ‘공포감, 두려움, 무서움’으로 사실상 동일한 단어처럼 보이나, 구글링을 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이해하기 쉬워보이는 해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Horror is the feeling of revulsion that usually follows a frightening sight, sound, or otherwise experience. By contrast, terror is usually described as the feeling of dread and anticipation that precedes the horrifying experience.”

즉, 호러는 공포의 경험으로 인한 감정이며 테러는 공포의 경험의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죠. 전자는 즉각적 결과, 후자는 지속적 과정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유령이나 괴물들과 조우할때 공포를 경험하지만, 자연적 존재에게서는 보통은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우리가 주위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공포의 대상이 될 리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형을 좋아하는 아들, 이웃의 백인 청년, 예전에 좋아했던 사촌 오빠,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 가족처럼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친구의 아빠, 초판본과 고서적 수집가인 서점 주인 같은. 심지어 이야기 속 배경이나 장소, 상황도 일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감추어진 본성이 있습니다. 고대의 인류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자연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보유할 수 밖에 없었던 포식자로서의 살생 본능이 그것입니다. 이런 비인간적 본성이 일상의 상황에서 발현되어 발생하는 테러는 잔혹한 살인의 묘사도, 오싹하고 자극적인 장면의 등장이 없음에도 동족 포식자와 동족 피식자 관계가 되는 그 부조리함이 선사하는 생경함과 불쾌함으로 읽는 이에게 끈적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선사합니다. 또한 포식자 또는 피식자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결말-누군가가 죽게 되는 비극적인-로 나아가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혀를 날름거리며 또아리를 튼 뱀 앞의 쥐, 거대한 쓰나미를 목도한 인간, 고장으로 멈출 수 없는 폭주하는 기관차의, 저 멀리 끊어지고 휘어진 레일을 발견한 기관사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독자 역시 이들의 정해진 죽음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것이 이야기일 따름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의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하며, 우리의 이웃 중 누군가는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사이코패스 살인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며 마음이 오싹해지는 것입니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며, 살아있음에 무한히 감사하게 됩니다.

현대문학 서평단에 선정된 인연으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저명한 작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식의 지평이 아주 조금은 넓어졌다는 안도감과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참 많다는 푸념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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