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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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주관적인 것에만 집중할 때 비로소 상호 주관적인 것을 얻을 기회가 생긴다

저는 켄 리우가 작성한 서문의 이 한 문장이은랑전에 대한 감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소설의 본질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음으로서 얻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감정입니다. 이야기(Story)가 서사(Narrative)가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마음이 정화가 되는 것이죠. 이야기를 서사로 만드는 데에는 작가 본연의 능력인 스토리텔링, 문장력 뿐만 아니라 소설의 출발이 되는 이야기 자체도 매우 중요합니다.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잘 알려진 객관적인 소재를 고르는 것은 작가에게 쉬운 선택일 수는 있으나, 비슷한 선택을 하는 수많은 다른 작가들과의 치열한 경쟁에 노출될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작가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나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은 차별화를 이루어 낼 수는 있으나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장르 소설에 있어서는 이런 선택을 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소설의 배경도 익숙하지 않은데, 이야기도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 이런 선택은 중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켄 리우의 이번 단편집은 이런 케이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다양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13가지의 처음 경험하는 이야기들은 장르 소설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낯선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의 불편함을 견디고 조금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그의 주관적인 이야기들의 틈에서 조그마한 익숙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익숙함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면, 그 너머에는 내가 언젠가 꼭 살고 싶었던 집이 비어 있는 상태로 있을 것입니다.


(처음 보기 때문에)생소하지만 (내가 원하는 장소이기에)익숙한 이 집을 우리는 자유롭게 꾸밀 수 있습니다. 내가 아끼면 물건과 사고 싶었던 가구를 들이고, 사랑하는 이를 초대하고 나면 이 집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집에서 우리는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의 인생을 위해 자식에게 소원했으나 경이로운 인간이었던 엄마를 만날 수도, 존재도 몰랐던 딸과 함께 멸망한 외계 문명을 탐사하다 위기에 빠질 수도, 고차원의 공간을 이용한 암살자로 키워졌으나 대의를 위해 스승과 동문에게 대적한 사람이 될 수도, 고도 발전기의 미래 시대 중 급작스런 문명의 붕괴 이후의 혼란한 세상에서 토끼로 변신할 수 있는 여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켄 리우의 상호 주관적인 집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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