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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평점 :
1. 해적 이야기
해적은 아주 질이 안 좋은 놈들이고, 다른 배를 약탈하는 고약한 도둑들이다. 약탈한 보물들은 실컫 쓰고도 너무 많아서 꼭 어느 섬에 숨겨둔다. 까먹을까봐 위치를 적어둔 보물 지도는 미련하게 어디 뒀다가 도둑맞는다. 덕분에 호킨스의 모험 이야기가 시작된다. ‘보물섬’의 시작은 음산한 공포 영화의 첫 장면 같다.
‘낡은 여관. 여관 주인의 아들 짐 호킨스. 짐과 가족들이 운영하는 여관에 해적으로 보이는 기괴한 사람이 머물렀다. 항상 화가 난 모습으로 콧김을 식식 뿜어 대는 이 늙은 해적은 무언가에 쫓겨 숨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낮에는 늘 초조하게 여관 주변을 살피면서도 밤만 되면 럼주를 미친 듯 퍼마시고는 칼을 뽑아 들어 탁자를 쿡쿡 찍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주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늙은 해적은 어느 날 결국 살해당한다. 틀림없이 또 다른 해적들의 짓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늙은 해적이 지니고 있던 지저분한 궤짝에 든 지도. 그들 몰래 지도를 손에 넣은 호킨스는 이것이 대 해적 플린트가 숨겨 놓은 보물지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친구들과 함께 선원을 모아 이 보물섬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그가 모은 선원들 중에는 보물섬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 몰래 탄 해적들이 끼어있었다.’
허름한 여관에서 시작되는 해적의 죽음. 숨죽이고 방안에 틀어박혀 악랄한 해적들의 잔인한 일대기를 엿보기로 한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 수록 이 악랄한 녀석들이 어딘가 엉뚱하고 멍청한 면을 다분히 보여주는 바람에 해적들이 때론 귀엽게 느껴진다. 단순 무식하게 보물만 밝히는 이 해적 무리들과 짐 호킨스의 용기 있는 한바탕 대결이 볼만하다. 그들은 어쨌든 한 배를 타고 보물섬으로의 모험을 함께 한다.
새로운 곳으로 ‘모험’을 떠난 다는 설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이나 ‘꿈’같은 단어와 결탁하여 그들이 무언가 대단한 일에 도전한다는 허영심을 자극하는 것 같다. 똑같은 하루, 똑같은 학교생활, 직장생활에 찌들다 보면 마음속에 피로가 계속 쌓인다. 다 때려 치고 떠나고 싶다. 모험을 떠나자! 설사 해적이 될지라도 어쨌든 멀리 ‘큰 한 방’을 위해 떨쳐 나가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는 우리는 열심히 뼈가 빠지게 학점 따고 토익 점수 올리고 힘겹게 취직해서 매일 밤까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직장에 익숙해지고, 연애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모험아 영원히 안녕. 물론 이 ‘평범해 보이는’ 삶의 코스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자유로운 해적이 되어 모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한번 즈음 품어 봤으리라. 해적 이야기는 그런 마음을 은근히 달래준다.
2. ‘보물섬’의 미친 매력자, 키다리 존 실버
소설 속 ‘키다리 존 실버’는 온 몸으로 모험을 받아내며 거침없이 살아 온 과거를 숨기는 대 해적으로 그려진다. 평범한 삶은커녕 목숨이라도 붙어 있는 게 다행일 것 같은 사람. 보물섬의 모험은 키다리 존 실버의 등장부터 더욱 숨 막히는 흥미진진함이 쏟아진다. 흔하디흔한 해적 설정의 모태가 된 ‘보물섬’의 실질적인 주인공 ‘키다리 존 실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미친 매력을 가진 인물이다. 외다리임에도 불구하고 날쌘 몸놀림, 해적이라고 볼 수 없는 깔끔하고 밝은 미소, 물론 그것은 단지 거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장치에 불과함, 언뜻 보면 착한 놈인지 나쁜 놈인지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최상급 포커페이스, 배와 바다를 훤히 꿰뚫는 전문지식은 기본에 순발력 있게 돌아가는 두뇌와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는 교활한 언변까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야비한 꼼수만 쓰는 이 남자가 도대체 왜 매력적일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에 대한 단순한 흥미일까. “해적 정신을 갖자!” 이렇게 외치며 일 했다는 스티브 잡스에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과 비슷한 걸까. 아니면 무법자나 약탈자가 되고픈 욕망을 모두들 조금씩 숨기고 있기 때문일까.
내 생각엔 ‘야망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보는 재미인 것 같다. 어떤 대상에 대한 순수한 열망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이 저지르는 즐거운 페인트질 같은 연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맞으려나. 그가 보물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펼치는 야망은 배신과 무자비함으로 얼룩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악당이니 빨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우아하고 근사한 악당과 함께 어떤 착한 녀석들을 혼쭐 내 줄지 고민하며 럼주라도 잔뜩 퍼마시고픈 생각이 든다. ‘얼씨구 좋다, 럼주가 한 병!’ 나만 그럴까. ‘보물섬’을 읽으면 정말로 술이 확 당긴다. 취한 듯 악당과 함께 모험으로의 몽상에 젖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3. ‘보물섬’을 다녀와서
보물섬은 인물들의 상황과 대사들이 위트가 넘친다. 또 독특하고 귀엽게(?) 악랄한 해적들 덕분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짐 호킨스-리브지 의사로 번갈아가며 어른과 아이 두 가지 시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구조로 그들의 모험을 더욱 다채롭게 맛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키다리 존 실버의 능청스러운 교활함에 호킨스가 분노하는 장면들은 놓치기 아깝다.
‘이 지독한 악당들이 내게 늘 해오던 것과 똑같은 사탕발림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걸 들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과 통을 박차고 나가 실버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실버는 누가 엿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계속 지껄였다.’
‘캐리비안의 해적’과 ‘원피스’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다. 원피스야 원작이 일본이고, 캐리비안의 해적은 특히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렸는데 아주 단순하고 생각했을 때 이건 아마도 영국과 일본이라는 같은 ‘섬나라’가 갖는 동질감과 바다로의 모험에 대한 동경 따위가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꽤 섬나라’이니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도 비슷한 이유라고 우겨 본다. 배 멀미 안하는 배가 있다면, 바다로 떠나리라!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주인공 잭 스페로우가 사과를 한입 베어 먹는 장면, 원피스에서 루피가 사과 통을 박차고 등장하는 모습은 분명 ‘보물섬’에서 시작된 모티브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세우고 해적정신을 강조한 연유도 여기서 시작된 것일까. 사과 한입 베어 물면 뭔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바다로 모험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배 멀미 안하는 배가 어디 있겠나.
나는 개인적으로 캐리비안의 해적, 원피스, 보물섬 이 세 작품의 열렬한 팬이라 그런지 늘 신비로운 모험에 대한 동경심이 있다. 어딘가에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상상하고 그래서 지금 우울한 일들이 그곳에 가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힘을 얻기도 한다. 오늘 ‘보물섬’을 다시 읽으니 또 힘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