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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판매완료
‘아가씨의 대열에서 아줌마의 대열로 마지못해 넘어가고 있는’ 서른아홉의 주인공 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그녀의 사랑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시몽과 로제라는 극명한 차이를 가진 남자들과 동시에 사랑에 빠지는 폴의 사랑은 ‘양다리’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순수하다. 그런 폴의 모습이 영악함을 넘어 표독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유로운 사랑과 순수한 사랑의 오묘한 경계를 긋는 이 이야기는 사실들만 따지고 보면 사랑과 전쟁의 원본 줄거리로 삼기에 손색없는 막장의 끝을 보여준다.
서른아홉의 이혼녀 폴. 그녀의 애인 로제. 그는 폴 몰래 다른 젊은 여자와 잠자리를 즐기는 남자다. 그리고 폴은 자신에게 일을 맡긴 ‘고객의 아들’을 알게 되고, 그녀가 스물다섯 된 그 아들 시몽과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 폴과 그의 애인 로제, 그리고 폴의 또 다른 애인 시몽. 삼각관계인 그들이 함께 식탁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발레 극을 바라보는 마지막 모습에 이르렀을 때는 마치 작가의 뻔뻔스러운 뚝심을 고스란히 보는 것만 같았다.
폴에게 빠진 스물다섯의 청년 시몽이 그녀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쪽지를 남기기 전까지 나는 이야기가 그들만의 로맨틱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폴은 로제와의 끈을 놓지 않고 두 남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자유롭지만 순수한’ 사랑을 이어간다. 책을 읽으며 열렬한 사랑을 바치는 불쌍한 시몽을 어쩔 수 없이 응원하게 되는 태도는 뒤로 한 채, 주인공 폴의 감정에 나도 모르게 몰입되곤 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그녀는 나이 차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 “십 년 뒤에도 그가 여전히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도 스스로에게 하지 않았다. 십 년 뒤에 그녀는 혼자가 되거나 로제와 함께 지내게 되리라. 그녀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집요하게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거듭 속삭이고 있었다. 스스로도 속수무책인 그런 이중성을 떠올릴 때면 시몽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배가되었다. “나의 희생양. 나의 사랑스러운 희생양. 나의 귀여운 시몽!”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끝까지 감상하면 이런 폴의 이중적인 애정과 사랑을 비난할 마음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작가의 뚝심에 굴복한 결과라면 조금 억울할 듯 하고, 단지 사랑의 이중성은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라는 게 낫겠다.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사랑과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의 대비 같은 것이 오락가락해서 마치 누구라도 그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겪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 그렇게 폴에 대한 변명을 꽤 유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
작품처럼 나이와 결혼의 굴레, 사랑, 또는 섹스라는 단어들이 혼합되고 뒤엉키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사랑은 우리에게 이중성을 주기에 충분한 재료다. 짝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틀림없이 있었다가도, 어느 날 우연히 지나치는 가게 종업원이 웃음을 한가득 띠면서 나에게 생긋생긋 말하는 모습을 보고 착각에 겨워 가슴이 콩닥거렸을 때 나는 내 초라하고 어이없는 이중성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순간이나마 그때 그 기쁨은 가히 사랑이라 부를 만큼 혼란스럽기에 충분했었다.
모든 이들이 이런 감정들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아주 잠시나마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그런 순간으로부터 말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상황조차 전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황당하고, 예측 불가능한, 그래서 때로는 덧없기도 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계적인 ‘퍼즐’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너를 사랑해’라는 말이 도대체 어떤 과정의 결과로 언제, 어떤 순간에 뱉어 내는 것일지는 사실 경험에 의해 가늠할 뿐이 아닌가.
작가가 어딘가 더 멋진 설명이나 실마리를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에 브람스의 콘체르토를 들어본다. 솔직히 큰 감흥은 없었다만, 그래도 주인공 폴을 사랑했던 시몽처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나를 잠깐이라도 사랑해주는 헛된 상상에 빠지기엔 충분한 곡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비록 비극이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