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음악의 미학 - 레코딩, 리듬, 그리고 노이즈
테오도어 그래칙 지음, 장호연 옮김 / 이론과실천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책상태에 따라서 최고 5만 원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긴 일반 이용자가 중고책도 팔 수 있나보군요. 기다리겠습니다~! 꼭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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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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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폴 오스터는 언제나 '환상 구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말은 문학 창작 행위 전반에 대한 방식과 전통에 대한 의미로서의 단순한 픽션 설정의 개념을 일컫는 게 아닌 '현실적 허구의 원판 위에 페이지가 더해갈수록 좋이 뿌려대는 환상의 묘약'에 대한 것이다. '현실적'이다는 것에 있어선 이번 '환상의 책'은 다른 소설과의 비교 우위에서 조금은 더 충실하다. (공중 곡예사의 문자 그대로 공중을 떠다니는 곡예쇼를 펼치는 월트에 대한 이야기, 우연의 음악에서의 나쉬의 벽쌓기에 대한 상징적 우화에 비한다면 그렇다.) 

폴 오스터는 한 개인에 대한 소소한 현실적 내용을 도입부로 해서 한순간의 나락이라는 모티브를 어김없이 적용하고 어느 순간 우연이라는 갑작스런 급발진을 장치로 배치하고는 예측못할 사건, 사고의 굴레 안으로 무책임하게 주인공을 구겨넣는 데 있어선 환상적인 귀재다. 이런 소설쓰기의 전체적 얼개 꾸리기는 작가 폴 오스터만의 주특기이자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겠다.

첫머리에서 설명했듯이 이 소설의 상황 전개는 비교적 현실적인 무게가 있다. 하지만 읽을 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현실성이라는 구태의연함을 어떻게 자연스러운 기교를 통해 기괴하기까지한 비현실적 지점에 무게의 추를 옮길 수 있는가에 대한 정석이다. 이에 대한 건 외부와의 단절을 할 수 있는 한 극대화한 짐머가 한 영화인에 대한 집요한 파고듦을 스케치하는 부분과 영화인으로서의 헥터 만이 아닌 인간 헥터 만의 족적을 앨머를 통해 듣게 되는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잃어버린 비극에 동요하는 짐머가 다른 무언가에 집착하여 열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은 참극에 대한 갖가지 망상과(자기의 부주의에 의한 결과라는 상상들) 자괴감 비슷한 심리를 얼마간 누그러뜨리는 데 필요한 일종의 한시적 진통제를 쥐어잡고자 하는 처절함이다. 단지 확실한 건 헥터 만의 몇 편의 클립들을 본 것만으로 웃음을 머금었다는 상황 자체에 대한 그림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거라는 것이다.차라리 지옥의 시기에 지옥을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의 피력을 자신에게서 발견했다는 데 대한 자신을 향한 비소 내지는 희망의 표출일 것이며, 이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드러나는 소설의 중대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족사의 불행을 맛본 짐머의 피폐한 의식속에서 어느 정도는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헥터 만의 영화들은 주인공 인생의 일대 전환기이자, 가족사의 불행을 전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가르는 칼날이기도 하다. 죽어도 산 사람처럼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인간사에 있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죽은자의 그림자를 하루가 다르게 더 짙게만 드리우는 데 전진하는 짐머의 후기 인생의 첫걸음은 사실 또다른 그로서의 잉태를 알리는 지난한 과정의 혹한 시련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처럼 책의 말미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진실과 충격의 모습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를 미리부터 선고하는 듯, 비장한 심경과 고백, 술회를 초반 수십여 페이지를 통해 보여준다. 이런 게 익숙지 못한 독자에게는 다소 지루한 반복과 얻는 것 없이 맥빠지기만 하는 구구절절함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그러나 폴 오스터는 추리적 감수성과 그만의 감칠나는 이야기 기술로써 독자가 끝끝내 완독을 했을 때에 이르러서는 그는 그의 그러한 마술적 힘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후회없는 선택이었음을 재삼재사 각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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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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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이 자아라면, 나(주체)는 성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문장은 참일까 거짓일까. 성명이 자아라는 전제는 거짓이다. 이름이란 사회망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구분 짓는 일종의 표지 딱지라고나 할까. 당연하게도 이름은 실재적 자아 그 자체가 될 순 없다. 나(주체)는 성명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결론 또한 모순됨으로 거짓이다. 나는 나로서의 나였고, 자연하게 주어진 주체였지 결코 성명이 먼저 발현하여 자기자신을 새로이 드러내주진 않는다. 거짓+거짓은=참이다. 거짓에서 거짓됨이 나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권두언에서의 명제는 참이다. 거짓된 전제에서 거짓된 결론이 도출됐으니 참말이 됐지만 또한 글이 의도하는 바가 사리에 맞지 않음 역시 드러내줬다. 그러므로 같잖게 부려먹은 기호논리학에 의하면 우리는 성명일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성명에 얽힌 모든 추억과 과거의 조각들의 모듦이 '나'를 완전하게 '나'임을 말해주며 충족해줄 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공수표로 전락한 원점 상태에서의 상황에 출사표를 과감하게 던져보려 한다. 과거의 깨어진 조각을 맞춰가는 퍼즐 놀이를 감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인, 내가 누구였었는지를 알아내겠다는 단일한 일념. 이런 주인공의 과거 완료형을 현재 진형형으로 되돌리려는 내밀한 감성 여행을 정치하게 그려 보이는 모디아노의 필적은 간명하고 정제된 만큼 자구 사이사이에서는 산열하듯 한 울림 가득 피어올린다. 작가의 소설들이 전반적으로 기억이 화두라면 그리고 과거를 추억하기, 추적하기를 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면 몽상에서 불연 듯 깨어나 순간 떠올리는 무규칙한 영상들의 파편과도 같은 단절함이 자연스럽게 작품 전체와 교응하게 된다. 그로 인해 문장까지도 회상의 자국에서 하나씩 떼어낸 작다란 편린의 수사학이 되고, 독자는 그 문장과 문장의 공백을 채울 아니 하나의 유의미로 체계화할 일종의 연관짓기를 통한 의미 산출의 임무를 떠 안는다. 그래서 모든 문장에 반각-을 사이마다 잇닿게 한다면 소설은 커다란 기억의 보고쯤이 될 수도 있으리라.

모르는 게 약이라고도 했던가. 그렇담 알면 쥐약이 된단 소리이기도 하잖는가. 출생의 비밀을 모른단들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면 그보다 더 무엇이? 과거가 말끔히 증발했지만 새 출발한 인생이 주옥같은 나날이면 이 또한 무엇이? 이보다 더 필요한 건 없지 않을까. 피보다 정이라고,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모든 게 당장의 현실인 것이고 또 그것이 필요로 하는 현재의 모든 것이기에 더는 가타부타 논할 게 아닌 것이다. 역자도 말했다. 이런저런 증거들의 나열이 뭔가를 살풋이 연상하게 해도 결국은 완전하지 않은 본질적으로 무상한 허무만이 눈 앞에 도드라질 뿐이라고. 소설 속 위트도 이렇게 말한다. ".....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군요....." 주인공도 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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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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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나오는 소설속 화자는 맹목적으로 시선을 같이 하고자 했던 독자의 신의를 철저하게 저버린다. 황당하게도 이야기의 중추적 맥을 이끄는 주인공이 범인으로 지목되기 때문이다. 이런 반전은 발상이 대담한 만큼 평도 극단으로 나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놀랍도록 탁월하다.'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탐정 소설로서 비윤리적인 결말'이라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도 상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콧수염도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장치가 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가 철저히 이성적이고 온전한 정신에서 주인공의 직접적인 시점으로 독자를 속였다면, 후자의 경우는 이성의 마비를 초래하는 정신 분열적 상승 와중에 있는 주인공의 내면적, 주변적 상황을 작가를 통해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는 정도다.

희극은 비극보다 혹독하다고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가. 그저 일상 안에서 반려자에게 해줄 수 있는 깜짝 이벤트를 위해 기꺼이 희생(?)시킨 콧수염이 무색하게 조금은 기운 빠지도록 만드는 상황이 연출됐음을 남자는 직감한다. 아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 그 무반응은 이상하리 만치 섬뜩해진다. 굳이 입 밖으로 표현을 하진 않더라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시큰둥하거나 썰렁한 따위의 미미한 분위기의 감운조차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 웃지 못할 일상의 일상적이지 않은 괴리감에 주인공은 퍼뜩 싱겁다는 자조 섞인 푸념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려 한다.하지만 남자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다. 친구는 물론 평소 사회적 관계망 안에 포섭되었던 모든 주변 인물이 시종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아닌가.

결론적으로는 아내가 친구와 모종의 음모를 계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적정을 넘어선 망상 아닌 망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최후는 도피가 되고, 또한 매저키스트와도 같은 자학을 통해 재존재의 자각을 추구하고자는 내밀한 욕망의 충족 과정이 살기어린 필치감으로 그려진다. 이게 200페이지가 주는 강밀도의 긴장의 끈을 이완시켜줄 비극적인 결말이다.

막장까지 와버린 주인공은 아마도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확고히 하는 데 절실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끔직한 행동을 하고 만다. 그건 다름 아닌 자살이었다. 삶이 끝나는 지점, 생의 한계를 보게 되는 지점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게 무엇일까? 그게 바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가 현실에서(거창하다 차라리 소박한 일상이라 하자.) 진정성을 갖기 위해 죽음과 필연을 맺고자 한다. 생이 끝나는 지점이 '있음'을 안다는 건, 모호한 존재의 여부를 '실존'으로 비약하게 해주는 계기가 됨으로…. 결국 '세계-내-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이 조어를 의미화하기 위해 주인공은 '죽음'이라는 선택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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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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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의 지적 끝타리와 마주 잇닿은 광양가는 길로, 그 접경지. 그 지경 한 가운데 은밀하게 산세에 파묻힌 듯 깊숙이 자리해 있는 한 군부대가 내 의무를 다하고 있는 곳이다. 까마득한 이등병 생활도 산허리를 깎아 다소 거칠게 사면을 낸 자리에 허름하게 자리한 초소의 근막에서 부는 바람과 함께 저물어진 시간의 모퉁이로 휘돌아 날려간 지 오래다.

얼마나 흘렀을까. 한 선임의 소개로 현의 노래를 요사이 조석으로 가느랗게 묵독하였다. 그 첫인상, 자구 하나하나 사사이 고집하여 강밀한 얼개 꾸러미를 한가득 풀어놓는 김훈의 미려한 기교의 당돌참.

소설에서는 주된 축을 담당하는 두 인물이 있다. 그 한 명이 삼국 각개의 왕 치세에 이루어지는 격정의 한복판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먼지 나듯 산란한 대가야국의 망국자된 처지로서 소리의 참됨을 갈망하며 '칼이 노래하는 벌판을 뒤로 하고', '현이 노래하는 강토와 뒤엉켜 놀고자 하는', 정도를 지향하는 한 순정한 예인 우륵이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야로는 대장장이로서 덩이쇠를 벼리고 이글대는 불꽃 와중에 쇠를 녹여낸다. 그리하여 형태화된 병장기는 육신이 잘리고 터져서 피비린내 한껏 진동하는 큰 무리의 대오 속에서 병장기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산통의 과정을 항변이라도 하듯 거칠게 날뛰며 광기를 산출한다.

그런 둘이서 가려는 길은 같기만 하다. 신라로의 귀부. 야로는 자신의 공을 높이 사주리라 순진하게 믿어 의심치 않아 신라 병부령 이사부를 찾고, 우륵 역시도 황량한 전장터를 제 몸과 멀리두어 산 자만이 누릴 '살아있는 동안만의 소리'를 위해 예술의 지속을 목적하고자 하나의 방편으로써 이사부를 뵙자 한다. 허나 한 길을 갔되 말로의 광경은 서로가 다르기만 하다.

'칼'의 순절함 없이 여러 국토를 넘나들며 어느 한 곳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 기민한 뱀의 자태를 이사부는 인정에라도 신임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야로의 최후란 살풍경의 끝자락에서 위태하게 참담함의 장막으로 몸을 내던지게 되는 과보를 통한 종말이다. 반면에 우륵은 어디하나 적을 두지 아니 하고 단지 소리로서의 소리, 한없는 풍월의 기치를 뽐내며 국영을 초월한 제가끔의 소리, 예술혼의 깊이로 호소한다. 이에 이사부는 물론 신라 진흥왕에게까지 그 순정한 덕을 칭송 받기에 이른다.

이로써 현은 칼보다 위대할 수 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음악의 적(籍)없음, 즉 비이념성의 순수를 알게 한다. 칼은 드셀지언정 단박의 꺾임에 허망하게 부러진다. 하지만 현은 다르다. 흔들한 유순함 그 이면에 감춰진 질기고도 가열찬 생력감의 대거죽만큼이나 꿋꿋한 지조와 생명력을 자랑한다.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한결 같음이며 항상 그러함에 그러할 뿐인 것이다.

작금의 내게 있어 현의 노래가 던져지우는 의문부호 하나. 이 부유하는 물음은, 왜 나는 한 평생 절박한 심정으로 박약한 심상만이 다인 듯 살면서 절절한 목메임으로 사는지에 대한 것. 그저 우륵이 가진 생의 의지만큼만, 딱 그만큼 만을 살아내지 못하는 나의 정처없음에 서글프다. 그 언젠가 이 내 생애 현의 노래만 같기를 희구해 본다면 정녕 사치일까?

어찌됐든 항상 그러했음에 변함없이 이 해도 또 이듬해도 그러할 것이다. 내가 경계서는 초소를 우습게 덮어버릴 듯 위태하게 뻗치고 자란 침엽수와 웃자란 수풀을 스쳐다 만드는 그 특유의 내음을 바람은 실어 날라 밤이면 내 안면과 허전하여 추워질 내 목 주위를 겨냥하고는 여지없이 차갑게 때려댈 것을 말이다. 또한 짧되 길기도 한량없을 그 시간에 바람의 세참이 내 귓등에 간질이듯 미끄러지며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흩뿌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날카롭되 선선하여 휭휭거리며 내 몸 근처를 에둘러 가는 바람 소리에 가끔은 내 육신이 몸서리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그 기세등등함이 '맹렬한 적막'으로 다가와 내 의식 빈자리에 음렬의 공허를 일깨울 것이다.

내 주위를 공전하는 시간과 소리의 영속성. 나는 귀기울이려 한다. 소리의 그 한없는 순정과 적(籍)없음을, 칼부림 그 이상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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