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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폴 오스터는 언제나 '환상 구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말은 문학 창작 행위 전반에 대한 방식과 전통에 대한 의미로서의 단순한 픽션 설정의 개념을 일컫는 게 아닌 '현실적 허구의 원판 위에 페이지가 더해갈수록 좋이 뿌려대는 환상의 묘약'에 대한 것이다. '현실적'이다는 것에 있어선 이번 '환상의 책'은 다른 소설과의 비교 우위에서 조금은 더 충실하다. (공중 곡예사의 문자 그대로 공중을 떠다니는 곡예쇼를 펼치는 월트에 대한 이야기, 우연의 음악에서의 나쉬의 벽쌓기에 대한 상징적 우화에 비한다면 그렇다.)
폴 오스터는 한 개인에 대한 소소한 현실적 내용을 도입부로 해서 한순간의 나락이라는 모티브를 어김없이 적용하고 어느 순간 우연이라는 갑작스런 급발진을 장치로 배치하고는 예측못할 사건, 사고의 굴레 안으로 무책임하게 주인공을 구겨넣는 데 있어선 환상적인 귀재다. 이런 소설쓰기의 전체적 얼개 꾸리기는 작가 폴 오스터만의 주특기이자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겠다.
첫머리에서 설명했듯이 이 소설의 상황 전개는 비교적 현실적인 무게가 있다. 하지만 읽을 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현실성이라는 구태의연함을 어떻게 자연스러운 기교를 통해 기괴하기까지한 비현실적 지점에 무게의 추를 옮길 수 있는가에 대한 정석이다. 이에 대한 건 외부와의 단절을 할 수 있는 한 극대화한 짐머가 한 영화인에 대한 집요한 파고듦을 스케치하는 부분과 영화인으로서의 헥터 만이 아닌 인간 헥터 만의 족적을 앨머를 통해 듣게 되는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잃어버린 비극에 동요하는 짐머가 다른 무언가에 집착하여 열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은 참극에 대한 갖가지 망상과(자기의 부주의에 의한 결과라는 상상들) 자괴감 비슷한 심리를 얼마간 누그러뜨리는 데 필요한 일종의 한시적 진통제를 쥐어잡고자 하는 처절함이다. 단지 확실한 건 헥터 만의 몇 편의 클립들을 본 것만으로 웃음을 머금었다는 상황 자체에 대한 그림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거라는 것이다.차라리 지옥의 시기에 지옥을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의 피력을 자신에게서 발견했다는 데 대한 자신을 향한 비소 내지는 희망의 표출일 것이며, 이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드러나는 소설의 중대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족사의 불행을 맛본 짐머의 피폐한 의식속에서 어느 정도는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헥터 만의 영화들은 주인공 인생의 일대 전환기이자, 가족사의 불행을 전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가르는 칼날이기도 하다. 죽어도 산 사람처럼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인간사에 있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죽은자의 그림자를 하루가 다르게 더 짙게만 드리우는 데 전진하는 짐머의 후기 인생의 첫걸음은 사실 또다른 그로서의 잉태를 알리는 지난한 과정의 혹한 시련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처럼 책의 말미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진실과 충격의 모습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를 미리부터 선고하는 듯, 비장한 심경과 고백, 술회를 초반 수십여 페이지를 통해 보여준다. 이런 게 익숙지 못한 독자에게는 다소 지루한 반복과 얻는 것 없이 맥빠지기만 하는 구구절절함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그러나 폴 오스터는 추리적 감수성과 그만의 감칠나는 이야기 기술로써 독자가 끝끝내 완독을 했을 때에 이르러서는 그는 그의 그러한 마술적 힘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후회없는 선택이었음을 재삼재사 각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