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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나오는 소설속 화자는 맹목적으로 시선을 같이 하고자 했던 독자의 신의를 철저하게 저버린다. 황당하게도 이야기의 중추적 맥을 이끄는 주인공이 범인으로 지목되기 때문이다. 이런 반전은 발상이 대담한 만큼 평도 극단으로 나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놀랍도록 탁월하다.'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탐정 소설로서 비윤리적인 결말'이라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도 상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콧수염도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장치가 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가 철저히 이성적이고 온전한 정신에서 주인공의 직접적인 시점으로 독자를 속였다면, 후자의 경우는 이성의 마비를 초래하는 정신 분열적 상승 와중에 있는 주인공의 내면적, 주변적 상황을 작가를 통해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는 정도다.
희극은 비극보다 혹독하다고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가. 그저 일상 안에서 반려자에게 해줄 수 있는 깜짝 이벤트를 위해 기꺼이 희생(?)시킨 콧수염이 무색하게 조금은 기운 빠지도록 만드는 상황이 연출됐음을 남자는 직감한다. 아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 그 무반응은 이상하리 만치 섬뜩해진다. 굳이 입 밖으로 표현을 하진 않더라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시큰둥하거나 썰렁한 따위의 미미한 분위기의 감운조차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 웃지 못할 일상의 일상적이지 않은 괴리감에 주인공은 퍼뜩 싱겁다는 자조 섞인 푸념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려 한다.하지만 남자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다. 친구는 물론 평소 사회적 관계망 안에 포섭되었던 모든 주변 인물이 시종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아닌가.
결론적으로는 아내가 친구와 모종의 음모를 계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적정을 넘어선 망상 아닌 망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최후는 도피가 되고, 또한 매저키스트와도 같은 자학을 통해 재존재의 자각을 추구하고자는 내밀한 욕망의 충족 과정이 살기어린 필치감으로 그려진다. 이게 200페이지가 주는 강밀도의 긴장의 끈을 이완시켜줄 비극적인 결말이다.
막장까지 와버린 주인공은 아마도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확고히 하는 데 절실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끔직한 행동을 하고 만다. 그건 다름 아닌 자살이었다. 삶이 끝나는 지점, 생의 한계를 보게 되는 지점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게 무엇일까? 그게 바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가 현실에서(거창하다 차라리 소박한 일상이라 하자.) 진정성을 갖기 위해 죽음과 필연을 맺고자 한다. 생이 끝나는 지점이 '있음'을 안다는 건, 모호한 존재의 여부를 '실존'으로 비약하게 해주는 계기가 됨으로…. 결국 '세계-내-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이 조어를 의미화하기 위해 주인공은 '죽음'이라는 선택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