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민중사 - 중세의 붕괴부터 현대까지,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
윌리엄 A. 펠츠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출처 :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함께하는 품> 통권 35호, 2018년 5월호


책소개

역사의 무대에 선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유럽민중사》/윌리엄 A. 펠츠/서해문집/2018년3월/20,000원


양솔규(회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하려는 국회 움직임에 맞서 민주노총은 각 지역별로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 조금 전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가석방 되었다. 민중총궐기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한상균 전 위원장은 많은 동지들의 박수를 받으며 2년 5개월여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것이다. 중요한 싸움의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폭압적 탄압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해고는 살인이다!’ 외치며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싸움에 임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국가폭력에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한상균 위원장은 민주노총의 위원장으로서 박근혜의 퇴진을 위한 민중총궐기를 책임졌다. 6월항쟁
과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이던 2016~2017년, 역사적인 촛불혁명의 전야제의 총책임자가 한상균이었다. 단지 노동자 투쟁뿐만이 아니었다. 작년 5.18 광주민중항쟁 37주기와 올해 38주기 기념식에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 5.18 영령들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80년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바 있는 한상균 위원장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에게 80년 광주의 5월과 2009년 평택의 여름, 그리고 2015년 광화문의 겨울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상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선택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이성적 동의 혹은 감정적 호응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기억과,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 그리고 이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변이들,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의 다양한 존재조건이 버무려지고 켜켜이 쌓여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즉각적으로, 때로는 연속적으로, 때로는 단절적으로 역사의 장에 등장한다.


아마도 ‘문빠’들에게는 문재인 대통령이, ‘노빠’들에게는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맨’들에게는 3대에 걸친 이씨 왕조가 현재의 사회를 주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국사회의 ‘진보’(?)를 책임진 이들은 말없이 싸우다 죽어간, 꿈 없이 일하다 물러난, 욕심 없이 나누다가 퇴장한 다수의 축적된 노력들일 것이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부터 강조된 이러한 ‘민중사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퇴조(?), 자본주의의 첨단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퇴색되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국 ‘조직의 계보’가 집단의 역사를 해석하는, 앙상하지만 유일한 틀로 기능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중사관이 퇴조하면서 ‘운동의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개개인의 선택을 구속하던 올가미들도 사라졌다. 운동사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고, 아무렇게나 변명해도 되는(또는 변명조차 필요 없는) ‘자유로운’(?) 시대 속에 있다. 바른미래당 후보로 나가도 되고, 공공기관 이사로 가도 되고, 전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 된 것이다. 고도의 숙고(熟考)가 필요한 자력갱생(自力更生),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 오히려 개개인의 선택은 즉자적이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A. 펠츠가 자신의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와 행동의 유행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고, 또한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무력함’은 새로운 ‘노력’을 만들어 낼 것이고,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광범위한 민중들이 만들어낸 장대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시카고의 노동계급사연구소 이사이며, 엘긴 커뮤니티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인 윌리엄 A. 펠츠(William A. Pelz)가 쓴 《유럽민중사》(서해문집)은 장장 600년 동안의 유럽 민중들의 역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해 냈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펠츠가 다룬 시기보다 더 짧은 시기를 ‘자본의 시대’, ‘혁명의 시대’, ‘제국의 시대’ 3부작과 그에 더해 20세기를 두 권의 ‘극단의 시대’로 묶어 낸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자도 지적하듯이 이 책은 특유의 ‘압축성’ 덕분에 유럽 민중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적합한 책이 아니다. 서술 자체가 어렵지는 않지만, 분명 ‘사전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책이다. 아마도 그런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맥락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


1871년 최초의 노동자국가 파리코뮨 시기 민중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거둔 놀랄만한 성과는 단지 기나긴 시간을 ‘압축’한 것에만 있지 않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굉장히 많은 유럽의 나라들과 다양한 시대의 사료들을 인용함으로써 역사의 물줄기에 생생한 입체감을 더해주고 있다. 그 사료들에는 냉전시기 축적된 미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해제한 기밀문서 등의 1차 사료들을 포함하며, 다양한 ‘보통사람’들의 수기, 구술사 등을 통한 목소리를 포함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서유럽 삼국 중심의 유럽사에 대해 재고할 수 있다. 체코,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를 통해서 소련과 자본주의 서유럽 양쪽으로부터 탄압 받고 배반당한 동유럽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루터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을 넘어 중세의 다양한 사상적 변이와 저항을 알 수 있다.


1933년 1월, 나치돌격대

가 독일제국의회 건물에 방화를 한 뒤, 공산당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운 후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이 책은 ‘아래로부터의 역사’, ‘민중사’의 주역에 여성들을 당당히 등장시킨다. 그동안 역사책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조차 무시하거나 배제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책 전체에 걸쳐 꼼꼼하게 강조하며 싣고 있는 점은 아마도 다른 책들과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 하겠다. 여성들이 단순 ‘참여’했다거나 배달이나 심부름 등 ‘투쟁지원 서비스’(?) 차원에 머물렀다는 정도가 아니다. 여성들의 투쟁 없이 민중들의 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시각으로 보면,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역사학자들에게 가치 있는 주제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계급 편향과 마찬가지로 반여성 편견의 역사는 길고도 추악하다.(15쪽)


남성이 남성을 위해 남성에 관해 쓴 책들은 여성은 모두 집에서 밥만 하고 있었던 것처럼 1871년(파리코뮨) 파리의 사건들을 서술한다. 여성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오직 코뮌이 무너지던 와중에 그들이 날뛰며 방화했다는 중상모략을 통해서만이다. 여성의 반란 참여를 목격한 이들의 기술에 따르면 이런 묘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코뮌의 짧은 생존 기간에 다양한 정치클럽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이 있었다.……여성연합은 분명 코뮌 기간 중 계급의식의 가장 발전된 표현이었다.……코뮌의 급진적 여성들은 성별‧계급‧문화, 전통적 권력 배열 등의 비판을 위해 투쟁했다.(pp.158~159)


이 책은 역사가 단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역사는 부침(浮沈)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 와중에 민중들은 생존조건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평균신장, 평균수명까지도 후퇴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대로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어떤 때는 잔잔하고 평화롭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사나운 격랑으로 돌변”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변덕’(?)은 객관적 조건만으로도, 주관적 의지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파시스트 프랑코에 맞선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여한 국제여단 소속 중국인들


한편, 이 책은 서구의 역사, 지배계급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함께 가르쳐주고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도식적인 20세기 역사에 대한 설명, 예컨대, “추축국에 대항한 연합국의 전쟁수행을 통해 민주주의(어떤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고, 극우와 극좌를 제외시킴으로써 전후 계급타협에 기초한 수정자본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지고 있는 편협함과 지적 태만 말이다.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의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 영국에게는 반파시스트 투쟁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반공산주의 투쟁이 중요했고 그런 점에서 파시스트와의 연대가 필요했다. (따라서 냉전의 시작은 더욱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소련 역시 지배체제의 존속을 위해 수많은 공산주의 동지들을 죽음의 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연합국은 독일 내 반파시스트 저항 세력인 노동자들의 주거지에 융단폭격을 가했고,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을 포함한 반파시스트 대오를 고립시켰다.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대당하는 위로부터의 지배의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36년 나치의 베를린올림픽에 대항해 사회주의 성향 ‘스포츠 인터내셔널’이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개최한 노동자 올림피아드(Worker’s summer Olympiade) 포스터. 17개국 2만7천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계급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경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옳은 방향성과 과학적 방침도 실천하는 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를 위한 주체의 지난한 실천이 불꽃같은 고양기의 외침보다 주목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들이 하나하나 켜켜이 쌓일 때 계급의 역사가 되고, 계급의식이 되며, 공통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선배 노동자들은, 그리고 아시아의 노동자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투쟁과 연대의 경험을 쌓아 왔을까? 유럽 민중들의 600년 투쟁의 역사를 돌아보며 아시아 민중들의 경험을 아우르는 책 한권 제대로 없는, 아니 한국 민중들, 한국 노동운동의 통사조차 없는 우리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스탈린과 코민테른 지도자이자 불가리아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오른쪽). 그는 유고슬라비아으 티토와 함께 소련에 자주적인 연방공화국(발칸연방)을 만들고자 했다. 1949년 급서했는데, 소련의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다. 1933년 독일제국의회 방화범으로 억울하게 지목된 바 있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간에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이룩한 현재의 삶의 조건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인 것도 아니다. 저자가 강조하듯이 예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대부분 그들이 이제껏 싸워온 덕택”(393쪽)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투쟁으로 제 길을 열어 간 보통사람들이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44쪽) “많은 경우 보통사람들은 패배했다.……(그러나) 일단 민중이 투쟁하면 거대한 진보를 이룰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그들이 무관심이나 절망에 빠져든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이상과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민중은 패배한다는 사실”이다.(394쪽)


다수가 만들어 낸 거대한 변화의 바다에 뛰어들기 바란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에릭 윌리웜스/우물이있는집/2014년5월/24,000원
《이탈리아 현대사》/폴 긴스버그/후마니타스/2018년2월/33,000원
《암흑의 대륙》/마크 마조워/후마니타스/2009년5월/23,000원
《티토》/재스퍼 리들리/을유문화사/2003년12월/18,000원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대부분 그들이 이제껏 싸워온 덕택"(393쪽)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투쟁으로 제 길을 열어 간 보통사람들이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44쪽) "많은 경우 보통사람들은 패배했다.……(그러나) 일단 민중이 투쟁하면 거대한 진보를 이룰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그들이 무관심이나 절망에 빠져든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이상과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민중은 패배한다는 사실"이다.(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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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민중사 - 중세의 붕괴부터 현대까지,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
윌리엄 A. 펠츠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출처 :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함께하는 품> 통권 35호, 2018년 5월호


책소개

역사의 무대에 선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유럽민중사》/윌리엄 A. 펠츠/서해문집/2018년3월/20,000원




양솔규(회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하려는 국회 움직임에 맞서 민주노총은 각 지역별로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 조금 전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가석방 되었다. 민중총궐기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한상균 전 위원장은 많은 동지들의 박수를 받으며 2년 5개월여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것이다. 중요한 싸움의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폭압적 탄압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해고는 살인이다!’ 외치며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싸움에 임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국가폭력에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한상균 위원장은 민주노총의 위원장으로서 박근혜의 퇴진을 위한 민중총궐기를 책임졌다. 6월항쟁
과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이던 2016~2017년, 역사적인 촛불혁명의 전야제의 총책임자가 한상균이었다. 단지 노동자 투쟁뿐만이 아니었다. 작년 5.18 광주민중항쟁 37주기와 올해 38주기 기념식에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 5.18 영령들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80년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바 있는 한상균 위원장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에게 80년 광주의 5월과 2009년 평택의 여름, 그리고 2015년 광화문의 겨울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상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선택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이성적 동의 혹은 감정적 호응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기억과,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 그리고 이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변이들,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의 다양한 존재조건이 버무려지고 켜켜이 쌓여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즉각적으로, 때로는 연속적으로, 때로는 단절적으로 역사의 장에 등장한다.


아마도 ‘문빠’들에게는 문재인 대통령이, ‘노빠’들에게는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맨’들에게는 3대에 걸친 이씨 왕조가 현재의 사회를 주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국사회의 ‘진보’(?)를 책임진 이들은 말없이 싸우다 죽어간, 꿈 없이 일하다 물러난, 욕심 없이 나누다가 퇴장한 다수의 축적된 노력들일 것이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부터 강조된 이러한 ‘민중사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퇴조(?), 자본주의의 첨단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퇴색되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국 ‘조직의 계보’가 집단의 역사를 해석하는, 앙상하지만 유일한 틀로 기능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중사관이 퇴조하면서 ‘운동의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개개인의 선택을 구속하던 올가미들도 사라졌다. 운동사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고, 아무렇게나 변명해도 되는(또는 변명조차 필요 없는) ‘자유로운’(?) 시대 속에 있다. 바른미래당 후보로 나가도 되고, 공공기관 이사로 가도 되고, 전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 된 것이다. 고도의 숙고(熟考)가 필요한 자력갱생(自力更生),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 오히려 개개인의 선택은 즉자적이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A. 펠츠가 자신의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와 행동의 유행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고, 또한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무력함’은 새로운 ‘노력’을 만들어 낼 것이고,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광범위한 민중들이 만들어낸 장대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시카고의 노동계급사연구소 이사이며, 엘긴 커뮤니티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인 윌리엄 A. 펠츠(William A. Pelz)가 쓴 《유럽민중사》(서해문집)은 장장 600년 동안의 유럽 민중들의 역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해 냈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펠츠가 다룬 시기보다 더 짧은 시기를 ‘자본의 시대’, ‘혁명의 시대’, ‘제국의 시대’ 3부작과 그에 더해 20세기를 두 권의 ‘극단의 시대’로 묶어 낸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자도 지적하듯이 이 책은 특유의 ‘압축성’ 덕분에 유럽 민중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적합한 책이 아니다. 서술 자체가 어렵지는 않지만, 분명 ‘사전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책이다. 아마도 그런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맥락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



1871년 최초의 노동자국가 파리코뮨 시기 민중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거둔 놀랄만한 성과는 단지 기나긴 시간을 ‘압축’한 것에만 있지 않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굉장히 많은 유럽의 나라들과 다양한 시대의 사료들을 인용함으로써 역사의 물줄기에 생생한 입체감을 더해주고 있다. 그 사료들에는 냉전시기 축적된 미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해제한 기밀문서 등의 1차 사료들을 포함하며, 다양한 ‘보통사람’들의 수기, 구술사 등을 통한 목소리를 포함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서유럽 삼국 중심의 유럽사에 대해 재고할 수 있다. 체코,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를 통해서 소련과 자본주의 서유럽 양쪽으로부터 탄압 받고 배반당한 동유럽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루터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을 넘어 중세의 다양한 사상적 변이와 저항을 알 수 있다.



1933년 1월, 나치돌격대가 독일제국의회 건물에 방화를 한 뒤, 공산당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운 후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이 책은 ‘아래로부터의 역사’, ‘민중사’의 주역에 여성들을 당당히 등장시킨다. 그동안 역사책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조차 무시하거나 배제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책 전체에 걸쳐 꼼꼼하게 강조하며 싣고 있는 점은 아마도 다른 책들과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 하겠다. 여성들이 단순 ‘참여’했다거나 배달이나 심부름 등 ‘투쟁지원 서비스’(?) 차원에 머물렀다는 정도가 아니다. 여성들의 투쟁 없이 민중들의 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시각으로 보면,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역사학자들에게 가치 있는 주제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계급 편향과 마찬가지로 반여성 편견의 역사는 길고도 추악하다.(15쪽)


남성이 남성을 위해 남성에 관해 쓴 책들은 여성은 모두 집에서 밥만 하고 있었던 것처럼 1871년(파리코뮨) 파리의 사건들을 서술한다. 여성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오직 코뮌이 무너지던 와중에 그들이 날뛰며 방화했다는 중상모략을 통해서만이다. 여성의 반란 참여를 목격한 이들의 기술에 따르면 이런 묘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코뮌의 짧은 생존 기간에 다양한 정치클럽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이 있었다.……여성연합은 분명 코뮌 기간 중 계급의식의 가장 발전된 표현이었다.……코뮌의 급진적 여성들은 성별‧계급‧문화, 전통적 권력 배열 등의 비판을 위해 투쟁했다.(pp.158~159)



이 책은 역사가 단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역사는 부침(浮沈)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 와중에 민중들은 생존조건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평균신장, 평균수명까지도 후퇴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대로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어떤 때는 잔잔하고 평화롭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사나운 격랑으로 돌변”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변덕’(?)은 객관적 조건만으로도, 주관적 의지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파시스트 프랑코에 맞선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여한 국제여단 소속 중국인들


한편, 이 책은 서구의 역사, 지배계급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함께 가르쳐주고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도식적인 20세기 역사에 대한 설명, 예컨대, “추축국에 대항한 연합국의 전쟁수행을 통해 민주주의(어떤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고, 극우와 극좌를 제외시킴으로써 전후 계급타협에 기초한 수정자본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지고 있는 편협함과 지적 태만 말이다.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의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 영국에게는 반파시스트 투쟁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반공산주의 투쟁이 중요했고 그런 점에서 파시스트와의 연대가 필요했다. (따라서 냉전의 시작은 더욱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소련 역시 지배체제의 존속을 위해 수많은 공산주의 동지들을 죽음의 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연합국은 독일 내 반파시스트 저항 세력인 노동자들의 주거지에 융단폭격을 가했고,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을 포함한 반파시스트 대오를 고립시켰다.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대당하는 위로부터의 지배의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36년 나치의 베를린올림픽에 대항해 사회주의 성향 ‘스포츠 인터내셔널’이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개최한 노동자 올림피아드(Worker’s summer Olympiade) 포스터. 17개국 2만7천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계급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경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옳은 방향성과 과학적 방침도 실천하는 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를 위한 주체의 지난한 실천이 불꽃같은 고양기의 외침보다 주목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들이 하나하나 켜켜이 쌓일 때 계급의 역사가 되고, 계급의식이 되며, 공통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선배 노동자들은, 그리고 아시아의 노동자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투쟁과 연대의 경험을 쌓아 왔을까? 유럽 민중들의 600년 투쟁의 역사를 돌아보며 아시아 민중들의 경험을 아우르는 책 한권 제대로 없는, 아니 한국 민중들, 한국 노동운동의 통사조차 없는 우리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스탈린과 코민테른 지도자이자 불가리아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오른쪽). 그는 유고슬라비아으 티토와 함께 소련에 자주적인 연방공화국(발칸연방)을 만들고자 했다. 1949년 급서했는데, 소련의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다. 1933년 독일제국의회 방화범으로 억울하게 지목된 바 있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간에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이룩한 현재의 삶의 조건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인 것도 아니다. 저자가 강조하듯이 예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대부분 그들이 이제껏 싸워온 덕택”(393쪽)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투쟁으로 제 길을 열어 간 보통사람들이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44쪽) “많은 경우 보통사람들은 패배했다.……(그러나) 일단 민중이 투쟁하면 거대한 진보를 이룰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그들이 무관심이나 절망에 빠져든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이상과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민중은 패배한다는 사실”이다.(394쪽)


다수가 만들어 낸 거대한 변화의 바다에 뛰어들기 바란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에릭 윌리웜스/우물이있는집/2014년5월/24,000원
《이탈리아 현대사》/폴 긴스버그/후마니타스/2018년2월/33,000원
《암흑의 대륙》/마크 마조워/후마니타스/2009년5월/23,000원
《티토》/재스퍼 리들리/을유문화사/2003년12월/18,000원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대부분 그들이 이제껏 싸워온 덕택"(393쪽)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투쟁으로 제 길을 열어 간 보통사람들이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44쪽) "많은 경우 보통사람들은 패배했다.……(그러나) 일단 민중이 투쟁하면 거대한 진보를 이룰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그들이 무관심이나 절망에 빠져든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이상과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민중은 패배한다는 사실"이다.(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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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양칭샹 지음, 김태성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출처 :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함께하는품> 31호 / 2017년 9월

 

 

은 것은 쇠사슬, 잃은 것은 세계 전체인 슈퍼차이나의 길 잃은 세대

 

책소개

 

양솔규(회원)

       

 

바링허우

양칭샹/미래의창/14,000/20178

 

오늘 부산교대에 갔다가 교원수급 계획 책임지라며 동맹휴업에 들어간 학생들의 플랭카드와 집회 걸게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만감이 교차했는데, 저변에 깔려 있는 인구구조의 변화가 오랫동안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와 정(), 사회(社會) 구성원 누구하나 이에 걸맞은 세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었고, 또한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들과 교대,사대 예비교사들의 대립으로 현상화되는 것에 대한 갑갑함이 자리했다.

 

학생운동도 소진되고, 노동운동의 신규조직화도 막히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 운동사회의 인력수급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의 고령화도 급격해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장벽이 높아갔고, 이제는 그 결과로 인구절벽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어느덧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계급은 흘러흘러 은퇴의 문턱에 서 있고, 저 멀리 또다시 새로운세대의 노동자계급과는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언어적, 매체적 장벽을 넘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예 젊은 연령층 인구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선거를 앞두고서나 호출되어지는 남아 있는 소위 ‘88만원 세대’, ‘99만원 세대들에게 헬조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화려한 21세기 첨단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허덕이고 있는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마주한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회는 변화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들 존재의 그늘에게 남은 것은 허무 밖에.

 

그런데 이러한 세대들은 반도의 남쪽 자락뿐만 아니라 대륙에도 (거대하게) 존재한다. 어떤 학자들(비버리 실버 노동의 힘, 리민치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은 중국의 새롭게 부상한 노동자 세대들이 담지하고 있는 어떤 미래의 가능성(세계혁명?)을 논리적으로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당사자들도 그렇게 느낄지는 의문이다. 중국의 문학평론가이자 린민대(人民大) 교수인 양칭샹은 80년대에 태어난 세대인 바링허우(80, 80)에 대해 분석한 책인 바링허우를 썼다. 그 자신 또한 1980년 생으로 바링허우이기도 하다. 마치 우석훈, 박권일이 88만원 세대를 썼고, 아마미야 가린이 일본 프리터를 분석해 프레카리아트 계급으로 분석했던 것처럼 중국의 바링허우는 또다른 동북아시아의 세대, 계급적 지형도를 제공해 준다.

   

중국에서는 마찬가지로 우링허우(50, 50년대생들), 류링허우(60, 60년대생들), 치링허우(70, 70년대생들), 지우링허우(90, 90년대생들), 링링허우(零零后, 2000년대생)를 구분해 부른다고 한다. 물론 그의 바링허우 계층은 단순한 세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경제적 기반에서 시작해야 하고, 바링허우의 계급적 기원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80년대생 특권계층은 분석에서 배제된다.

 

80년대는 본격적으로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시기이다. 또한, 1980‘1가구 1자녀정책이 시작되면서 소황제들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우링허우(50)들이 맞이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와, 류링허우(60)들이 맞이해야 했던 1989년 천안문사태를 떠올려보면, 바링허우들이 맞이한 세계는 얼핏 중국 역사상 최초로 풍요로움을 맛보는 행복한 세대들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선전(深圳)과 광저우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의 뒤편에는 숨죽인 농민공들의 슬럼이 즐비하다. ‘단위경제 체제가 해체되고 국가의 책임이 시장으로 옮겨지면서, 수억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거리로, 도시로, 시장으로 내몰렸다. 그래서 등장한 계급이 농민공(農民工)”이다. 농촌에서 이주해 온 도시의 하층노동자들을 일컫는 말인데, 양칭샹은 이들에 대해 노동자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라 농민+노동자인 것... ‘하반신만 얻은, 주체의식을 상실한(농민의 의식을 지닌) 노동자라는 것이다. 중국에 바링허우(80)’ 농민공(農民工)이 현재 1억 명이 존재한다고 한다. 1! 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맞이한 비정함, 냉혹함, 혼란, 허무함은 그들을 허공에 뜬 계급으로 만들어 버렸다. “농촌에는 (그들의) 농지가 없고, 공장에는 (그들의) 작업라인이 없는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엔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는 부제가 달려 있기도 하다.

 

이전 세대들은 달랐다. 우링허우(50)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역사와 삶의 역사가 일치한다.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들 세대가 직접 경험한 역사이다. 마치 우리의 386, 87년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바링허우(80)들에겐 역사는 역사고, 생활은 생활이었다. 말하자면 역사의식이 결여된 세대이다. 과연 누가 이들에게서 역사를 배제시켰는가? 역사는 사라질 수가 없다.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를 눈앞에서 소멸시키는 것은 화려하지만, 허무를 배가시키는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그렇다면 바링허우를 포함해 농민공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묻는다. 자본가와 공장주들은 농민공들을 로봇으로 교육하고 변화시키려 할 것이다. 권력과 관료들도 말 잘 듣는 국가정책의 손발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런 방식 말고 농민공들의 주제성을 각성시키고 새롭게 의식화하는 책임을 누가 질 수 있을까? 저자는 샤오즈(小资) 계급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묻는다. 샤오즈 계급은 불어로 petit bourgeoisie를 한자(간자)로 만든 것인데, 우리가 보통 맑스주의 계급론에서 얘기하는 소자본가 계급, 쁘띠 부르주아와는 약간 의미가 달라 보인다. 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로, 서양의 사상과 생활을 지향하면서 내면의 체험과 물질적, 정신적 향유를 추구하는 젊은 계층, 즉 도시 화이트칼라나 사회에서 일정한 부와 지위를 갖춘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90년대 이전의 샤오즈(小资) 계급은 그나마 허무주의 이후에 이어진 자각적 저항이 있지만, 90년대 이후의 샤오즈(小资) 계급은 소비화된 샤오즈이다. 반항의식은 거세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샤오즈 계급이 농민공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샤오즈 스스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샤오즈 계급을 교육시킬 수 있는 유일한 노동자 계급이 21세기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본다.)

샤오즈 계급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바링허우(80)의 마음속에는 샤오즈의 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의 이중 보장을 꿈꾸는 것. 현실은 이를 배반한다. 샤오즈는 마지막 구원의 지푸라기이지만, “결코 실현할 수 없고 그 꿈은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되고 만다.

바링허우(80)들에게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통로는 간헐적으로만 나타나는데, 저자 역시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언급한다. 바로 재난을 통해서이다.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던 바링허우들은 시기적으로 한정적인 재난’, 원촨 대지진(2008년 쓰촨성 대지진을 말하는 것임.) 구호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주체성과 진실한 존재감을 발견하려고 한다. “재난이라는 모진 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화해하는 과정은 그러나 오래갈 수 없다.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 개인의 해방도 제한적이다. 샤오즈의 꿈에서 깨어나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불합리한 자본 분배와 이윤의 착취에 대한 인식으로 각성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샤오즈(小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역사적 동맹을 결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평론가답게 위와 같은 분석을 중국의 수많은 현대문학 작품들을 통해 분석한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는 다양한 출신, 다양한 계층의 바링허우(80)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해외유학을 다녀온 87년생 여자 바링허우, 80년생 중소기업 사장 남자 바링허우, 81년생 공장 여성 노동자 바링허우, 82년생 남성 공장 노동자 바링허우, 공산당원이자 국영기업 80년생 남성노동자 바링허우 등이 그들이다. 이 인터뷰들은 다양한 바링허우들이 실제 경험하고 있는 중국의 물질적 지형과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책이 중국 노동자들과 바링허우들의 모든 현실을 보여주진 못한다. 중국공산당의 언론통제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바링허우(80), 지우링허우(90)들의 거대한 파업의 물결 역시도 어쩌면 거대한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단말마적 함성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2010년 푸스캉(富士康, 폭스콘, Foxconn : 애플 아이폰을 만드는 대만계 제조사)의 연쇄 자살사건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바링허우(80), 지우링허우(90)들의 벼랑에서 외친 마지막 절규일지도 모른다.

 

풍요와 화려함 속에서도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한중일 세 나라의 젊은 세대들이 함께 어깨 거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일 지도 모르지만, “() 속에서도 실()을 찾는노력은 계속되어야 하겠다. 계급이 사물이 아니라 관계라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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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저널리즘 - 한국 언론의 지형을 바꾼 언론인
정철운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출처 :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2017년 가을호 / 통권 45호


책담(冊談)

저널리즘에 시선집중을! 언론자유에 연대를!


《손석희 저널리즘》/정철운/메디치/2017년6월/15,000원


양솔규(편집위원장)


며칠 전 볼 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우선 짐을 우체국에서 부치게 되었다. 한참 포장하고 있는데 낯익은 남자가 내 앞에서 자신의 소포에 주소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슬쩍 훔쳐보니, “아! 노/종/면! 기자!”가 아닌가. 쪽팔림을 무릅쓰고 YTN 복직 축하인사를 건네며 사인과 인증샷을 요청했다. 해고된 지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기도 했고, 사실 작년부터 그에게 불어닥친 수많은 일들, 해직기자들을 다룬 영화 <그들이 없는 7년> 개봉, YTN 사장 공모 등, 감정적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 작년 연말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딸의 편지를 들으며 담담하게 심경을 밝히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생각나기도 했다.



사실, 나의 아버지 역시도 해직기자 출신이다. 74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75년에 해직되었다. 그래서 MB 정권 들어 일어난 기자들의 대량 해직사태가 남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손석희도 학창시절 동아일보 백지광고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언론계의 거목 故 송건호 선생은 당시 후배 기자들을 자기 손으로 자를 수는 없다며 편집국장을 사퇴하고 스스로 동아일보를 나왔다. 송건호 선생은 후에 “대책 없는 실직은 현기증을 일으키는 공포였다”고 했다. 아마 노종면 기자를 비롯한 수많은 해직기자들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그들은 9년이라는 시간을 이겨내었고, 드디어 자신의 고향 같은 곳 YTN에 복직했다.(사무실 위치는 상암동으로 달라졌지만) 이들의 복직에는 물론 그들의 꺾이지 않은 양심과 멈추지 않은 투쟁이 있었지만, 박근혜 탄핵 촛불항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겨울을 경과하는 긴 여정의 처음과 중심에 JTBC 뉴스룸, 이를 진두지휘하는 손석희가 있었다.


때는 1989년 또는 1990년. 장소는 경희대학교 크라운관. 서울 지역의 노동조합 노래패들이 모여 연합공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연히 경찰은 원천봉쇄를 했고, 사람들은 개구멍을 통해 속속 공연장에 들어왔다. 서울지하철 노래패, 서울대학교병원 노조 노래패 등 십여 개의 노래패들이 모였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MBC 노래패 <노래사랑>에 쏠렸다. MBC 노래패를 대표해 손석희 당시 조합원이 마이크를 잡았고, TV에서 매일 듣던 낯익은 목소리로 그가 ‘동지!’들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 (나를 포함하여) 관객들은 모두 “꺅!”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를 불러주던) 정은임 아나운서도 MBC 노래패의  멤버였다고 한다. 손석희는 이후 1992년 파업투쟁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고, 후에 함께 구속되었던 정찬형PD(현 tbs 사장)와 손잡고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만들었다.


《손석희 저널리즘》은 언론비평지 <미디어오늘>의 정철운 기자가 썼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미디어오늘>의 또다른 조윤호 기자가 쓴 《나쁜 뉴스의 나라》를 읽었었다. 사실 그 전엔 언론에 대한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급속하게 변모한 한국 언론지형의 변화에 대해 알게 되었고, 단순히 MB 정부 등 보수정부의 언론탄압 때문만이 아니라, 언론(노동)운동이, 대중들이 이 변화의 지점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가 이러한 언론지형으로 현상화 되었다는 지적에 대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독자들의 외압”이 언론운동의 버팀목이라는 ‘당연한 생각’의 의미를 깊게 깨닫게 되었다. 그 책을 읽은 지 한달 뒤인 10월24일, 최순실 태블릿 PC 입수 보도가 터져 나왔다. 그전까지는 TV도 없었지만, 손석희가 있다 하더라도 JTBC 뉴스룸을 본 적이 없었다. 이날부터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뉴스룸을 계속 챙겨보면서, 논조뿐만 아니라 다른 지상파 방송과 차별되는 진화된 저널리즘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철운 기자의 《손석희 저널리즘》은 현재의 언론지형과 그 중심에 있는 손석희의 저널리즘에 대해 ‘시선집중’ 했다. 이 책은 손석희 개인에 대한 책이면서, 동시에 손석희 개인을 넘어서 언론개혁운동, 언론노조운동, 저널리즘, 한국사회의 모든 이슈들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손석희는 MBC에서 수많은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고, 때때로 예능과 심지어 <뽀뽀뽀>까지 출연한 바 있다. 사실 나는 허수경과 함께 진행했던 <생방송 아침만들기>에서 손석희의 깨알 같은 재치와 혼을 빼놓는 유머감각에 감탄했었다. (군대 제대 시절 보초를 서면서 허수경의 자서전 《허수경의 미소 한 잔 눈물 두 스푼》을 읽었는데, 그 책에는 허수경이 손석희의 유머 때문에 진행을 못했었다는 일화가 적혀 있다.) 아무튼 손석희에게 MBC는 고향 같은 곳인데, 지금 그의 고향은 초토화가 된 상태다. 그리고 그 싹은 손석희가 MBC에서 그의 분신 같았던 프로그램 <MBC 100분 토론>(2002~2009년), <MBC 라디오 시선집중>(2000~2013년)을 진행할 때도 보였었다. (그는 2006년 이미 MBC를 사직했었다.) 최근 밝혀지고 있듯이 그가 <시선집중>에서 하차하게 된 것 역시 전임정부 MB와 임기를 시작한 박근혜 정부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석현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여 MBC를 떠나 JTBC에 둥지를 틀었다.


손석희의 저널리즘은 “중립성”에 기초해 있지 않다. 그의 저널리즘은 기계적 균형을 넘어 진실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는 매서우며,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 역시 권력(MBC, KBS)이지만, 말을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권력의 자원이다. 그의 저널리즘은 또한 “맥락 저널리즘”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미 사람들은 낮시간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대부분의 언론 콘텐츠를 소비해 버렸고, 그 사람들에게 방송뉴스가 제공해 주는 뉴스는 콘텍스트(맥락)여야 된다. 따라서 기사 하나당 시간이 길 수밖에 없고, 방송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모든 뉴스를 나열하기 보다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이다. JTBC 뉴스룸은 손석희 저널리즘의 핵심인 “맥락 저널리즘”이 구현된 작품이다. 무엇보다 손석희의 저널리즘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과 치유를 지니고 있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정국에서 그는 고인이 된 민간 잠수사 김관홍 씨를 불러냈고, “어두운 밤을 함께 걸어갈 수많은 마음들과 함께 새해, 새날이 기다리고 있다”며 시청자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공감과 치유의 언어는 ‘앵커브리핑’을 통해 나왔다. 기계적 중립이 아닌, 앵커 스스로가 뉴스를 분석하고 발언했다. 시청자들을 위한 ‘품격’과 ‘공정성’이 홍석현에게 받아낸 그의 유일한 요구였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시청자들 역시 손석희에게 듣고 싶은 것은 뉴스 그 자체보다는 손석희 “입을 통해 듣는 뉴스”일지도 모른다.


뉴스룸은 여러 가지로 다른 채널의 뉴스와는 차별적이다. 가장 큰 것은 기자들과 앵커 간의 실시간 대화이다. 기자들로서는 피가 마르겠지만 시청자들에겐 보다 생생한 현장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자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함은 물론이다. 손석희야말로 생방송의 강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또한, ‘팩트체크’, ‘앵커브리핑’은 손석희 저널리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코너이다. 대선 토론회 당시 홍준표의 볼멘소리를 바로 팩트체크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또한 JTBC 뉴스룸은 달라진 언론환경에 적극 대응했다. 전체 내용을 AOD로 공급하고, 포탈에서 생중계 되며,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 소셜라이브를 진행한다. 당연히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는 고정형 TV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뉴미디어에 의지하는 20-49 세대들에게 JTBC는 접근성이 좋은 것이다. 자연히 뉴스와 시사코너 뿐만 아니라 예능과 드라마 시청률까지 동반상승한다. 이것이 MB 시절 이후 우리가 경험한 달라진 언론환경이다. 자연히 공영방송(지상파 3사) vs 종편4사 프레임(2009년 미디어법 투쟁 당시 프레임)은 깨졌다. 그리고 ‘엠빙신’이라고 표현되는 지상파 의존도는 점차 하락했다. 손석희가 JTBC로 향할 때 진보운동 쪽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말이 터져 나왔다. “개인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라든가, “한계가 뚜렷. 패배할 것”이라든가 하는 말들이 그것이다. JTBC는 패배해야 했다. 손석희도 패배해야 했다. 언론논조는 소유구조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한 것은 반대였다. 모든 방송이 삼성의 문제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때 JTBC는 故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스튜디오에 초대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이슈를 꾸준히 보도했다. 손석희는 세월호의 어젠다 키퍼가 되었다. 유가족들은 저녁마다 대형 모니터에 JTBC 뉴스룸만 틀었다. 홍석현은 결정적 순간마다 손석희를 지켜냈다. 물론 “홍석현의 신의는 그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소유구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선택지들에서 그는 상식을 깼다. 홍석현은 대신 조선일보를 능가하는 의제선점능력을 손석희를 통해 얻었다. 손석희는 공정언론의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메꿨다. 형편없는 시청률과 영향력 1%에 머물던 JTBC는 가장 공정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되었고, 기자들의 자부심은 다시 취재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Coldplay의 음악이 엔딩곡으로 나오는 JTBC 뉴스룸의 “도회적 취향”은 20~49세대들을 매료시켰다. 엔딩곡은 뉴스룸이 끝난 후 실검순위에 랭크된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손석희의 JTBC와 tvN에 만족하고 있을 것인가?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굳이 지상파를 봐야 될 이유는 없다. 이낙연 총리도 잘 보지 않는다고 답변하지 않았는가? “지상파 뉴스 독점 구조 해체는 지상파가 자초”했다. 그렇다면, 뉴미디어나 새로운 채널에 접근하기 주저하거나 어려운 수많은 저소득층, 고령층, 시골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저 ‘나쁜 뉴스’와 ‘막장 드라마’만 공급받으며 살게 내버려 둘 것인가?


며칠 전 아버지께서 이런 카톡을 보내셨다. “손석희 MBC 사장설 있드만”. 이를 들은 지인들 중 일부는 적극 반대했다. 그가 MBC에 가게 되면 JTBC도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MBC에서도 실패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논리였다. 글쎄. JTBC 내에서 ‘손석희 없는 손석희 저널리즘’의 시스템화가 지금 충분치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공영방송, 지상파는 민영방송 JTBC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반드시 되찾아야 할 진지이다. 더군다나 내부 구성원들이 눈물겨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석희 사장설은 의미심장하다. 손석희가 JTBC로 옮길 때 ‘개인의 힘’이 지닌 한계를 얘기하며 냉소를 보냈지만, 지금 시점에서 만약 손석희가 MBC 사장을 맡는다면 그런 냉소를 보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손석희는 마지막 시선집중 클로징멘트에서 “최선을 다해서 제가 믿는 정론의 저널리즘을 제 의지로 한번 실천해보고, 훗날 좋은 평가를 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그는 그의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정철운 기자는 말한다. “손석희가 JTBC를 떠난다면, 종착점은 MBC다”. 손석희 스스로도 자신은 몸이 가볍다고 말한다.

물론 JTBC의 약한 고리인 ‘사주’의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손석희의 저널리즘은 시스템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노동조합’이다. 손석희 역시 1992년 《말》지 인터뷰에서 “왜 노조를 하는가,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노조를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습니다. 직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식, 소시민적 도덕성을 지키려고만 해도 노조 활동은 불가피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노동조합은 중앙일보-JTBC 공동의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상급단체가 언론노조가 아니다. 여기서 저자는 언론노조에 대한 고언을 게진한다. 지상파 3사 시대가 저물고 포털과 유튜브, 콘텐츠 중심 체계, 매체로서의 스마트폰 등 변화된 언론환경에도 불구하고 언론노조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만 매달렸다는 것이다. 종편 자체를 원천 부정하면서 노조 조직화 등에는 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내외부의 힘을 모아 공정방송을 지켜낼 수 있는 진지를 만들어야 한다. 종편 내부투쟁에 연대하고, 노동조합의 설립과 강화를 통해 내부 체질개선을 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편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결국 길은 이것 밖에 없다는 거다.

또한, 달라진 제작시스템 속에서 방치되어 온 언론 내 비정규직 조직화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작 외주화 비율이 매우 높은 상황, 언론 내 비정규직이 높은 상황은 당연히 언론노조의 교섭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결국, 민영방송 JTBC의 공정언론 사수와 MBC 공영방송의 공정언론 탈환은 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 시청자들, 시민들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윤호 기자는 《나쁜 뉴스의 나라》에서 “기사 삭제 요구에 시달리는 언론들로 하여금 ‘이러면 독자들한테 욕 먹는다’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달라는 말이다. 뉴스 소비자들이 뉴스를 제대로 읽을수록 언론은 발전한다. 권력의 정점에 소비자가 있는 것,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검열 아닐까.”라고 말했다. MBC노조 창립선언문은 “국민들은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실 권리가 있듯이 건전한 방송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국민들이 ‘건전한 방송’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구성원들만 사측과 권력의 탄압에 맞설 수 있을까? 언론자유를 지키는 것은 시민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기자는 아니다. 그러나 저널리즘은 기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저널리즘에 시선집중을, 언론자유에 연대를! 그동안 ‘무한도전’을 지켜냈고, ‘PD수첩’을 지켜낸 이들, 숨죽이며 온갖 모멸감을 버텨낸 그들에게 냉소 대신 ‘연대’의 손길이 절실하다. 언론자유는 나의 일이다.


이 책은 짧게는 지난 1년, 길게는 MB 정부 시절부터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놨다. 그리고 우리가 평소 궁금해 하는 문제들, 예컨대 “홍석현이 손석희를 어떻게 꼬셨을까?”, “홍석현은 왜 중앙미디어그룹의 경영에서 물러났을까?”, “향후 손석희의 행보는?” 등등에 대한 답도 들어 있다. 그리고 탄핵국면에서 언론계의 숨은 비화, 예컨대 세월호 인양시 하늘에서 찍은 항공영상을 JTBC에만 판매하지 않은 MBC의 쪼잔함 같은 숨은 뒷 얘기 역시 풍부하다. 궁금하신 분들은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아울러, 아래의 자료도 함께 보기를 권한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영화 스포트라이트> : 보스턴 글로브 내 탐사보도팀에 대한 이야기
-영화 <굿나잇 앤 굿럭> : 메카시즘을 끝장 낸 앵커 에드워드 머로에 대한 이야기
-미국드라마 <뉴스룸>
-임명현 <2012년 파업 이후 공영방송 기자들의 주체성 재구성에 관한 연구>, 성공회대 대학원
-임명현 <나는 왜 MBC 잔혹사를 연구했나> (저자인 정철운 기자가 MBC 로비에서 임명현 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고문피해자처럼 두리번거렸다는 언급을 듣고는 임명현 기자가 일련의 연구를 진행하면서 초토화된 MBC 내부의 민낯을 드러냈다.)



손석희가 JTBC를 떠난다면, 종착점은 MBC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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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 더 가난해지지 않기 위한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지음 / 문예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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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할 수 없는 삶을 위한 사회적 경제

양솔규(회원)

출처 : 평등사회교육원 <함께하는 품> 제30호  2017년7월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우석훈/문예출판사/14,800원/2017년5월



《함께하는 품》이 벌써 30호를 발간한다. 많은 사람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결과물이다. 100쪽이 넘는 분량을 유지하면서 한 호 한 호 내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다. 박근혜 시대에 우리의 고민이 오롯이 담겨 있다. 때론 정세를 꿰뚫는 논문이 실리기도 하고, 다양한 주제의 필진들이 세태를 분석해 주기도 하며, 회원들의 일상사가 담겨 있기도 하다.

오랜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대통령도 탄생했다. 지금까지의 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거라는 기대감도 상당하다. 그만큼 이전 정부들의 ‘적폐’로 인한 피로감이 상당했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거의 모든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를 둘러싼 환경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한국은 더더욱 ‘불황’의 터널에 막 진입했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작은 한국의 내수경제는 글로벌 불황에 막혀 있고, 수출산업들은 격해진 글로벌 경쟁과 중국의 수정 전략,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등으로 인해 압박 받고 있다. 바야흐로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겪었던 ‘장기 불황’ 시대가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이러한 외적 조건 때문에 피폐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오류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은 1980년대 초 아프리카 대륙을 덮친 가뭄과 대규모 식량부족 사태를 ‘민주주의’의 유무에 따라 분류해 분석했다. 군부독재 하에 있던 에티오피아는 GDP의 46% 국방력에 충원했고 그 결과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아사(餓死)했다. 반면, 보츠와나는 에티오피아보다 더 단위생산량이 낮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았다. 정부가 직접 식량을 통제하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 줬기 때문이다.
‘장기 불황’이라는 조건은 물론 구조적 제약이기는 하지만,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제약은 아니다. 부동산에 묶이고, 사교육에 묶여 있는 막대한 부(富)는 경제활성화와 구조개혁의 마중물이 될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 5년은 신자유주의가 싸지른 ‘똥’을 치우는 (속죄의) 기간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씨 뿌리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2015년11월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국제협동조합연맹 총회 및 회의

어찌 되었든,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모르는 ‘불황’의 ‘터널’로 들어선 지금, 사람들의 불안감에 화답한 책이 있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쓴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가 그것인데, 이 책의 부제는 ‘더 가난해지지 않기 위한 희망의 경제학’이다. 요약하자면, ‘불황 10년’의 시기에 들어선 한국 경제에서 ‘생존’, 즉 살아 남기 위해, 삶의 조건이 후퇴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 경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년 10월에 발간된 전작  《살아 있는 것의 경제학》(2016년10월)을 통해서는 청년들을 특화해서 ‘생존’의 방법을 제시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일반적인 ‘생존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책 제목의 ‘좌우’를 넘어선다는 언급은 뜬금없다. 오히려, ‘더 가난해지지 않기 위한 사회적 경제’ 라는 식의 제목이 더 어울린다. 아무튼.)



전후 30년 ‘대압축의 시대’, ‘전후 호황’이 지나간 후, 미국의 뉴 이코노미, 동아시아 위기, 한국의 IMF 경제위기, 급기야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쳤고, 저성장이 고착화되는 ‘뉴 노멀 New Normal’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협동조합도 그랬고, 다른 사회적 경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어려울 때 이러한 ‘연대’의 ‘경제공동체’를 떠올리곤 했다. 말하자면 ‘가난 위에 피어난 꽃’이 사회적 경제이다. ‘L자형 경제위기’ 상황에서 ‘시장’과 ‘국가’에 기댈 수 없으니,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가 꽃피는 것이다. 물론 ‘시장’과 ‘국가’처럼 익숙하지는 않다. 그러나 점점 더 ‘사회적 경제’는 우리 곁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다. IMF 경제위기와 함께 시작된 김대중 정권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했고, ‘자활급여’라는 항목이 포함되었다. 많은 실업자가 양산되던 시기, 자활센터들이 생겨났다. 생협법이 제정되면서 생협에 대한 제도적 정비도 이루어졌다.
노무현 정부 때는 ‘사회적 기업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다. 고용 없는 성장이 회자되면서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암묵적 동의가 퍼져 나갈 때였다.




 


사기꾼 이명박은 ‘광우병 데모’ 행렬에 자리잡은 ‘생협’의 깃발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 그리고는 바로 세계 금융위기를 맞았다. 그러다 임기 후반, 2011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졌다.

한국 생협 조직의 변천

박근혜 시기, ‘배신자’ 유승민이 발의한 ‘사회적 경제 기본법’은 레이저 광선으로 인해 통과되지 못했다. 유일하게 사회적 경제와 관련해 아무 것도 만들지 않은 정부가 박근혜 정부다. 가만히 있어서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분명하지는 않다.



저자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한 사람들이 ‘무작정 창업’하기보다는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전환의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1%에 불과한 사회적 경제의 비중을 적어도 3% 이상으로 늘리고(유럽은 10%), 커져야 ‘경제 휴머니즘’이 지속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구체적 형태로서 그는 다양한 예를 제시한다. 아파트 협동조합(주택 협동조합)을 통해 값싸고, 실용적인 주택이 만들어 질 수 있다. 매입형 임대주택 정책과 주택협동조합을 연결하는 방식도 제시한다. 반려동물 병원과 반려동물 보험 같은 새로운 영역도 협동조합 형태로 만들 수 있다. 에너지 사업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태양광 시공은 사회적 기업이 맡고, 이를 유지, 관리하는 업무는 협동조합이 맡을 수도 있다. 그밖에 로컬푸드 활성화와 (개신교) 교회 내 생협 매장의 확산 등도 지역경제를 살리는 바람직한 방식이다. 아울러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는 ‘저임금 일자리’로서의 사회적 경제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조직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지속가능한 사회적 경제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사회적 경제’, ‘사람 중심 경제’ 등을 강조해왔다. 박근혜 개인(의 배신감?)으로 인해 막혀 있던 ‘사회적 경제’의 물꼬가 트이면서 법적, 제도적 조건이 크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시기가 준비기였다면, 도약의 ‘티핑 포인트’는 눈앞에 성큼 와 있다. 민주노총 지역본부별로 1본부 1사회적경제 단위를 주도해 만드는 것은 과도한 욕심일까? IMF 때와 마찬가지로 코너에 몰린 사람들, 특히 청년과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지탱해주는 사회적 보호막이 절실하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례는 아래를 참고하면 된다.


 

<더 읽어볼 책>
《협동의 경제학》
정태인/레디앙/15,000원/2013년4월


<참고>


사회적 경제에 관한 2009년 2월 19일 유럽의회 결의문
(European Parliament resolution of 19 February 2009 on Social Economy)

*총 48개항 중 일반적인 사항인 1~5항까지 소개한다.

1. 유럽 경제에서 사회적 경제는 사람을 우선에 놓는 민주적 가치를 가진 경제의 하나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사회적, 환경적, 기술적 혁신을 지원하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익성과 연대의 조화를 이루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적, 경제적, 지역적 결합을 강화하고, 사회적 자본을 생산하고, 시민들의 활동을 촉진한다.
2. 사회적 경제는 산업민주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강화하는데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모두 중요하다.
3. 사회적 경제가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발전할 수 있으려면 사회적 경제 관련 기관의 특수성과 풍부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적절한 정치적, 입법적, 경영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4. 사회적 경제 기업은 일반 기업처럼 똑같은 경쟁의 규칙을 적용받아서는 안 된다. 사회적 경제 기업이 일반 기업과 동등한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특수한 가치를 인정하는 가운데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
5. 현재 경제에는 주주의 감시나 규제 기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기업이 존재하며, 이들로 인해 금융시장은 투기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적 경제 기업은 금융시장이 투기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기오타>

-27쪽 4줄 : 평형 => 평영

-68쪽 8줄 : 4.19 => 5.16

-85쪽 아래서5줄 : 금화을 => 금화를

-169쪽 2줄 : 부모의 뜻와 => 뜻과

-174쪽 14줄 : 협동자합인 => 협동조합인

-225쪽 아래1줄 : OECE => OECD

-282쪽 5줄 : 얼마큼 => 얼만큼


통계가 작성된 지난 6년간, 한국 중산층의 부채 증가율이 109.2퍼센트다. 무시무시한 수치다. 후보 시절에 박근혜가 ‘중산층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그런 희망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149쪽

주식회사와 달리 사회적 경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이 바로 이 의사결정의 문제다...의사 겨정은 어렵다. 규모가 커도 어렵고, 규모가 작아도 어렵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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