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민중사 - 중세의 붕괴부터 현대까지,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
윌리엄 A. 펠츠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출처 :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함께하는 품> 통권 35호, 2018년 5월호


책소개

역사의 무대에 선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유럽민중사》/윌리엄 A. 펠츠/서해문집/2018년3월/20,000원


양솔규(회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하려는 국회 움직임에 맞서 민주노총은 각 지역별로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 조금 전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가석방 되었다. 민중총궐기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한상균 전 위원장은 많은 동지들의 박수를 받으며 2년 5개월여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것이다. 중요한 싸움의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폭압적 탄압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해고는 살인이다!’ 외치며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싸움에 임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국가폭력에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한상균 위원장은 민주노총의 위원장으로서 박근혜의 퇴진을 위한 민중총궐기를 책임졌다. 6월항쟁
과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이던 2016~2017년, 역사적인 촛불혁명의 전야제의 총책임자가 한상균이었다. 단지 노동자 투쟁뿐만이 아니었다. 작년 5.18 광주민중항쟁 37주기와 올해 38주기 기념식에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 5.18 영령들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80년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바 있는 한상균 위원장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에게 80년 광주의 5월과 2009년 평택의 여름, 그리고 2015년 광화문의 겨울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상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선택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이성적 동의 혹은 감정적 호응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기억과,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 그리고 이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변이들,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의 다양한 존재조건이 버무려지고 켜켜이 쌓여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즉각적으로, 때로는 연속적으로, 때로는 단절적으로 역사의 장에 등장한다.


아마도 ‘문빠’들에게는 문재인 대통령이, ‘노빠’들에게는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맨’들에게는 3대에 걸친 이씨 왕조가 현재의 사회를 주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국사회의 ‘진보’(?)를 책임진 이들은 말없이 싸우다 죽어간, 꿈 없이 일하다 물러난, 욕심 없이 나누다가 퇴장한 다수의 축적된 노력들일 것이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부터 강조된 이러한 ‘민중사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퇴조(?), 자본주의의 첨단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퇴색되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국 ‘조직의 계보’가 집단의 역사를 해석하는, 앙상하지만 유일한 틀로 기능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중사관이 퇴조하면서 ‘운동의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개개인의 선택을 구속하던 올가미들도 사라졌다. 운동사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고, 아무렇게나 변명해도 되는(또는 변명조차 필요 없는) ‘자유로운’(?) 시대 속에 있다. 바른미래당 후보로 나가도 되고, 공공기관 이사로 가도 되고, 전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 된 것이다. 고도의 숙고(熟考)가 필요한 자력갱생(自力更生),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 오히려 개개인의 선택은 즉자적이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A. 펠츠가 자신의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와 행동의 유행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고, 또한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무력함’은 새로운 ‘노력’을 만들어 낼 것이고,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광범위한 민중들이 만들어낸 장대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시카고의 노동계급사연구소 이사이며, 엘긴 커뮤니티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인 윌리엄 A. 펠츠(William A. Pelz)가 쓴 《유럽민중사》(서해문집)은 장장 600년 동안의 유럽 민중들의 역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해 냈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펠츠가 다룬 시기보다 더 짧은 시기를 ‘자본의 시대’, ‘혁명의 시대’, ‘제국의 시대’ 3부작과 그에 더해 20세기를 두 권의 ‘극단의 시대’로 묶어 낸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자도 지적하듯이 이 책은 특유의 ‘압축성’ 덕분에 유럽 민중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적합한 책이 아니다. 서술 자체가 어렵지는 않지만, 분명 ‘사전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책이다. 아마도 그런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맥락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


1871년 최초의 노동자국가 파리코뮨 시기 민중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거둔 놀랄만한 성과는 단지 기나긴 시간을 ‘압축’한 것에만 있지 않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굉장히 많은 유럽의 나라들과 다양한 시대의 사료들을 인용함으로써 역사의 물줄기에 생생한 입체감을 더해주고 있다. 그 사료들에는 냉전시기 축적된 미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해제한 기밀문서 등의 1차 사료들을 포함하며, 다양한 ‘보통사람’들의 수기, 구술사 등을 통한 목소리를 포함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서유럽 삼국 중심의 유럽사에 대해 재고할 수 있다. 체코,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를 통해서 소련과 자본주의 서유럽 양쪽으로부터 탄압 받고 배반당한 동유럽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루터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을 넘어 중세의 다양한 사상적 변이와 저항을 알 수 있다.


1933년 1월, 나치돌격대

가 독일제국의회 건물에 방화를 한 뒤, 공산당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운 후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이 책은 ‘아래로부터의 역사’, ‘민중사’의 주역에 여성들을 당당히 등장시킨다. 그동안 역사책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조차 무시하거나 배제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책 전체에 걸쳐 꼼꼼하게 강조하며 싣고 있는 점은 아마도 다른 책들과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 하겠다. 여성들이 단순 ‘참여’했다거나 배달이나 심부름 등 ‘투쟁지원 서비스’(?) 차원에 머물렀다는 정도가 아니다. 여성들의 투쟁 없이 민중들의 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시각으로 보면,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역사학자들에게 가치 있는 주제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계급 편향과 마찬가지로 반여성 편견의 역사는 길고도 추악하다.(15쪽)


남성이 남성을 위해 남성에 관해 쓴 책들은 여성은 모두 집에서 밥만 하고 있었던 것처럼 1871년(파리코뮨) 파리의 사건들을 서술한다. 여성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오직 코뮌이 무너지던 와중에 그들이 날뛰며 방화했다는 중상모략을 통해서만이다. 여성의 반란 참여를 목격한 이들의 기술에 따르면 이런 묘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코뮌의 짧은 생존 기간에 다양한 정치클럽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이 있었다.……여성연합은 분명 코뮌 기간 중 계급의식의 가장 발전된 표현이었다.……코뮌의 급진적 여성들은 성별‧계급‧문화, 전통적 권력 배열 등의 비판을 위해 투쟁했다.(pp.158~159)


이 책은 역사가 단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역사는 부침(浮沈)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 와중에 민중들은 생존조건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평균신장, 평균수명까지도 후퇴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대로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어떤 때는 잔잔하고 평화롭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사나운 격랑으로 돌변”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변덕’(?)은 객관적 조건만으로도, 주관적 의지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파시스트 프랑코에 맞선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여한 국제여단 소속 중국인들


한편, 이 책은 서구의 역사, 지배계급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함께 가르쳐주고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도식적인 20세기 역사에 대한 설명, 예컨대, “추축국에 대항한 연합국의 전쟁수행을 통해 민주주의(어떤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고, 극우와 극좌를 제외시킴으로써 전후 계급타협에 기초한 수정자본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지고 있는 편협함과 지적 태만 말이다.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의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 영국에게는 반파시스트 투쟁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반공산주의 투쟁이 중요했고 그런 점에서 파시스트와의 연대가 필요했다. (따라서 냉전의 시작은 더욱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소련 역시 지배체제의 존속을 위해 수많은 공산주의 동지들을 죽음의 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연합국은 독일 내 반파시스트 저항 세력인 노동자들의 주거지에 융단폭격을 가했고,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을 포함한 반파시스트 대오를 고립시켰다.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대당하는 위로부터의 지배의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36년 나치의 베를린올림픽에 대항해 사회주의 성향 ‘스포츠 인터내셔널’이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개최한 노동자 올림피아드(Worker’s summer Olympiade) 포스터. 17개국 2만7천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계급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경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옳은 방향성과 과학적 방침도 실천하는 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를 위한 주체의 지난한 실천이 불꽃같은 고양기의 외침보다 주목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들이 하나하나 켜켜이 쌓일 때 계급의 역사가 되고, 계급의식이 되며, 공통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선배 노동자들은, 그리고 아시아의 노동자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투쟁과 연대의 경험을 쌓아 왔을까? 유럽 민중들의 600년 투쟁의 역사를 돌아보며 아시아 민중들의 경험을 아우르는 책 한권 제대로 없는, 아니 한국 민중들, 한국 노동운동의 통사조차 없는 우리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스탈린과 코민테른 지도자이자 불가리아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오른쪽). 그는 유고슬라비아으 티토와 함께 소련에 자주적인 연방공화국(발칸연방)을 만들고자 했다. 1949년 급서했는데, 소련의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다. 1933년 독일제국의회 방화범으로 억울하게 지목된 바 있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간에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이룩한 현재의 삶의 조건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인 것도 아니다. 저자가 강조하듯이 예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대부분 그들이 이제껏 싸워온 덕택”(393쪽)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투쟁으로 제 길을 열어 간 보통사람들이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44쪽) “많은 경우 보통사람들은 패배했다.……(그러나) 일단 민중이 투쟁하면 거대한 진보를 이룰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그들이 무관심이나 절망에 빠져든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이상과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민중은 패배한다는 사실”이다.(394쪽)


다수가 만들어 낸 거대한 변화의 바다에 뛰어들기 바란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에릭 윌리웜스/우물이있는집/2014년5월/24,000원
《이탈리아 현대사》/폴 긴스버그/후마니타스/2018년2월/33,000원
《암흑의 대륙》/마크 마조워/후마니타스/2009년5월/23,000원
《티토》/재스퍼 리들리/을유문화사/2003년12월/18,000원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대부분 그들이 이제껏 싸워온 덕택"(393쪽)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투쟁으로 제 길을 열어 간 보통사람들이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44쪽) "많은 경우 보통사람들은 패배했다.……(그러나) 일단 민중이 투쟁하면 거대한 진보를 이룰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그들이 무관심이나 절망에 빠져든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이상과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민중은 패배한다는 사실"이다.(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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