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 - 미래는 과거에 있다
장석준.우석영 지음 / 책세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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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2020년(가을호, 통권57호)


책담(冊談)


과거에서 찾은 미래, 명쾌한 행동지침으로!


양솔규 / 편집위원장


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장석준, 우석영/책세상/20198/16,900

 

90년대 후반, 스웨덴 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그녀는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라다크라는 지역을 방문했는데, 온화한 가족공동체를 기반한 유목 사회를 자세히 살피는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주었다. 예를 들자면, 과거를 극복한 현재, 현재의 모순을 극복한 미래, 이런 식의 직선형 시간에 기반한 근대적인 계몽 사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그것이다. 여성의 권한이 강한 유목 사회의 가족구조, 생산소비의 순환시스템, 생태학적 균형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 등은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단초들을 제공해 주었다. 오래된 과거에서 미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 책제목의 역설은 다음의 책에서 다시 등장한다. 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이 그것이다.

 

이 책에는 총 30명의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 땅에 살았던 한국인(조선인)도 있고, 저 멀리 남미나, 유럽의 사람도 있다. 비교적 오래 전인 20세기 전반기의 사람도 있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사람도 있다. 서른 명의 사람도 적은 숫자는 아닌데, 그들의 사상을 한 책에 담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이 책은 그들의 방대한 사상을 성공적으로 소화시켜 요약해 준다. 그런데 우리가 참조할 만한 서른 명의 사상가들을 마구잡이로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사상가들을 한 큐에 엮는다면 다음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진보정치가 추구해야 할 생태 사회주의의 내용과 방도아마도 한국(조선)의 정치가, 혁명가들을 등장시킨 것은 이러한 실천이 다름 아닌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이 벌여 나가야하기 때문일 테고, 다소 생소한 생태주의 사상가들은 전지구적 기후위기가 작금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 역시 이러한 위기를 부추긴 당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랠프 밀리밴드의 이중 민주주의나 노먼 토머스가 벌인 미국에서의 진보정당 운동은 실천 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지침 같은 것이다.


이 책에는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과 관련한 선구적인 사상가 앙드레 고르(Andrè Gorz)도 소개하고 있다. 고르가 보기에 생산과정의 자동화가 직접적인 개별 노동의 소멸을 가져오면서 임금노동 없이도 가능한 소비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은, ‘생태주의적 사회 전환 비전과 결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사회당 운동가 노먼 토머스(Norman Thomas)도 말년에 주목했다. 1963년 토머스는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소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뉴딜식 복지를 넘어 모든 시민에게 충분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생소한 사상가들도 몇 명 등장한다.

안데스의 체 게바라, 남반구의 그람시로 불리는 페루의 사상가이자 페루사회당을 만들과 활동한 운동가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José Carles Mariátegui)” 이다. 마리아테기는 인디오 농민들을 중요한 변혁의 주체로 상정하면서, 그들의 농경공동체의 공유와 협동의 전통이 자본주의 이후의 씨앗이라 주장한다. 마치 마르크스가 러시아 농촌공동체가 탈자본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봤던 것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라 할 수 있다.

 

독일에서 활동한 구스타브 란다우어(Gustav Landauer) 역시 생소한 사상가다. 아나키스트인 그는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희생당하고 만다. 어쨌든 그의 독창적인 점은 진보사관을 비판하면서 인류가 돌아가야 할 질서를 농촌공동체, 자치도시, 장원과 길드 같은 중세의 질서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과학기술 만능주의국가 숭배에 경각심을 갖게 한다. 그는 역사 속 특정한 원인이 특정한 결과를 낳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면서, 과거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역사의 기나긴 사슬 중 맨 끝 고리가 변하면 과거의 사슬 전체가 바뀐다고 본다.

과거 자체가 미래다. 과거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과거는 항상 생성되는 중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과거는 늘 변화하고 형태를 바꾼다.”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을 가장 축약해 주는 사상가는 구스타브 란다우어일 것이다.

 

제임스 러브룩과 마찬가지로 지구를 하나의 가이아(Gaia, 대지의 여신)로 보고 박테리아가 가이아의 인프라며, 지구를 스스로 자율 조절하는 생물권들의 시스템이라고 보는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러시아 혁명 당시 생산 현장 출신 금속노동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스탈린에 맞서 노동자 반대파로 활동했던 알렉산드르 실리아프니코프(Alexander Shliapnikov)의 노동자 통제 이론 등도 주목할 만하다. 70년대 칠레 아옌데 정권에 합류해 사이버넷(Cybernet)과 사이버신(Cybersyn)을 구축하고, 미국 CIA가 사주한 칠레 자본가들의 파업에 맞서 민중의 직접적인 경제 통제에 일조한 영국의 사상가 스태퍼드 비어(Stafford Beer)는 흥미롭다 못해 경이롭다. 과연 우리가 지나 온 20세기에 다시 훑어보고 발견해야 할 치트 키가 얼마나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삶과 실천에 빚져 다시 우리도 새로운 여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해야 할 때. 가만가만 사상의 조각들을 음미해 봐야 할 때이다.

 

<함께 보면 좋은 책과 자료>


바르테크 지아도시 감독 / 다큐멘터리 존 버거의 사계/ 2016

김윤성, 권재준 / 그림으로 이해하는 생태사상/ 개마고원 / 2009/ 12,000

장석준 / 사회주의/ 책세상 / 2013/ 9,500

이성형 엮음 /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상/ 김창민,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 창조적 마르크스주의자/ 1999/ 12,000


과거 자체가 미래다. 과거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과거는 항상 생성되는 중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과거는 늘 변화하고 형태를 바꾼다. <혁명> 1907 - 구스타프 란다우어 - P224

세상에는 억압받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처음에는 이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치 투명 인간과 같던 이들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나온다. 웅얼거림은 이내 외침이 되고 아우성이 된다. - P19

역사라는 거대한 사슬은 마지막 고리가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사슬 전체가 바뀐다는 란다우어의 역사관처럼, 지금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촛불의 승패도, 그것이 남긴 정신도 바뀐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 P231

마리아테기는 이를 인디오 농민들 사이에 잔존한 원시 공산주의라 파악했다. 그가 보기에 이는 사멸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페루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 사회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토대였다. 자본주의 ‘이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의 씨앗이라는 것이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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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선소 노동자 - 배 만들던 사람들의 인생, 노동, 상처에 관한 이야기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 코난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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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52(2019년 여름호)

 

병든 조선소와 사회를 바꾸는 용기 있는 증언

 

, 조선소 노동자/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코난북스/20194/15,000

   

       

양솔규(편집위원장)

 

지난 연대와소통(51) 책담에서는 “‘조선소 3부작을 통해 본 갈림길에 선 조선산업이라는 제목 하에 조선소와 관련된 책 3권을 다룬바 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현대조선 잔혹사, 누운 배가 그것인데, 이번 호에도 조선소에 대한 책을 다뤄야겠다. 조선소 현실에 대해, 특히 하청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중요한 책이 발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을 기록해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 조선소 노동자20175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마틴링게 프로젝트에서 벌어진 크레인 충돌 참사로 6명이 숨지고, 25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에 대한 책이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이 기획을 하고, 심리상담사, 기록노동자, 활동가 등이 생존 노동자 9명의 구술을 정리해 엮어 냈다. ‘노동절에 근무하다가 벌어진 이 참사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 뿐만 아니라 최소로 잡아 161명의 노동자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그만큼 끔직한 사고였다. 그러나 때는 박근혜가 탄핵 당한 뒤 대통령 선거가 한참 진행중인 시기였다. 사고 뉴스가 나오긴 했지만, 다른 뉴스에 가려, 또는 관심이 없어서, 놀러가느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던 듯하다.

    

책 제목은 책의 내용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 주기 마련이다. 이 책의 제목 , 조선소 노동자는 영국의 유명한 좌파 영화감독 캔 로치가 만들어 2016년 그에게 두 번째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상시킨다. 영화에서 심장병에 걸려 실직한 다니엘 블레이크는 어이없는 자본주의 관료주의의 벽에 막혀 실업급여 수급에 실패하자 복지과 벽에 ,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스프레이로 휘갈긴다. 이후 부당한 실업급여 지급 거부에 항소하지만, 심장마비가 와 결국 재판정에 서지도 못한다. 항소 법정에서 읽기 위해 그가 쓴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아왔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으며,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기 위해선, 밀려오는 수치심을 덜어내기 위해선 내가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선언해야만 했다.

    

다시 거제로 돌아오자. 왜 이 책의 제목이 , 조선소 노동자이어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 사람만이 자기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법이다. 그러나 2년 전 노동절에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또한 삼성중공업 자본 측이나 산재와 치료를 담당하는 공무원들과 의료진들도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사건 당사자인 원청인 삼성중공업은 진짜 문자 한 통, 전화고 지랄이고 아무 것도 없었고, 노동부는 모르겠고, 노동조합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힘을 행사할 기관들, 국가 기관들이 안전에 대해서 관심을 더 가져야 할 것 같아요.”(149) 노동자들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오로지 공기단축을 위해 투입하는 생산요소로만 생각하는 산업시스템 속에서 그들에게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끔찍한 산업재해 현장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목소리를 내고 난 뒤 한동안 또 악몽에 시달리고 약을 늘려야 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상존하는 조선소 노동현장과 그날의 사고에 대해서 증언했다. 더 이상 끔찍한 사고가 노동현장에서 사라지기를, 아무 잘못 없이 죽어가는 동료가 더 이상 없기를,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힘겹게 증언하는 그들의 용기는 캔 로치의 영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삼성중공업 조선소장, 과장, 부장, 법인 등은 1심에서 업무상과실치사상·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골리앗크레인 신호수와 보조 신호수, 조작 관계자 등에게는 금고에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말하자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질 사람도, 잘못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수없이 죽어도 멀쩡한 세상이다. 아무리 산재와 직업병과 노동환경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금세 꺼지고 마는 거품처럼 달아올랐던 관심은 사그라들고 만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현실의 공범에 다름 아니었다. 사회구성원들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현실이 되고, 기록이 되며, 힘이 될 수 있다. 세월호 투쟁에서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단순한 약속이 하나하나 모여 거대한 광장의 촛불로 타오르지 않았던가.

 

사고 난 이후 제가 가장 감동했던 때가 세월호 부모님들께서 자식 잃은 아픔 속에서도 계속 말씀하시는 걸 봤을 때예요. 그런 분들 보면서 저도 용기를 가져요.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같은 게 통과될 날이 오겠죠. 그러니 기록을 남겨야죠. 저는 살아 있으니까요. 불쌍한 제 동생의 인생이 이렇게 기록이라도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173)

 

사고 유가족인 동시에 부상자인 형의 다짐이 바로 증언 노동자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아마 누구라도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마치 자신이 사고 현장에 있는 듯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묘사에 두근두근한 마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고 현장 곳곳에 있던 증언자들의 눈과 기억이 카메라가 되고, 구술기록자들은 전쟁의 포화에 무너져 내린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종군기자들처럼 꼼꼼하다. 사고현장에 대한 기록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들이 각각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곳 땅끝 거제도 삼성중공업에 흘러들어왔으며, 어떤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은 쉬는 노동절날 사고 현장으로 모여들었는지, 사고 후 그들의 말 못할 트라우마와 고민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구술자들은 공통적으로 환청과 환영, 불면과 짜증, 무기력과 분노표출이 지속되고 있으며, 오로지 이들 가족들과 자신 스스로가 책임지고 있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 노동자들의 구술이라고 해서 단순하게 사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사고 구술이 아니다. 우리나라 산업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주는 생생한 고발장이다.

 

초보자들이 일을 배우면 하청회사 입장에서는 돈을 더 줘야 하잖아요. 그러기 싫겠죠. 그래서 일부러 가르치지 않고 그냥 계속 숙련되지 않은 채로 두는 거예요. 구조가 정말 구려요. 초보자들은 일을 잘 모르니까 더 느려지고 더 위험해지고요. (37)

 

그런 게 얄미운 거예요. 말로는 안전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납기일에 쫓긴다 싶으면 위에서 용접하고 밑에서는 페인트 바르고, 그러다 사고 나면 일하는 너그들 책임이다 하고. 우리가 페인트 바르려고 오는데 용접하고 있으면 작업자들끼리 싸워요. 위에서 이렇게 지시를 내려놓고는. 일은 꿀벌들이 하고 꿀 먹는 놈은 삼성이고. (239~241)

 

조선소 일을 ‘3D 업종이라고 하잖아요. 이걸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크레인 일, 조선소 일, 더럽고 시끄럽고 위험한 걸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젖어 들어서 당연하다 생각하는 거예요. (98)

 

사내하청과 물량팀, 돌관작업, 혼재작업, 계절노동, 이주노동 등을 담당했던 그 현장의 노동자들이 생생하게 온몸으로 견뎌 내면서 보고 겪었던 산업현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뿌리 깊게 비인간성이 착근되어 있다. 왜 끔찍한 사고 이후에도 삼성중공업에서, 대우조선해양에서, STX에서 똑같은 사고가 반복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구조가 기록되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제대로 몰랐던 진실……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무뎌짐과 오만함이, 혹여 노동자들의 죽음을 방조한 것은 아닐까묻는 기획자의 질문이 아리게 다가온다. 조선소를 일종의 막장이라 부르고, 세상의 끝이라 부르지만, 또 한편으론 산업의 최전선이다. 서울과 대척점에 선 그곳. 다수인 수도권의, 젊은, 비생산직 인구는 상상할 수 없는 산업현실. 그리고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날이 무뎌져 버린노동운동. 과연 이런 책이 80년대 나왔다면 어떤 파장을 불러왔을까? 이미 87년이 40년도 넘게 흘렀는데 과연 노동산업현장이 좋아졌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경상남도와 국립민속박물관이 2013년도에 펴낸 <조선소 도시, 거제>에는 이런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이 없다. 이미 당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비율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산업재해 역시 여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노동자들의 현실은 아직 과거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626) 여영국 의원실 주최로 국회에서는 , 조선소 노동자북 콘서트가 열린다. 고 노회찬 의원이 발의한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입법화하기 위한 활동도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2001~2017년 매년 평균 2,366명이 일하다 목숨을 잃었으며, 한국의 산재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로 일본, 독일의 5배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뿌리 깊게 착근되어 있다고 해서 뿌리 뽑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병든 사회에서, 병든 현장에서 몸과 마음의 병을 얻은 노동자, 그러나 그 노동자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또한 현장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나섰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낸 용기 있는 증언은 무뎌진 우리에게도 용기를 주고 있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시민건강연구소/낮은산/20187/14,000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피해노동자 지원단 활동보고서/마틴링게프로젝트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피해노동자 지원단/2019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 사고조사보고서/20188/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

조선소 일을 ‘3D 업종’이라고 하잖아요. 이걸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크레인 일, 조선소 일, 더럽고 시끄럽고 위험한 걸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젖어 들어서 당연하다 생각하는 거예요. - P98

그런 게 얄미운 거예요. 말로는 안전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납기일에 쫓긴다 싶으면 위에서 용접하고 밑에서는 페인트 바르고, 그러다 사고 나면 일하는 너그들 책임이다 하고. 우리가 페인트 바르려고 오는데 용접하고 있으면 작업자들끼리 싸워요. 위에서 이렇게 지시를 내려놓고는. 일은 꿀벌들이 하고 꿀 먹는 놈은 삼성이고. - P239

초보자들이 일을 배우면 하청회사 입장에서는 돈을 더 줘야 하잖아요. 그러기 싫겠죠. 그래서 일부러 가르치지 않고 그냥 계속 숙련되지 않은 채로 두는 거예요. 구조가 정말 구려요. 초보자들은 일을 잘 모르니까 더 느려지고 더 위험해지고요. - P37

사고 난 이후 제가 가장 감동했던 때가 세월호 부모님들께서 자식 잃은 아픔 속에서도 계속 말씀하시는 걸 봤을 때예요. 그런 분들 보면서 저도 용기를 가져요.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같은 게 통과될 날이 오겠죠. 그러니 기록을 남겨야죠. 저는 살아 있으니까요. 불쌍한 제 동생의 인생이 이렇게 기록이라도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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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질문의 책 22
양승훈 지음 / 오월의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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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통권51호(2019년3월)

책담(冊談)

‘조선소 3부작’을 통해 본 갈림길에 선 조선산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오월의봄/2019년1월/16,900원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후마니타스/2016년5월/15,000원

 

《누운 배》/이혁진/한겨레출판/2016년7월/13,000원

 

 

 

양솔규(편집위원장)

 

 

조선산업의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2018년 3분기 조선업 일자리는 2017년과 비교해 1만5천개나 감소했다. 경남 지역으로 보면, 성동조선은 860여명 중 700명이 무급휴직을 진행 중이며, STX조선은 500명이 무급휴직 중이다. 또한 RG(선수금지급보증·Refund Guarantee) 발급이 미뤄지고 있다. 이에 더해 대우조선해양을 현대중공업이 인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지역경제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조선산업은 IMF 구제금융 당시 수출에 있어 일익을 담당하면서 경제위기의 충격을 극복하게 해준 효자산업이었다. 더군다나 조선산업은 고용지수가 매우 높은 조립산업으로서 실업에 빠진 국민경제의 충격을 완충지대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최대 호황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호시절은 지나갔고 침체는 지속되고 있다.

조선산업 위기는 한국 제조업, 더 나아가 한국 경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보수언론, 그리고 수도권의 젊은 연령대를 중심으로 조선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산업은 동남권 경제, 더 나아가 수출의존적인 한국 경제에 여전히 중요한 산업이다.

어떤 산업이든 좋은 날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예측이 가능해야 하고, 먹고 살 수는 있어야 한다.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잘 하라고 경영진이 있는 것이고,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업 구조조정은 반대의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을 산업폐기물 취급”하며 공장에서, 시장에서, 지역에서 내몰고 있다.

통계청이 2018년 8월에 발표한 2018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특별시, 광역시 제외조사) 결과를 보면 경남 거제가 7%로 가장 높고, 경남 통영이 6.2%(2013년 하반기엔 1.2%였다.)로 2위를 기록했다. 군산도 4.1%에 달했다. 2018년 4월 울산의 실업률은 5.9%로 전년 동월에 비해 2.3% 증가했다. 고용위기가 닥치면서 지역을 떠난 인구를 감안한다면 조사된 실업률도 현실에 비해선 그나마 양호한 결과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고용위기, 산업위기가 가져온 고통을 노동자들에게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사무관리직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났고, 생산직의 경우 주로 공정 지연 일정을 만회하기 위해 투입되는 ‘돌관 작업’(돌파해 관철)을 맡았던 이른바 ‘물량팀’이 제일 먼저 제거되고, 본공(사내하청 정규직)이 그 다음이다. 원청은 일종의 공사대금인 일명 ‘기성금’을 후려치기 하고, 적자에 시달리는 하청업체 사장은 야반도주하기도 하고, 체불임금으로 줄소송 당하기도 한다. 중소조선소의 경우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급휴직의 터널 속에 놓여 있다. 중소조선소의 몰락은 하청업체, 선박설계업체, 선박기자재 업체 등 조선업 생태계의 동반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빅3 더 나아가 빅2(현대, 삼성)로의 집중이 정답인 양 몰아가고 있지만, 지역경제와 조선산업의 다변화를 생각한다면 강도 높은 구조조정만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연착륙’과 생태계를 보전하는 입체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2016년에 나온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와 2019년에 발간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은 조선산업에 대한 냉철한 관찰기이다. 그런데 관찰대상과 방향성이 약간 다르다. 프레시안 기자인 허환주는 2012년 창원의 작은 조선소에 위장 취업해 12일을 버텼다. 노가다와는 차원이 다른, ‘생명을 위협’하는 조선소를 경험한 기자는 6년여 간의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의 결과를 자신의 경험과 버무려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조선소의 위험한 작업환경, 산재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과 가족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깨지는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또다른 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쓴 양승훈은 대우조선에서 5년간 사무관리직으로 근무하고 지금은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산업에 대한 거시적 관찰과 전망, 조선산업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중공업 가족’의 형성과 해체, ‘중공업 가족’의 외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2001년 사상 최초 수주량 세계 1위를 차지했던 한국 조선산업. 2008년에는 전 세계 상위 10대 조선소 중 7개가 한국 회사였다. 호시절은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끝이 났다. 무역물동량이 줄어들었고, 수주량이 급감했다. 더군다나 2000년대는 한국 조선소들이 호황기를 맞아 대거 설비를 늘려갔고, 중국 조선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조선소들도 조선산업에 대한 기존의 회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재생을 추진하고 있었다. 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조선산업 설비투자 과잉은 선박공급 과잉을 낳았다. 중국경제 등으로 인한 선박 수요와 물동량의 증가보다 더 많은 생산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신원철, 2017)

 

 
2010년대 조선소들은 해양플랜트를 새로운 먹거리로 삼고자 했다. 유가가 상승하면서 엑슨 모빌 등 초국적 에너지 회사들이 심해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시추선 등 해양플랜트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현대, 대우, 삼성 Big 3는 무작정 해양플랜트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조선과는 다르게 해양플랜트의 80%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연히 사내하청 비율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원청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숙련도가 떨어지는 사내하청 노동자, 그리고 일천한 경험, 높은 외국자재 비중, 낮은 마진의 조건 속에 도전한 해양플랜트 제조는 쉽지 않았다. 내부를 ‘잘 비우는’ 것이 중요한 조선과 내부를 ‘잘 채우는’ 해양플랜트는 성격이 매우 다른 공정이었다. 공기는 길어지고, 그만큼 부담해야 할 추가비용은 늘어났다. 계약금 20%를 먼저 받고, 나머지 80%를 마지막 인도 시에 한꺼번에 받는 해양플랜트의 헤비테일(heavytail) 결제 방식과 럼섬-턴키(Lump sum-turn key, 일괄도급 계약) 방식도 위기를 부추겼다. 유가의 급락으로 인한 고객사들의 인수 연기는 엎질러진 기름에 불을 댕기는 격이었다. ‘배움’과 ‘성장’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해양플랜트의 실패는 조선업 전체의 구조조정의 도화선이 되었고, 크나큰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업의 실패에는 노사의 암묵적인 담합이 존재한다. 두 책 모두 언급하듯이, 2000년대 이후 원청 정규직들의 암묵적인 또는 공식적인 묵인 하에 사내하청과 물량팀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현장 대의원들과 현장 생산관리팀 사이에서…(이루어진) 사내하청의 확대는 정규직 노조에서 나타난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노사담합’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이다. 조선산업을 이끌었던 직접생산을 담당하던 정규직들은 생산 지원 업무로 많이 빠지기를 원했다. 산재 이후 현장복귀 시 조합원은 생산 지원 업무를 택했고, 노조는 이를 도왔다. 자연히 위험하고 힘든 일은 하청 노동자들이 맡게 되었다. 회사 역시 노무관리상의 이유로 쉽게 통제하고 쉽게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사내하청을 활용하고자 했다. 한진중공업을 보자면, 2008년 정규직 노동자 1,385명, 사내하청 노동자 3,652명 이었다. 2010년 정규직 1,093명, 사내하청 2036명으로 –1,616명이 사라졌다. 2011년 말 정규직 770명, 비정규직 501명, 2012년 말 비정규직 0명이 된다. 희망버스운동이 벌어졌던 2011년 전후로 비정규직 규모는 계속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읽다보면 저자의 의견에 갸우뚱 하는 부분도 있다. 저자는 “만약 생산직과 엔지니어 둘 중 한쪽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질문하는데 후자에 기울어진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동의의 정도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대우조선노조가 금속노조와 전노협 창립을 주도했다는 언급 등)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조선산업의 위기를 입체적으로 살핀다는 데 있다. 노동자 숙련문제와 인력배치의 문제, 임금체계의 문제, 기자재업체, 설계 업체 등 조선업종 생태계 전반에 대한 관찰이 녹아 있다. 무엇보다 조선산업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거 같다. 근거없는 낙관주의는 결국 위기를 반복하게 할 뿐이다. 해양플랜트 수주 과정에서 드러난 실책들은 한국 조선산업이 반복해서 곱씹어야 할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

《현대조선 잔혹사》는 2016년에 나온 책이다. 더구나 2012년에 저자가 12일간 위장취업을 한 경험을 생각한다면 꽤 시간이 지난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조선산업 노동자들이 마주했던 암울한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비인간적 처우와 폭력적인 갑질을 보다 보면 매일매일 ‘PD수첩’을 찍고 있는 조선노동자들의 현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전체 산업의 미래를 보더라도 이러한 ‘아래로의 경주’가 조선산업의 토대를 갉아먹고 있다. 물량팀과 사내하청의 활용은 결국 노동자 숙련의 결핍을 가져왔고,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조선산업의 위기는 당장 ‘인력 유출’을 야기하고 있다. 지금 현재는 LNG 선박 제조에 있어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가 있다고 하지만, 중소조선소가 대거 정리되면서 설계 등을 담당했던 핵심 엔지니어들의 중국 기업으로의 취업이 가속화되고 있다. 또한 2015년 이후 가장 먼저 이탈한 사람들은 “구조조정이 목표물로 삼은 근속 20년 이상의 사무직 시니어들이 아니라, 근속 10년 이내의 대리, 과장 이하 직급의 사무직 주니어층”이었다. 특히 수도권 출신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이직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조선산업의 ‘핵심인력’을 잘 지켜내고, 새로운 인력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 숙고하지 않으면 설사 호황기가 오더라도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누운 배》는 이혁진 작가가 써서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중국으로 이전한 한국의 중형조선소이다. 소설의 도입은 진수식을 마친 배가 누우면서 시작한다. 이후 회사는 원칙이 무너지고, 편법과 무사안일이 지배한다. 그러다 신임 황철주 사장이 부임하면서 조선소의 분위기는 180도 바귄다. 나머지는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한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희망을 잃었다고 해서 반드시 절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근거없는 낙관주의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삶이 지속되는 한 자포자기할 수만은 없다. 최근 빅3의 수주량이 조금 늘어난다고 해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은 없다. 양승훈 저자의 논지를 빌리자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깨져 버렸다. ‘대우가족’, ‘또하나의 가족’에서 배제된 생산직 노동자들, 사냥이 끝나자 버려진 사냥개가 되어버린 사무관리직 노동자들, 호황이 끝나자 끊어진 원하청 관계는 조선산업 내 ‘신뢰’를 무너뜨렸다. 결국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조선산업 내 사회적 주체 간에 새로운 규율과 신뢰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장, 일방적으로 한쪽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공평하게 분담하는 관행, 장기적 전망을 담보할 수 있는 당사자들간의 진지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KBS 추적60분 1236회 <무너지는 조선업, 한국판 러스트벨트의 경고>(2017년2월15일)

-다큐멘터리 <땐뽀걸즈>, 2017년, 이승문 감독

-“해운 및 조선산업의 금융화와 과잉투자”, 신원철,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017년 상반기(통권 31호)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흥청망청‘ 서사는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도시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기도 전에 비하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선은 도시와 시민들을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좀비‘로 만들 따름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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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진해.창원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김대홍 지음 / 가지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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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2018년12월, 통권50호

 

책담(冊談)

 

 

 

공간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방법

 

마산·진해·창원/김대홍/가지/201811/16,000

 

 

   

양솔규 / 편집위원장

   

 

내가 마산에 처음 와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1989) 형과 함께 내려왔을 때였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탄지 5시간을 넘겨 달린 끝에 마산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화장실을 갔는데, 너무 낡아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곤 밖으로 나왔는데 싸우듯이 소리를 지르는 경상도 사내들의 사투리들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말 하는 줄 알았다. 너무 시끄럽기도 하고 답답한 나머지, 터미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밖에서 얼굴도 모르는 우리 형제를 마중 나와 있던 사람은 대림자동차 ()건곤이형이었다. 형은 우리 형제가 어린 국민학생일 거라 생각해서 종합사탕 두 봉지를 사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고삐리둘이서 내리자마자 담배부터 꼬나물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창원에 처음 가 본 것도 그 즈음이었던 듯한데. 지금 생각해보면 명곡동, 명서동을 지났고, 창원광장과 용지문화공원, 그리고 창원대로를 따라 공단을 둘러보았다. 명곡동, 명서동의 잘 정비되어 있는 인도와 가로수, 인도 옆 파란 풀밭과 그 위에서 삼삼오오 돗자리를 깔고 삼겹살을 불판에 올리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들, 빨간 벽돌 2층집들이 도열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노동계급이 이렇게 잘 사는가?” 라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제 나는 서울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청소년기 기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마산, 창원, 부산에서 보냈다. 대략 마산에서 6~7, 창원에서 7~8, 부산에서 9~10년 쯤 보낸 거 같다. 창원은 뜨내기(?)들이 모인 도시이다. 내 가까운 주변만 보더라도, 함안에서, 경북 성주에서, 고성에서, 산청에서, 구미에서, 남해에서, 밀양에서, 창녕에서, 전북 남원에서, 서울에서 창원으로 온 사람들이다. 창원 토박이는 만나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논밭 밖에 없던 곳에 대규모 기계단지가 들어섰으니 이런 상전벽해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수도권에는 창원 같은 도시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인천공항 가는 길에 있는 서울 강서구 마곡이라는 곳은 대규모 R&D 센터와 아파트가 입주해 있는데, 불과 4년 전인 2014년에는 이곳도 논밭뿐이었다. 아직도 40% 밖에 안 지어졌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다. 경기도 고양시 삼송이라는 곳은 어떤가? 신세계 스티필드와 이케아 쇼핑몰, 대규모 세브란스 병원과 아파트 단지까지 없는 게 없다. 도시에도 생로병사가 있는 건 당연할 터이지만, 그 속도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고향과 거주지가 같지 않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고향에 대한 개념도, 또 자기 지역에 대한 개념도 또 제각각일 것이다. 태어난 곳이 꼭 자기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거주지라고 해서 소속감을 느끼는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산과 창원, 진해에 사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그 터전 위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가족, 동료들과 살아가면서 준거(準據) 지역으로서의 마창진(또는 통합창원시)을 만들어 나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마산, 창원, 진해(또는 통합창원시)와 남이 생각하는 마산, 창원, 진해가 같은 것만은 아니다. 도시는 용광로와 같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면서, 집단적 경험을 공유하고,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며, 후속세대에게 전파하고, 또 새로운 집단과 세대가 이를 반복하면서 낡은 것이 소멸하고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도시에서의 경험, 도시에서의 기억은 고정된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막 촌에서 올라와 창원 공단에 입사했던 50년대, 60년대생 남성 노동자와, 도시에서 태어나 대학에 다닌 70년대생과, 마창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90년대생 청년들의 도시 경험은 결코 같지 않다. 마산에서 고입 입시지옥을 치렀던 평준화, 또는 비평준화 세대들과, 진해에서 해군으로 복무하는 직업군인의 경험도 다를 것이다.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 시골에서 올라와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일하다가 마산에 정착한 중년의 여성과 2000년대 대학을 다니고 지금은 공무원이 된 창원의 여성 노동자의 도시 경험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산, 창원, 진해에 대해 우리의 기억은 무궁무진하고 아직 이해하지 못할 만큼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지역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지역을 잘 안다거나 잘 이해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자기 경험에 갇혀 지역의 다양한 면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삶 속에 묻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외지인을 안내하다보면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 무지 때문일 때도 있지만,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고 정보가 부족한 마산, 창원, 진해의 소중한 문화와 경관들이 안타까운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줄만한 책이 나왔다. 마산·진해·창원는 따끈따끈한 책이다. 발간된 지 한 달도 안된 책이다. 게다가 글쓴 이가 아마도 나보다 한 살 위(1972년생)인 거 같고, 마산에서 초중고를 나왔으며(마산중앙고), 진해에서 군생활을 했고, 창원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는 주로 80년대 마산에서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만이 아는 정서가 깔려 있다. 가야백화점과 성안백화점에 대한 글도 그렇고, 고입시험 커트라인 전국 1위였던 마산에 대한 추억이 그렇다. 물론 저자는 이를 극복하고자 마산, 창원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와 60~80년대 신문 기사들도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자세히 알지 못했던 여러 정보들을 집대성한 데 있다. 예를 들어 신라시대 최치원과 마산에 얽힌 여러 사연들이 그렇다. 한때 청주 생산 1번지였던 술의 도시 마산에 대한 글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술의 역사, 청주, 맥주, 소주에 얽힌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강은철의 노래 <삼포로 가는 길>의 삼포가 진해의 삼포마을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80년대 유명 듀엣 베따라기의 멤버 이혜민이 무전여행을 이곳 진해 삼포마을에 왔던 게 인연이 되어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재밌다. 나도 학창시절 이 노래를 즐겨 불렀기 때문에 눈길이 갔다. 진해 중화요리집 영해루(현 원해루)에 대만 장제스 총통이 방문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이 책은 이해하기 쉽게 깔끔한 문체로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저자의 꼼꼼한 조사와 취재에 더해 자신의 경험을 녹여 냈기에 더 돋보인다. 또 하나의 미덕은 최신 정보들을 전부 반영했다는 것이다. 2018년 여름 다시 개장한 광암해수욕장 소식이나, 출사 명소로 뜬 옛 도지사 관사 앞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창원(진해)해양공원 소개가 그것이다.

 

목포나 인천, 부산, 또는 바다 건너 산둥반도 칭다오 등을 가보면 근대 도시역사에 대한 각 도시들의 치열한 발굴 노력들을 볼 수 있고, 또 이러한 노력들이 자기 지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높은 지역애와 지역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들이 마산, 창원, 진해 각각의 경우에도 타 도시에 비해 뒤떨어져 있고, 더군다나 무리한 행정통합으로 만들어진 통합창원시는 이런 점들이 진척되는 것을 가로막고 더 꼬이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마산 토박이(토박이라는 말도 상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들이 가진 상실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무튼 통합창원시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마산과 창원과 진해는 시내버스를 타고 서로 교류를 해왔던 친숙한 단위공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1987년에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을 만들었었던 거 아닌가. 이 책은 그동안 마산, 창원, 진해의 도시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그리고 이를 타 지역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데에도 귀중한 참고점이 될 것이다.

 

여러 기관들에 책 서평이나 책 소개글을 쓰다보면 과연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저 책을 사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하는 이 책 마산·진해·창원는 꼭 사서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경험한 마산, 창원, 진해와 비교도 하고, 술자리에서 아는 체도 하고, 마창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안내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변에 이 책 소개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2000년대 비정규직의 눈으로 본 마산진해창원 도시인문학이 나올 수도 있고, 경력단절여성의 눈으로 본 도시인문학이 나올 수도 있다. 도시는 그렇게 풍요로워질 수 있다.

    

 

<함께 보면 좋은 책과 사이트>

 

*아래 책들과 블로그 등에서 마산 창원 진해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오만둥이나, 이만기 이전 씨름계의 전설 김성률에 대한 이야기 등이 있다. 아래 책 저자 중 한 사람은 극우적 입장이기는 하나, 마산에 대한 내용은 꼭 그런 관점은 아니어서 소개한다. 경남대 유장근 교수님의 책들은 현재 서점에서 구하기는 힘들다.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는 사림평생학습센터, 의창평생학습센터, 중앙평생학습센터에서 대출할 수 있다.

 

그곳에 마산이 있었다/남재우, 김영철/글을읽다/2016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유장근 외/리아미디어/2011

마산 창원 역사읽기/유장근, 박영주 외/불휘/2003

부산/유승훈/가지/20179/14,000
허정도와 함께하는 도시이야기 http://www.u-story.kr/

역사와 삶의 풍경들(유장근 명예교수 블로그) - https://blog.naver.com/yufei21


<오류 & 띄어쓰기>

-115쪽 : 1873년 => 1973년
-125쪽 : 2003년 3월 3.1 민주묘지 => 3.15 민주묘지

-139쪽 : 경복고 => 경북고(?) 경복고는 서울.

-275쪽 : 것투성이 => 것 투성이  (띄어쓰기)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 호감을 갖고서 보는 것과 비호감인 상태에서 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마산, 진해, 창원은 비슷한 위도 경도 상에 있지만 제각기 다른 매력을 뽐낸다. 실제 세 도시를 다녀보면 너무나 다른 매력에 놀랄 것이다. 마산에 와서 아귀찜만 먹지 말고, 진해에 와서 벚꽃만 보지 말고, 창원에 와서 잘 뻗은 도로만 보지 말고 그밖에 숨은 매력들도 많이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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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과 그의 시대 - 위험한 법 기술자의 반면교사 현대사
김덕련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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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담(冊談)

 

위험한 법 기술자의 반면교사 현대사

 

김기춘과 그의 시대/김덕련/오월의봄/20185/19,500

 

    출처 :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49호(2018년 9월호)

   

양솔규 / 편집위원장

 

      

이번 호의 제목은 지금 소개하는 책의 부제와 같다. 위험한 법 기술자의 반면교사 현대사! 이 부제와 같이 이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해주는 제목은 없는 거 같다.

 

특이한 점은 저자가 법 기술자라는 표현을 쓴 점이다. 보통 우리는 판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들을 지칭할 때, ‘법 기술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기술자라고 하면 법조인에 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하위 계층이라는 뉘앙스도 있고, 법조인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전문적인 자격을 갖춘 직업인이라는 상식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부당한 기준이자, ‘진리’, ‘정의등의 이미지가 덧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 기술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누군가의 주문에 따라 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만들어내는 일종의 도구적 존재로 법률가들을 보고 있는 거 같다. 그렇다면 누가 법조인들을 일종의 기술자로 고용하고 부리는 것일까? 바로 권력자일 것이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을 이용하는 법 기술자들은 공명정대하지도 않으며, 합리적이지도 않다. 개인의 출세와 욕망을 위해 반공극우체제 권력자들에게 기생해 을 수단화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구축해 온 암흑의 현대사가 대한민국의 현대사이다.

 

또 하나 특이할만한 점이 있다. 보통 현대사를 다루는 책을 보면, “87년 민주화 이후”, “876월 항쟁이 지나고등의 표현이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이 책에는 876월 항쟁과 더불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시대의 결절점으로 반복해서 언급한다. 그만큼 저자는 소위 일반민주주의, 형식 민주주의의 분기점이라고 얘기되는 6월 항쟁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도약점이 되는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중요시하고 있다. 저자는 국사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파업>(이후, 2001)이라는 책을 통해 국내외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는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지 요약한 바가 있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실장 시절의 김기춘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은 우리가 다 아는 그 김기춘이다. 그런데 이 김기춘이라는 인물은 그를 통해 한국 현대사가 거의 전부 설명될 정도로 지대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얼마나 광범위한지는,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적폐꺼리들, 예컨대 최악 인권유린에도 무죄다시 재판정 서는 형제복지원’”(2018.9.13.),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노태우 정권 기획 여부 조사”(2018.9.10.) 등 연결되지 않는 구석이 없는 걸 봐도 잘 알 수 있다.

 

김기춘은 61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후 67년 대학원 석사논문을 쓰게 된다. 석사 논문 제목은 <습관적 범인의 처우에 관한 연구: 보안처분의 도입을 중심으로> 이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보안 처분을 광범위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신 장애자의 치료 요양 시설, 음주자, 중독자 등을 위한 요양 금단 시설, 부랑자의 노동소 수용, 경향범에 대한 보안 구금 제도 등을 시급히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기춘은 유신 헌법을 기초한 사람이다. 유신 헌법은 보안 처분을 최초로 규정하였고, 이후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내무부 훈령 제410호 등이 만들어진 바 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체 강제로 끌려가 강제노동과 폭행, 고문 등에 시달리다가 500명 넘은 사람들이 사망한 사건이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방조한 사람이 김기춘의 고등학교, 대학교 1년 선배이자, 고시 한 기수 후배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박희태는 876월 당시 부산고검장이었고, 김기춘은 대구고검장을 하다가 법무연수원장으로 이동한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김기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당시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 자살한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강기훈 총무부장이 써줬다는 말도 안되는 날조된 사건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렸을까? 당시 법무부장관이 바로 김기춘이었다.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91526, 검찰은 강기훈에 대해 자살 방조 혐의로 사전 구속 영장을 발부받았다. 강기훈은 948월 만기 출소했고, 2015, 사건 발생 24년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구속 기소했던 책임자들, 법무부 장관 김기춘, 검찰총장 정구영, 서울지검장 전재기, 그리고 잘못된 판결을 내렸던 1심 부장 판사 노원욱, 2심 부장 판사 임대화, 주심 대법관 박만호 등 그 누구도 강기훈에게 사과와 반성, 참회의 말 한마디 건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8년 12월, 노태우로부터 검찰총장 임명장을 받은 김기춘

 

이 책의 목적은 한국 현대사를 암흑으로 만든 악의 축들이 어떤 방식과 과정을 통해 이를 수행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지배체제의 민낯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세력의 뿌리가 너무나 깊고 그 해악이 크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 시절, 검찰총장으로 재직시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좀과 비슷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그만큼 끊임없는 사상 투쟁, 국민의 사상 무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김기춘이 92년 대선을 앞두고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고검장 등 주요 기관장들을 초원복집에 모아놓고 관권선거, 부정선거를 획책했으나, 처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원복집에서 김기춘의 선거 부정 발언에 한 술 더 떠 맞장구를 쳤던 당시 부산지방경찰청장은 5개월 후 경찰청장이 되었고, 1997년 대선에서는 안기부 1차장으로서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북풍 공작을 주동했다. 요즘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던 영화 <공작>의 실제 사건이 바로 저 북풍 공작인 것이다. 발본색원 하지 못하면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극우지배세력의 끈질긴 생명력과 멈추지 않는 활동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문민정부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왔지만, 유신의 잔재, 군사독재의 뿌리는 광범위하고 건재하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이명박근혜 시대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방심하고 있거나, 역사를 망각하고 용서를 입에 올리는 순간 저들은 자신들의 학맥, 혈맥, 지연 등을 이용해 순식간에 상황을 역전시킨다.

 

400쪽이 넘는 분량에 빼곡한 원조 법꾸라지’, 위험한 법 기술자의 행적을 좇다보면 우리는 이번 정부가 촛불혁명의 성과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그리고 적폐청산과 제도적 변화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 꼼꼼하게 감시해야 할 필요성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유신잔재, 5, 6공 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타협하고 이와 더불어 재벌중심 경제체제를 오히려 강화시킨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가 사실은 이러한 권력에 기생하는 위험한 법 기술자들과 적폐세력의 숨통을 열어준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기춘이 제시한 노무현 탄핵 논리들은 고스란히 박근혜 파면의 정당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김기춘은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가 늦어지면서 구속된 지 1년 반 만에 풀려났다. 수많은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고문하고, 감금했던 사람,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헌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한 사람, 법의 허점을 이용해 법을 권력자의 도구로 전락시킨 사람은 지금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다. 우리가 김기춘과 그의 시대를 반추해야 할 이유는 김기춘 한 사람만의 처단을 넘어서는 문제다. 해고 노동자들과 민주화를 위해 힘써 온 사람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청와대와 결탁해 재판을 거래하고 삼권분립을 스스로 허문 사법부, 그리고 아직도 권력에 빌붙어 정치 검찰공화국의 신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검찰, 재벌과 권력자에 기생하는 수많은 로펌 등 법 기술자들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강고하다. 그들의 잘못된 행태를 반면교사 삼아 그들이 군림할 수 있었던 토양을 바꿔 내는 것, 그것이 살아남은 자, 남아 있는 자들의 도리일 것이다. 아직 촛불혁명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함께 보면 좋은 책>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폴리티쿠스

시크릿파일 반역의 국정원, 김당, 메디치미디어

역사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해방 후 한국인들은 뼈아프게, 거듭해서 되새겨야 했다..."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 이것이 어쩌면 김기춘이 자신의 삶을 통해 반면교사 형태로 한국 사회에 전한 최대 교훈일지도 모른다. 396~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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