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소감 <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 알랭 드 보통 

 

얼마 전 교보문고에 갔다가 본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가 누나 집에 놓여 있다.
맵싸한 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누나 집에 오자 책이 있다.
빵집아저씨가 줬나보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영국 런던의 항공 허브인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동안 취재를 한 결과물이다.

책의 한 쪽엔 공항에서 벌어진 사진, 책의 다른 한 쪽엔 취재글이 놓여 있다.
다시 말하면, 총 200쪽 중 사진 100쪽, 글 100쪽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쉽게 술술 넘어간다.
마치 공항을 지나치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처럼 말이다.
책으로 보는 영국판 <다큐멘터리 3일> 정도라고나 할까? 

이 책은 마치 여행자의 시간적 흐름을 쫓아가듯 구성되어 있다.

1. 접근, 2. 출발, 3. 게이트 너머, 4. 도착

 그러나 다시 발걸음은 공항으로 이어지게 된다...
역자 정영목은 그러나 그 것이 단순한 환원이 아니며, '상승 나선운동'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예를 들어 프랑스)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다시)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205쪽)

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시 우리는 현실, 즉 발딛는 곳으로 또다시 올 것이다. 
지금 발레오 공조 노동자들은 먹튀자본과의 투쟁을 위해 프랑스에 가 있다.
CFDT를 비롯한 프랑스 노동조합들이 결합했다고 한다. 국제연대의 정신이다.
그들은 다시 파리 드골 공항을 통해, 혹 또다른 나리타공항 등을 추가로 경유해서 귀국길에 오를 지 모른다.
수많은 사연들이 공항에 있다. 그들에게 출국과 귀국은 어떤 의미일까?
결단이다. 삶의 진전을 위한 결단, 가족의 행복을 위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결단의 전조로서의 여행이라는 개념은 한때 종교적 순례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순례는 내적 진화를 촉진하고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 답사를 쉽게 잊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시련에 불과했다.
(201쪽)

 
그 뿐만이겠는가? 이주 노동자의 피눈물나는 귀향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의 애닮은 이별이 있고,
부모 자식간 이별과 만남이 있을 것이다.
바로 '각 사람의 지위와 그에 따른 불안'이 드러나는 곳이다.
 

"터미널이라는 살아 있는 혼돈의 실체에 비하면 책이란 얼마나 얌전하고 정적인 것이냐"
(83쪽)

라고 저자는 반문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위하여 쓴 '분노에 관하여'라는 논문,
그 중에서도 특히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57쪽)

 
이 글을 보며 소위 87년의 항쟁과,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발생 원인을 생각하게 한다.
분노의 뿌리인 '희망'이 그 시대엔 응축되고 폭발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20대들, 소위 88만원 세대들에게 희망이란 존재하는가?
위의 명제를 뒤집으면 '희망이 없으면 분노도 없다'가 된다.
희망은 단순한 개인 감정의 창조물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의 결과이다.
역설적이다. 희망은 지극히 주관적 감정이지만 사회 속 형성을 거쳐여만 하기에 그렇다.

 
"예수는... 가장 축복받은 존재였음에도 지상에 사는 동안 내내 가난했으며...
올바름과 부 사이의 직접적인 등식을 배제하는 것...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의 설명에 흠집을 내는 것"
(129쪽)
 

이것이 대한민국 국민들, 돈 없어 공부 못하는 10대와 자율사립고,
비싼 등록금에 좌절하는 대학생과 유학가는 자녀들간의 간극에 대한 저자의 분명한 설명이다. 
 

이 책에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상품사슬과 노동력사슬, 공장식 패스트푸드의 기내식 도입도 보여준다. 

"터미널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스위스 회사 게이트 구르메 소유의 창문이 없는 냉각된
공장에서는 방글라데시와 발트 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에서 온 여자들이 15시간 이내에
대류권 어딘가에서 먹게 될 아침,점심,저녁 8만 개를 만들고 있었다.
대한항공은 소고깃국을 내놓을 것이고, 일본항공은 연어 데리야끼, 에어프랑스는 당근 퓌레를 깔고 그 위에 치킨 에스칼로프를 깔아 내놓을 것이다.
(135쪽)

 

하지만, 주로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옮겨와 정주하며 파는' 사람도 있지만,
주로 실현(어떤 실현인지는 다양하겠지만)을 위해 노동력을 '옮겨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밤이면 공항은 유목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본거지가 된다.
어떤 한 나라에 헌신할 수 없는 사람, 전통을 보면 뒷걸음질치고 안정된 공동체를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따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 현대 세계의 중간지대에서, 등유 저장 탱크, 비즈니스 파코, 공항 호텔로 인해 풍경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오히려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157쪽)

 

사실 풍경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노마드적 삶만이 아니다.
발터 벤야민을 비롯한 도시 관찰자들은 근대 대도시들의 삶의 성격을
바로 이와 같이 묘사한 것이다.
그것의 글로벌 축소판이 바로 공항인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구획은 분명하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후 사람들이 접하는 최초의 장벽아닌 장벽은
영국인/비영국인, 영어권/비영어권, 유럽/비유럽의 장벽이다. 

"권력은 이곳에서 자신만만하다.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서 특권을 누리며
이곳을 비켜가는 사람들에게는 삼가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다."
(179쪽)

 저자가 말하듯이 "화성인이 온다면 구경시켜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가 공항"인 이유는
그곳이 바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가장 발전된 모습을 응축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적나라한 모습이 바로 공항에서 구현된다.
때론 화려해보이나 슬픈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공항 그 자체도 글로벌 자본주의의 경쟁하는 자본이기도 하다.

베이징 공항, 카타르 도하 공항, 그리고 이 책의 배경인 히드로 공항,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등이
현재 벌이고 있는 유래없는 대규모 확장공사는 바로 유통 허브로서 시장력을 넓히기 위한
자본의 경쟁 그 자체인 것이다. 

200쪽에 글로벌 자본주의의 축소판을 100장의 귀한 사진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봉암과 진보당 -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 커리큘럼 현대사 3
정태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경남도민일보 - 책이 희망이다 2009.7.31> 

조봉암과 진보당 -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

정태영 / 후마니타스 / 19,000원

죽산 조봉암 서거 50주기를 기리며



최근 각계에서는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선구자인 죽산 조봉암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하다. 비운의 정치인인 조봉암과 ‘진보당’이 외쳤던 ‘민주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평화통일’은 당시에는 매우 불온한 슬로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해방 이후 사회(민주)주의자의 입장을 갖고 서구적인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20만표(23.8%)라는 놀라운 지지를 얻기도 했다. 이러한 지지세를 모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진보정당인 ‘진보당’이 창당되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였던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과 ‘진보당’에게 북한의 지령에 의해 활동했다는 누명을 씌운다. 구실로 삼은 것은 이승만의 ‘무력통일론’에 반대되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었다.

1959년 7월30일, 변호인단이 올린 대법원 항소는 기각되었고, 하루만인 7월 31일 죽산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봉암과 함께 활동을 해 온 저자는 2006년 7월 31일 47주기에 이 책을 발간했으며, 오늘은 그가 사형된 지 50주기이 되는 날이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이 남긴 유언이 50년의 세월을 넘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양솔규 (진보신당 경남도당 정책기획국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과 타협하기
그레고리 앨보 외 19인 지음, 리오 패니치.콜린 레이스 엮음, 허남혁 외 14인 옮김 / 필맥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2008년 7월호에 실릴 글

“자연과 타협하기” 위한 길찾기에 나서자.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2기 졸업생, 회원)

연일 촛불이 타오르고 있지만, 고유가 행진도 계속되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 유가가 1배럴당 70달러였던 반면, 지금은 147달러를 돌파했다. 두 배 이상 오른 것이다. 유가는 더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급기야 7월 6일 오늘, 정부는 고유가에 대한 에너지 대책을 내놓았고 사실상 3차 오일쇼크를 선언했다. 또한 오늘 충남 태안에는 국내 최대 태양광 발전소가 가동되었다.

물론, 이러한 석유 고유가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은 국영기업, 헤지펀드의 책임 문제를 제기한다. 일명 ‘투기설’이다(윌리엄 엥달 등). 여기에 대해 폴 크루그먼 같은 학자들은 ‘투기설’이 엉터리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일명 ‘수급불균형설’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너지 절약이니, 새로운 생활패턴이니 하면서 금방 대안적인 생활에 대해 얘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괜찮은 ‘재생에너지, 기후변화’에 대한 뉴스 또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다. 적어도 이러한 문제가 먼 얘기가 아니라,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얘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 작년과는 매우 다른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런 ‘고유가’ 시대의 전환적 사고가 실제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다. 이런 ‘고유가’ 상황 속에서도 국제자본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만들어질 때, ‘녹색’과 ‘적색’의 결합 등을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다. 이에 대해 ‘녹색’과 ‘적색’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당위적으로 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쪽 색깔이든, 그렇다고 자기 색만 가지고 말하기도 참 껄끄러운 시절이기도 하다.

내일(7월 7일)부터는 일본에서 G8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자리에는 탄소배출을 해온 선진국 G8뿐만 아니라, 새로운 탄소배출‘강국’(?) 중국, 브라질, 인도, 남아공 등도 참가한다. 이 회의에서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탄소배출 국제기준인 교토의정서는 2012년에 완료될 예정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논의가 진행중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세계적으로 유가와 곡물가가 급등하면서 전세계 수억의 생존이 분초를 다투고 있다. 당연히 G8에게 수억의 생존보다도, 자본의 생존이 더 중요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필요성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 지금에 우리가 참고할만한 책이 있다. 좌파 잡지 Socialist Register 의 편집자 리오 패니치가 엮은 <자연과 타협하기>가 그것이다. “Socialist Register”는 각 해마다 한 주제에 따라 여러 필진들의 글을 모아 발행하는데, 2007년의 주제가 바로 ‘자연’ 및 ‘환경문제’였다.

이 책은 교육원 회원들이 참 읽기 힘든 책일텐데, 무엇보다 번역된 책이라는 점, 많은 필자들이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생소한 환경문제에 대한 글이라는 점, 그리고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는 점(518쪽)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생태환경문제를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이해하고, 대안사회를 반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반환경파괴사회로 상정하고자 한다면, 이 책만큼 종합적인 현안 분석과 폭넓은 대안을 제시해주는 책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17명이나 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필자들이 17개의 주제에 걸쳐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에서 닐 스미스가 쓴 2장 “축적전략으로서의 자연”과 엘마 알트파터가 쓴 3장 “화석자본주의의 사회적, 자연적 배경”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2장에서 닐 스미스는 자연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현재의 국면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맑스가 단순제조업에서 근대산업으로 넘어가면서, 노동자는 자본-임노동관계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 속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주도권을 빼앗기는 과정을 분석한 것을 인용하면서, 이와 유사하게 자연도 자본에 형식적 포섭 단계에 있던 단계(예를 들어 식민지 자원 약탈)를 넘어 자연이 곧 자본축적전략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에 대한 금융화(석유펀드, 곡물 펀드, 광석 펀드 등)가 이를 주도하고 있고, 자연에 대한 변형(유전공학 등)과 자연과 관련한 (의제)상품과 시장의 출현(탄소배출권 시장 등)이 그것이다.

3장에서 앨마 알트파터는 이러한 자본주의와 화석에너지가 결합한 현대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석유정점과 화석에너지의 위기에 따라 유지될 수 없고, 대안은 재생에너지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기술적 처방보다는 새로운 사회시스템, 예를 들어, ‘연대의 경제’ 혹은 ‘도덕적 경제’가 재생에너지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앨마 알트파터의 주장은 얼마 전에 번역 출판되었던 그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실상에 대한 글들도 많이 있다. 5장 바버라 해리스 등이 쓴 글은 “영국의 재생가능에너지 정치”에 대한 글이다. 7장은 “중국의 초고속 발전과 환경위기”에 대한 글인데 필자인 데일 원은 우리나라 <녹색평론>(2007년 7-8월호)에서도 중국과 관련한 생태문제에 대한 글이 소개된 적이 있다. 중국 외에도, 6장 허리케인으로 인한 뉴올리언스 사태를 분석한 글, 8장 아프리카의 생태포퓰리즘과 관련한 글, 16장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이었고, 예전 민주노동당 기관지에서도 글이 소개된 적이 있는 프리더 오토 볼프가 실패한 독일 녹색당 기획의 교훈에 대한 글도 소개되고 있다. ‘적색’과 ‘녹색’의 결합을 갈망했던, 또는 불가능하다고 봤던 진보신당의 당원들이나 ‘당’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주제별 분석으로는, 9장 세계를 먹여 살리기, 농업, 발전, 생태, 10장 물, 돈, 권력 등이 있다. 수돗물 민영화 등이 당장 현안이 되어 있고, 거의 해체상태에 놓여 있는 농업 문제는 한반도 식량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관측들이 있는 상태에서 서구와 세계농산물시장 등에 대한 이 장의 분석들은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위치짓게 한다.

13장 “더 많이 일하고, 팔고, 소비하기”라는 글에서 코스타스 파나요타키스는 맑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1차모순, 생태맑스주의자인 제임스 오코너가 주장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생산력과 자본주의 생산조건간의 모순인 ‘2차모순’을 넘어 자본주의 소비주의 속에서의 강박적인 경제성장 추구를 ‘자본주의 3차모순’으로 개념화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분석보다는 대안 위주의 글들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필자들이 눈에 띄는데, 미셸 뢰비와 그레고리 앨보가 그런 사람들이다. 15장 “생태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이라는 글은 미셸 뢰비의 글이고, 17장 “생태지역주의의 한계-규모, 전략, 사회주의”는 그레고리 앨보의 글이다.

당연히 이 글들의 필자들은 ‘생태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앨마 알트파터는 3장에서 자본주의의 지속불가능성을 주장했지만, 4장에서 대니얼 벅은 ‘자본주의가 생태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이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지 않는 한, 자본주의든 그 무엇의 체제든 간에 재앙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각주만 해도 60쪽이 넘는다. 17개의 주제들에 500쪽이 넘는 분량은 접근을 힘들게 한다. 생태주의 문제에 대한 글들을 엮었지만, 자본론과 관련한 언급들, 맑스주의의 주요한 이론가들, 역사가들부터 현실 정치인들까지, 환경과 관련한 제도의 문제에서, 좌파의 역사, 민주주의와 사회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론들과 개념, 분석과 사람들이 동원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환경생태문제를 이제 곁다리로 한번 언급해 보는 장식품 정도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대안사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게라도 독서모임을 조직해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미 자본은 기후변화와 에너지문제에 대해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해 그들은 준비하는 것이다. 생태문제는 이미 시장화, 상품화 단계를 거치고 있다. 즉, 우리의 생존을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를 넘어, 자본의 새로운 축적의 영역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둬서는 수십억의 세계 민중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게 이 책이 우리에게 수많은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교훈이다.

지역 사회에서도 이러한 요구와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태양의 시대’로 가는 ‘태양혁명’을 준비할 것인가? 아니면, ‘화석연료’ 중심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는대로 먹고사는 20세기형 자본-노동타협 경제체제를 유지할 것인가? 생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 다음에 고민해야 하는 차선의 문제가 아니다. 작금의 변화는 생태 문제를 이렇게 안일하게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제 생태 문제는 바로 안전하게 ‘먹고 사는’ 문제이며, ‘분배’의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이다. 따라서 ‘정치’의 문제이고, ‘경제’의 문제이다. 중산층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 길목에 서 있다.

문제는 사람들과 어떤 꿈을 함께 꿀 것인가? 꿈의 상에 대한 것이다. 그 꿈은 단지 생태환경적으로 ‘올바른’ 것일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사회경제적 대안’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상력의 주체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생활 속에 뿌리박고 사는 우리들이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2008년 1-2월호 (2008년 1월 8일)

‘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창작과비평사, 2002년

  양솔규(교육원 졸업생, 회원)

그리 길지 않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숫자는 ‘역사적 투쟁’의 법칙성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1960년의 4.19 혁명, 1980년의 5.18 광주민중항쟁과 같이 10-20년 단위의 년도가 그러하다. 작년은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또한, 1996-9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10주년이 되던 해였다.

사람들이 이러한 시간적 흐름을 단지 ‘표지’해 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에 어떤 주술적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극복 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심리적 동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숫자가 반복적인 ‘시간적 주기’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숫자적 의미로만 본다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7년의 노동법개악 반대 총파업 투쟁이 일어난 지 10, 2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은 뭔가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해봄직한 해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거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적, 정치적 주체형성과 투쟁의 고양을 의미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그 어떤 주술적 힘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는 점을 믿는다면, 우리 노동운동은 아직 이러한 발전을 이루어낼 만한 실천을 하지 못한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이에 기반한 풍부한 논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2007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조직노동 외 계급적 대표성을 갖추기 위한 활동에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역사에 대해 제대로 기록할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그나마 기록된 자기 역사에 대해 그 구성원들과 나누고자 하지 않았다. 기껏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의 몇몇 정리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회원들에게 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해근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339쪽, 13,000원)이다. 이 책은 2001년에 구해근 교수가 영어로 쓴 책을 2002년에 신광영 선생이 번역을 해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3월에 구입했는데, 몇 년 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2008년 신년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저어했던 이유는 이 책이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사에 대해서 글의 비중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1987년 이후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한국 노동운동의 긴 역사를 ‘단절적’이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르는 긴 시간의 흐름을 ‘계급 형성’이라는 핵심 단어로 묶어 내고 있는 것이다.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은 바로, 책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E.P. 톰슨의 기념비적인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제목을 차용한 것과 같이 톰슨의 관점, 즉 계급을 역사주의적, 구성주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을 “구조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주로도 보지 않”고 계급을 “사회적․문화적 형성으로서…다른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그 정의는 시간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은 (코카의 주장처럼) “항상 형성 또는 소멸의 과정 속에 또는 진화나 퇴화의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의 노동계급의 현재의 상태를 고정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정치적, 문화적 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 형성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비교연구적 관점에서 대만이나 서구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한국의 노동운동의 양상을 서술하고 그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섭렵하여 담고 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다른 역사적 자료들이나 논문들이 더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강점을 지닌 책이 될 수 있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주요한 테마로 보고, 이의 계기와 과정, 조건과 이를 돌파하는 계급형성의 힘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흥미롭게 볼 만한 점은 뒷부분에서 많은 외국의 노동분석가들과는 달리 구해근 교수는 한국의 경우 브라질, 남아공과는 다르게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구해근 교수는 그 원인을 첫째, 기업별 노조에 가해진 법적, 정치적 제약, 둘째, 낮은 실업수준과 적은 비공식 부문 규모, 셋째, 노조운동이 공장 특유의 문제에 몰두하면서 지역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은 점 등으로 설명한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운동의 폭발성, 전투성과는 상관없이 경제노조주의로 귀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IMF 이후, 현재의 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이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이전과 달리 무르익고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노동조합주의를 상상하면서, 과거의 우리 행동의 선택지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 정당운동의 지체와 학출 활동가들의 조급함, 자본과 비교해서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불균형”을 초래한 원인들 등,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오류와 실패들을 사심없이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노동운동이 더욱 힘든 구렁텅이로 밀려들어가고 있고, 수많은 비정규직들과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80년대 말 형성된 한국 노동계급은 그러나 현재 ‘소멸’ 혹은 ‘퇴화’의 과정에 있을 지도 모른다. 

구해근 교수가 결론적으로 얘기하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 조직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계급이다. 앞으로 이 계급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계급조직을 갖추고 건설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성숙한 노동계급으로 성장하는 길”이며, 또다른 길은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몰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분열되고 외부적으로는 고립되는” 길이다.

이 두 가지 갈래 길은 사실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나타났으며, 미래의 순간순간마다 나타날 것이다. 그 갈래를 결국 선택할 주체는 한국 노동계급이며 그 선택 자체가 바로 계급을 고유의 모습으로 빚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이명박 시대가 시작되는 지금, 노동운동과 당 운동이 몰락과 쇄신의 갈래에 있는 지금, 우리는 지난 노동운동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선택을 위한 지혜와 결단력을 공급받아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선서 99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이병천 감수 / 동녘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전진> 16호 (2007년 12월) 원고


 연대적 경제와 재생가능 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양솔규 부산회원





필자는 요즘 이사할 집을 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전세물량이 없는 속에서도, 가끔 깔끔하고 괜찮은 집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집은 괜찮아도 ‘기름보일러’인 경우가 많다. ‘눈 딱 감고 2년만 살아봐?’ 하다가도 기름값이 오르는 걸 생각하면 그럴 자신이 없다.



2007년 겨울, 유가는 배럴당 97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초 60달러 선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불과 1년 사이에 60%의 가격 상승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유가의 초고속 증가의 배후에는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무리 수요의 증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상승폭을 설명하는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제3세계의 점증하는 수요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생산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석탄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석유의 수요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전세계적인 수요의 증가는 장기적인 석유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두 나라의 에너지수요의 급증은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이러나저러나, 기름값은 당분간 오를 것이고, 물가상승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판국이다.




월드 워치(World Watch)의 2006년 판 ‘지구환경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이례적으로 이슈가 아닌 ‘중국과 인도’라는 두 국가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만약 두 나라가 미국 수준의 자원 이용과 오염물질을 배출한다면 지구적 재난은 불을 보듯 뻔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에게 이러한 자원 이용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현재,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가 어려워진다면 세계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럴 경우 석탄 이용이 증가된다면 환경 리스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2005년, 현대경제연구원)을 자본 측에서는 내놓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이든, OPEC이든, 아니면 초국적 석유자본이든, 강대국이든, 이러한 자원 및 권력정보 독점체들이 사실을 아무리 왜곡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화석연료의 사용은 ‘유한’하다는 점과, 수요와 공급 속에서의 가격 결정이 시장 속에서 이루어질 때, 힘없는 대다수 전세계 인민들에게는 재난과 빈궁만이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2008년은 아무래도 석유와 석탄으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화두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적 사회내부 관계 변혁’과 ‘지구적 사회-자연 관계 변혁’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엘마 알트파터는 누구인가?



바로 이때, ‘생태 사회주의적(?)’ 시대인식을 담은 책 또는 ‘생태적 반자본주의 선언서’가 발간되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과 교수(현재는 은퇴)이자 비판적 사회과학 잡지 PROKLA의 편집위원인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 교수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 2007)이 그것이다.1) 사실 엘마 알트파터는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지 않았다. 1992년에 편역된 『위기와 조절』(창비)라는 조절이론적 접근 이론서에 논문 한 편이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2년호)에 실린 ‘성장 강박증(The Growth Obsession)’이라는 글이 신기섭 한겨레신문 기자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http://blog.jinbo.net/marishin/)

1938년생인 그는 “소련에서의 환경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68세대로서 정치경제학 이론에 영향을 미친 독일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ATTAC’과 ‘세계사회포럼’의 자문단이기도 하다.

독일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라고 알려진 알트파터의 책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부재론(TINA; There is no alternative)이 운위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따라서, (영미식) 자본주의 vs (라인형)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시대에 ‘자본주의의 종말’을, 그것도 라인형 자본주의인 ‘독일’의 학자가 논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의 귀결, 지경학적 세계화와 지정학적 신제국주의




먼저, 알트파터는 ‘역사의 종말’을 논한다. 역사의 종말은 후쿠야마가 언급한 것으로서,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이제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언술은 이미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물신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인류 역사는 두 가지 길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길은 끝없는 자본주의의 길로서 또 다른 역사의 종말, 즉 파국이 놓여 있다. 두 번째 길은 확 트인 지대로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넘어서는 사회적 대안들이다. 필자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번째 길이다.



“만약 역사가 계속되고,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현재 실현되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로 부각된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 하며…검증해 보아야만 한다”(43쪽).



알트파터는 현실 자본주의의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첫 번째 전유 형태는 가치화이다. 원시적 축적 체제에 해당하는 이러한 가치화는 현재에도 일어난다. 두 번째 전유 형태는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세 번째 전유 형태는 상대적 잉여 가치 창출이다. 이 속에서 노동력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전유하는 효율은 새롭고 더 효율성이 높은 기술과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개선된다. 이러한 전유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글로벌화 경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자본주의 지경학이 드러난다. 네 번째 형태는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이다. 에너지 자원확보와 공급을 위해서는 글로벌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지경학적 논리를 넘어 탈취, 절대적 잉여 가치의 확대, 글로벌 중심지로의 이전을 통한 전유 역시 요구된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금융 자본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가 결합된 삼위 일치된 체제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나무) 불가피하게 화석 에너지(석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수백 명의 ‘에너지 노예들’과 결합해 노동 잠재력을 몇 배로 증가시켰다. 점차 자본주의는 자연의 적으로 변해갔다.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 최상의 세계’인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말(최종적 승리)’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생활의 기반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는 경제와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다. 시간 단축의 가속화는 공간을 압축하고 뛰어 넘는다. 질주논리적인 가속화 신드롬은 화석에너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또한 유발시켰다. 화석 에너지가 없다면 애덤 스미스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와 좀바르트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 체제의 악마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삼위 일치화 덕분에 인류는 놀랄 정도로 부를 증가시켰다. 이 체제는 성장을 물신화하는 체제이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은 더 이상 노동력 공급과 토양에 의존하지 않고, 산업 노동의 생산성 증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포드주의-소비사회는 이러한 양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 역시 만들어냈다. 화석에너지 소비에 있어서도 미국과 서유럽은 다른 대륙을 능가하며, 온실 효과 가스 배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석에너지원의 장점(시공간적 제약을 넘는다는 점) 중 하나는 화석 이차 에너지인 전기와 내연 기관의 연료를 통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규모의 전기 생산뿐 아니라 소규모의 장난감, 주방용 기구, PC 등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후 태양에너지원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화석에너지원은 엄청난 단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대기의 온실가스 문제를 야기하는 폐쇄된 에너지체제라는 점이다.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충격



알트파터는 페르낭 브로델의 생각에 주목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조건으로 첫째, 내부의 모순의 첨예화와 둘째, 외부로부터의 격심한 충격, 셋째, 동시에 내부에서의 신빙성 있는 대안들이 생겨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첫 번째는 바로 금융 세계화가 준비하고 있는 모순의 폭발이며, 두 번째는 유한한 화석에너지 공급의 파탄과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기후의 변화이다.



글로벌화된 자본주의에서 금융 분야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에도 미국은 달러 세뇨리지2)의 장점을 누린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들은 달러 보유를 통해 외환보유고를 늘려왔다. 이는 자국의 소비를 억제하고 미국의 소비 지수를 높게 하며, 미국의 적자를 낮은 비용으로 메울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만일, 유로화를 통한 외환보유가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 외환보유의 다각화를 추구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불리해질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달러는 점차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3)

또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수익률은 실물 경제가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금융 시장의 위기 추세는 항시적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민영화, 탈규제, 자유화는 또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도덕적 토대를 허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부적 충격은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과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이러한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로 인한 자원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역사의 종말’ 이후 전쟁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원과 자원의 수송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석유 소비의 한계를 늘리려는 ‘석유 제국주의’의 시도는 테러리즘을 불러온다. 공급 카르텔인 OPEC과 수요 카르텔인 메이저 석유 회사들은 석유 매장량을 부풀리고, 기후학자들은 에너지소비와 지구 온난화의 연관성을 축소시키며, 선진국들은 온실 가스 배출 기준을 낮추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외부적 충격의 크기를 증가시킬 뿐이다.



연대적 경제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계



따라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이 얘기하는 세 번째 조건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트파터는 연대 경제와 지속가능한 태양에너지 체계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는 오직 혁명적 과정 속에서만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사회 형태를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대안들을 숙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인 파열을 겪으면서 자체적으로 붕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안을 만드는 사회운동은 자본주의의 시장이 내세우는 행동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질서는 무엇보다 ‘등가성’에 기초한다. ‘상호성’은 비록 등가성 원리와는 차이가 나나 모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상호성’은 다양한 결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등가성의 안전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부패와 결합될 수도 있다. ‘재분배’ 원리를 캘리니코스는 글로벌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이 원리는 소규모 사회에 적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트파터는 등가성과 상호성의 원리에 대립하는 ‘연대의식’과 ‘공평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이미 에밀 뒤르켕은 ‘유기적 연대 의식’ 속에서 집단 의식과 사회적 결속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대 의식들은 모두 도덕적인데,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 의식도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E.P 톰슨 역시 시장 경제 외부의 ‘도덕 경제’라는 개념을 말한다.



“연대적 경제는 사회운동이 시간과 공간을 탈환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지는 성과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공간-시간의 절멸을 통한 ‘탈영토적 운동’에 맞서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영토운동이 된다. 이전의 갈등의 장은 노동-자본-국가라는 말하자면 삼 주체의 코포라티즘적 관계였던 반면에 ‘사회 영토적 대결’에서는 전혀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첫째 테마들이 이전과는 달리 국민 국가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정규적 계급 관계 밖에서 대결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셋째, 대결의 새로운 형태, 즉 중앙집권적이 아닌 차이 속의 동일성 추구가 일어난다. 넷째, 새로운 사회 주체들도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에 따라 움직인다. 바꿔 묻자면, ‘연대의식인가, 야만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야만의 목록에는 화석에너지를 둘러싼 강대국간의 전쟁이라는 절멸의 계기까지 포함된다. 야만은 오직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행함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섯째, 새로운 것의 자율적인 공간과 새로운 시간 리듬을 획득하고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자본주의적 여건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독일이나 브라질 등에 있는 협동조합, 공익재단, 자유 교환시장, 소액 신용기관과 같은 제3 섹터라 불리는 분야들이 연대적 경제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지역을 넘어서 연대적 경제의 주도권은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 필요하다. 이는 “지역, 지방, 국가 경제와 세계시장의 기관들을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집단적 조직 형태와 행동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탈취 전략에 맞서 영토를 재탈환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는 공간(재탈환된 영토)을 통해 태양에너지 사회와 연관된다. 그런데, 재생 가능 에너지와 에너지 소비 절약이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마치 독일처럼), 그 장점을 드러낼 수 없다. 재생 에너지는 더디며 가속화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의 이행의 길 중 선택 가능한 길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태양에너지와 화석에너지 사이의 방화벽이 무너지고, 열린 에너지 체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생산과 소비, 즉 경제는 태양에너지의 변환 체제처럼 조직되어야만 한다. 또한 에너지 체제의 변경은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화도 요구한다. 또한 에너지 노예의 수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는 단기간 내에 이행될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지만, 곧 닥쳐올 석유 채굴의 정점(피크 오일; peak oil)을 방향 전환의 기회로 이용해야만 한다.



저자의 논리적 주장을 요약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300쪽이 넘는 분량에 게다가 압축적인 내용은 읽어나가기에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오타와 번역상의 문제까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 내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이 섞여 있고, 검토해봐야 할 내용들이 무궁무진하다. 권력의 문제부터, 국가의 문제, 발전과 생태,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저자에게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단절적인 시기로 규정하는 듯하다. 저자는 현행 자본주의의 유지는 곧 파국으로 끝난다고 단정 지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우울한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망에 찬 새 지평의 시작, ‘대전환’의 계기로 그려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전망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평의 중심에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저자에게 사회운동은 이전의 포드주의-사회 코포라티즘적 체제내화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넘어선 근본 변혁을 꿈꾸는 운동으로 설정된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탈자본주의의 세계, 즉 사회주의의 체제 구성 요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재생 가능 에너지체계를 필수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구멸렬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사회주의가 고려된다면, 이는 생태 재앙의 시급성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오늘 당장,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은 화석 에너지 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착수해야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