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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라는 이름의 타인
양혜영 지음 / 올림 / 2001년 11월
평점 :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내가 일방적으로 괴롭힌 것이다. 내가 동생이었다면, 이유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사는 게 억울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수많은 아동발달 관련 서적에서는 그 이유가 '동생이 부모의 애정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져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내 동생이 어머니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도 안다. 자식이 괴롭힘을 당하는데 그걸 좋아 할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생을 괴롭힌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내 위장은 상당히 예민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설사로 고생했다. 처음엔 외할머니께서 '나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따로 만들어 주셨지만, 나중엔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고생하느니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굶었다. 하지만 어린애가 스스로 굶어 봤자 며칠이나 굶겠는가. 배고픔에 울면서 수퍼에서 빵을 사먹었는데, 빵은 먹어도 설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밥 대신 빵이 내 주식이 되었다.
한 끼에 빵 하나를 먹었는데, 그걸로는 양이 차지 않았다. 한참 클 나이였으니 더 먹어야 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때 이미 탄수화물에 중독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때부터 살이 찌기도 했다. 어쨌든, 내 몫의 빵을 먹고도 더 먹고 싶어서 동생 몫의 빵에도 손을 댔고,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그때 "밥을 먹을 수 없으니 빵을 먹고 있어요. 그런데 더 먹고 싶어요. 더 먹으면 안 돼요?"라고 이해를 구했다면,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갈등을 만드는 방향으로 행동했을까.
내가 못 먹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코웃음치며 하셨던 말씀이 있다: "죽기 싫으면--아니면 '살고 싶으면'이었을 것이다-- 먹어라."
그 말이 얼마나 공포스럽게 들렸는지 모른다. 내겐 '피똥 싸든가, 굶어 죽든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않은, 반드시 '고통'이라는 부정적 결과가 따르는 선택이었다.
그 누구도 아버지 말씀에 반대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이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각인되었다. 내가 나의 안전에 위협적인 사람들을 믿었을까. 믿지 않는데, 내가 이해를 구한들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동생을 괴롭히는 행동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처음엔 빵처럼 물질적인 것을 두고 괴롭혔다가, 나중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아버지에 대한 절망감에 대해 화풀이를 하였다.
그러다 아버지가 나를 혼내려 집에 오신다는 걸 알았고, 아버지가 집에 오시도록 동생을 괴롭히게 되었다. 더 자주 오시도록 더 자주 괴롭혔고, 강도 또한 강해졌다. 그러다 동생이 다친 것을 계기로 신체적 괴롭힘을 멈추게 되었다. 그 후부턴 정신적 폭력을 가했는데, 주로 인신공격 같은 비하였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자녀를 보면 부모의 수준(?)을 알 수 있으니, 자녀더러 처신 잘 하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내 어머니도 그런 뜻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들으면 '아, 그러니까 잘 해야겠다'고 생각할까. 대부분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탓하지 마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한편, 묘한 죄책감도 들었다. 자녀로서 어쩔 수 없던 것일까.
그럼 '동생은 나의 거울'이란 말은 들어보았는가. 나와 내 동생이 부모님의 거울이었듯, 동생은 나의 거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내가 부모님의 뒷모습을 모방하여 행동했듯, 내 동생은 내 모습을 모방하여 행동했다. 내 동생의 경우,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행동까지 모방했기에 훨씬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놀랍게도, 동생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부모님 앞에선 눈밖에 나지 않게 필요한 태도만 적절히 모방하여 행동하면서, 내겐 '받은 대로 갚아주려는 듯' 불쾌하고 비이성적이었던 태도를 모방하여 행동하곤 한다. 동생이 가족을 대하는 것을 보면 마치 직장생활을 보는 것 같다. 비위 맞춰야 하는 상사와 재수 없는 동료가 있는 직장에 다니는 것 같다.
특정 상황에선 내가 동생을 괴롭혔던 일을 끄집어낸다. 그 특정 상황이란, 나와 동생의 요구가 상충할 때다. 그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때 날 다치게 했는 데도, 난 아무 말 안 했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 말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요구를 들어주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말은 결코 '용서했다'는 뜻이 아니다. 동생이 그때 용서도 비난도 하지 않고 참은 데엔 이유가 있다. 첫째, 보호막이었던 어머니가 나를 비난하셨기 때문에, 굳이 괴롭힘을 강화하는 위험을 감수하며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비난하지 않음으로써 --그래서 내가 계속 괴롭힘으로써, '그러게 왜 그랬어'라고 할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오래, 심하게 괴롭힐수록 내게 그 책임을 추궁하기 쉬워진다. 셋째, 용서하지 않은 이유는 용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저 말 뒤엔 이런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요구를 들어줘야 해.'
동생은 저 말을 하면서, 어렸을 때는 느끼지 못 했던 우월감과 통제감을 맛봤을 것이다.
어렸을 땐 내가 동생을 괴롭혔다면, 이젠 동생이 나를 괴롭히는 때가 되었다. 서로 입장이 역전한 것이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자녀 관계를 떠올려 보라. 자녀가 부모에게 당하고 살 땐 '두고 보라'고 생각하며 이를 갈다가, 나중엔 자녀가 그 빚을 갚는 상황을.
나는 그런 동생을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럴 체면이 아니다. 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동생도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테니. 적어도, 지금만큼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생의 현재 모습을 보면 상당한 죄책감을 느낀다. '나라도 잘 대해줬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는데'라고 자꾸 후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해외 논문을 해석한 내용을 수록한 것에 가깝다. 전반에 걸쳐 통계학 용어까지 언급하면서. 하지만 형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만큼, 앞으로 연구할 것도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 연구가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저자가 그 중 하나라도 연구해 보고 이 책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