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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개정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그들이 있었다. 그 시대, 그곳에 그들이 살고 있었다. 조선의 반대편에 있는 띠깔에 새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쓴 이정처럼 작가도 이 책을 통해 피리 부는 내시, 도망중인 신부, 옹니박이 박수무당, 몰락한 황족 소녀, 굶주린 제대 군인, 혁명가의 이발사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제물포항으로 모인 사람들. 그 누구도 멕시코를 알지 못했고 그곳에 머물길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안고 배에 오른 사람들. 조선에는 설 곳이 없었기에 형체 없는 희망에 기대 배에 오른다. 각자의 사연을 숨기고 주어진 운명이 아닌 다른 길을 개척하고자 했던 희망은 배에 오른 후 조금씩 희미해진다. 멕시코에서의 그들의 삶을 예고라도 하듯 배 안은 혼란 그 자체다. 제물포 항에서 멀어지면서 배가 흔들리고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그들의 인생도 흔들린다. 배 안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니다. 이제껏 살아온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이 현실을 빨리 깨달은 사람은 먼저 일어선다. 선실이 아닌 주방으로 향한 김이정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메리다에 도착한 그들 앞에 주어진 것은 끝없는 노동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 앞에서 누군가는 적응하고 누군가는 낙오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조선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그곳의 상황은 이들을 참으로 다양하게 몰아가고, 휘몰아치던 인생에 비해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덤덤하다.
그들은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 조선에 남아 있었다 한들 그들의 삶은 또 얼마나 달랐을까. 그만큼 치열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삶이 더 쉬웠을까. 선택의 순간마다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은 남기 마련이고 과연 내 선택이 옳았을까에 대한 두려움 역시 갖게 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닥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살아낸다. 그러고보면 내가 갖는 미련과 두려움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있었다. 각자 삶의 모습과 그 끝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온 힘을 다해서 그들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