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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나의 미술 시간은 항상 눈물 바람으로 끝이 났다. 시작은 그럴듯한데 항상 마지막 채색 단계에서 작품을 망쳤기 때문이다. 6학년 여름 방학 숙제로 그렸던 ‘장독대가 있는 테라스’는 지금 다시 그려보라고 하더라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 날따라 어찌나 스케치가 잘 되던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나에게 마지막 단계에서의 실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나는 미술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다. 미술을 알지 못하고 미술 작품을 보고 감동할 줄 모른다. 그런 나에게 미술가의 삶을 이해하라고? 어려운 일이다. 미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인가.
찰스 스트릭랜드는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 일을 하던 부유한 사십 대 남자다. 아무 문제 없이 살던 그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어떤 충동이 그에게 가정을 버리게 하고 육체의 안위와 주변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기행에 가까운 행동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없는 생각들이 나를 무척 불편하게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천재적인 예술성으로 덮어버리기는 더 싫었다. 나는 아무래도 ‘달’보다는 ‘6펜스’에 가까운 사람인가보다.
그나마 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타히티에서의 이야기 덕분이다. 어쩌면 그는 평생 맞지 않는 옷을 입을 것을 요구당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는 몸의 말에 나는 조금이나마 찰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타히티에서 태어났더라면 그의 생각과 행동들이 큰 잘못과 실패로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의 인생도 다를 게 없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받아서 알뜰하게 살림을 하면서 살 수도 있었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뒤늦게 걸어가지 않았나. 그 과정에서 내가 상처 준 사람이 없을 거라고 감히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의 열정을 위해 다른 것들은 ‘무(無)’로 여긴 찰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내가 찰리와 다를 것도 없다.
찰리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한다. 최고 정점에 이른 작품들을 불태워버린 찰리의 심정은 오히려 이해가 되었다. 그의 최고의 순간은, 늘 그랬듯 다른 사람이 알아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보았고 느꼈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그가 부럽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내가 인정하는 나를 완성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