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두 사람, 까를라와 데이비드의 대화로 이어진다. 까를라는 병원에 누워 있는 것 같고, 데이비드는 까를라에게 계속 어떤 순간을, 중요한 순간을 기억해 내라고 하며 과거를 서술하게 한다. 까를라와 데이비드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데이비드가 어떤 상황인지, 까를라는 왜 병원에 있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어렴풋이. 명확한 상황 설명이 없는 점, 동네의 아이들이나 데이비드, '초록집'에 대한 설명 등이 어우러져 소설은 어딘지 음산하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화자인 까를라는 이 이야기를 몇 번째 반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데이비드는 지금 실제로 까를라 옆에 있는 것일까? 까를라는 제정신인 게 맞는 걸까?실제 현실의 상황을 소재로 삼아 펼쳐낸 이야기라는 걸, 작품을 다 읽고 검색을 좀 해본 후에야 알았고 그제야 소설이 좀 더 이해가 되었다. 조각조각 띄엄띄엄 이어지는 까를라의 이야기를 따라 소설의 플롯도 머릿속에 퍼즐처럼 맞춰지는데, 그 과정이 너무 느리거나 답답하지 않고 몰입도가 높다. 뜨겁고 건조하고 조용한데 묘하게 축축한 분위기의 남미 시골 도시 어딘가의 여름날을 상상하게 되고... 한 번 잡으면 끝까지 금방 읽을 수 있는 책.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곧 공개될 예정이라는데 뜨거운 여름이면서도 음산한 이 작품의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했을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서평단으로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받아 읽어 본 뒤 작성한 리뷰입니다 *
주인공 상아는 조선족 마을 남산촌 출신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동네에서 같이 자란 무군과 천진으로 떠났던 상아. 세월이 흐른 뒤 동생 금성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에 잠시 머무르던 중, 마침 상해에 살고 있다던 천진 시절의 동료 정숙과 연락이 닿았다. 정숙을 만나기로 하면서, 상아는 기억 뒤편에 묻어 놨던 천진 시절을 찬찬히 되짚어 본다.
제목 천진 시절은 물론 중국 천진에 살았던 시절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천진했던 시절'처럼 중의적으로 읽힌다. 천진에서 상아는 부의 격차를 목격한다. 숙소는 쓰레기 수거장 옆에 있었지만 시내에는 "한가운데 우뚝 홀로 선 금황색 빌딩(177)"이 있었고, 상아는 차츰차츰 욕망을 학습해 간다. 간혹 외근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 소위 성공한 사내들의 자가용을 타기라도 하면 "모종의 우월감(152)"을 느꼈고, 점차 "삶의 어떤 변화, 질적으로 더 나은 변화를 원"하게 되었다. (153) 새로운 욕망에 눈 뜬 상아는 결국 변화를 선택하지만, 상아나 정숙 모두 천진 시 한가운데서 황금빛으로 빛나던 금황빌딩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 어쩌면 그것은 상아 그녀만의 황금성이었다. 성벽도 성문도 성안의 뜰과 크고 작은 건물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가구와 사람들까지 황금으로 굳어버린 전설 속의 성 말이다. 그 성은 나의 목표이자 소망이었지만 그것은 성 바깥에서 바라볼 때의 목표이고 소망이었다. 그 성안에서 나는 서투른 마법으로 자신의 사랑과 꿈과 삶마저 황금이라는 금속덩어리로 굳혀버렸다. 내가 그곳에서 치른 마법의 대가는 바로 나의 생명 일부분이었다. " (177~178)
결국 이 소설은 부질 없는 욕망을 좇아 본 사람이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는 이야기라고 축약할 수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인 것은 아니다. 소설은 Z시로 돌아오는 상아의 비행을 묘사하며 이 여정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 고향 동네를 지나왔고 천진을 지나왔고 그 뒤의 많은 것들을 지나왔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 (195)
분에 넘치는 욕망을 한 적도 있었고 그리하여 생명의 일부를 희생하며 고향을, 사람을 떠나온 적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건 "그냥 그렇게 된(175)" 것일 뿐, 후회란 부질 없는 것이다. 삶은 계속된다.
※ 이 책은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장 별로 붙여진 피아노 곡명 아래로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이 펼쳐진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줄거리랄 것이 없다. 자유 연상처럼 생각을 늘어놓다가 화자가 반복해서 돌아가는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바라면서도 두려워하고,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 하는 건 죽음, 죽음.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로 남지 않는 문장들,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까 하고 연주곡들을 하나하나 찾아 틀어봤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그냥 꺼버렸다. 따라갈 스토리가 없다 보니 책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글자만 눈으로 휙휙 읽어나갔다. 아래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고통을 기억하자고 다짐하는 사이에 상처는 깊어질 테지만, 내가 아파하는 동안에, 기억하는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어서, 아프지 않은 내가 나의 아픔을 조롱하겠지. - 자동 피아노, 천희란, 93
이 고통을 기억하자고 다짐하는 사이에 상처는 깊어질 테지만, 내가 아파하는 동안에, 기억하는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어서, 아프지 않은 내가 나의 아픔을 조롱하겠지.
- 자동 피아노, 천희란, 93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어떤 커다란 사건을 겪고 나면 차라리 기억을 통째로 지우려 하는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힘이 드니까 아예 없었던 일처럼 감정을 축소하고, 묻고 넘어가고. 그런 식으로 제때 돌보지 못한 감정은 훗날 다시 폭발하며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하는데, 이 문장에 와서야 나는 화자가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분명 아프지만 동시에 아프지 않고 아플 수 없는 것. 나의 경험도 떠올랐다. 고장난 자동 피아노처럼 온갖 내면의 불협 화음들, 죽음이라는 선율을 반복해 연주하는 것만이 화자가 괴로움을 살아낼 수 있었던 방법이었던 게 아닐까.
다만 나는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사람이든 음악이든 자동 피아노든 그 누구든. 나는 이 죽음에 관한 말들을 곧이 곧대로 따라 읽는 대신, 이 문장에 의지해 그것을 비틀어 읽는다. "단언하겠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면, 죽이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27면) 그러니 말하는 이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거듭 다짐하면, 죽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다. 나는 거기서 안도한다. - 해설 "짧은 후주들", 신예슬, 131
다만 나는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사람이든 음악이든 자동 피아노든 그 누구든. 나는 이 죽음에 관한 말들을 곧이 곧대로 따라 읽는 대신, 이 문장에 의지해 그것을 비틀어 읽는다. "단언하겠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면, 죽이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27면) 그러니 말하는 이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거듭 다짐하면, 죽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다. 나는 거기서 안도한다.
- 해설 "짧은 후주들", 신예슬, 131
여자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이 등장하는 소설과, 제로캐럿 팬픽의 서사가 교차된다. 무지개색으로 펼쳐지는 팬픽은 전부 간지럽거나 짠한 사랑 이야기인데 소설 속 현실은 냉혹하다. 진짜 현실의 문제들이 겹쳐 읽혀,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나도 한때 "무대 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 있는" 팬이었지만, 그때의 열정적이었던 마음이 마냥 그립지만은 않다. 그런 이야기가 이 소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