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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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 별로 붙여진 피아노 곡명 아래로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이 펼쳐진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줄거리랄 것이 없다. 자유 연상처럼 생각을 늘어놓다가 화자가 반복해서 돌아가는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바라면서도 두려워하고,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 하는 건 죽음, 죽음.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로 남지 않는 문장들,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까 하고 연주곡들을 하나하나 찾아 틀어봤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그냥 꺼버렸다. 따라갈 스토리가 없다 보니 책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글자만 눈으로 휙휙 읽어나갔다. 아래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고통을 기억하자고 다짐하는 사이에 상처는 깊어질 테지만, 내가 아파하는 동안에, 기억하는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어서, 아프지 않은 내가 나의 아픔을 조롱하겠지.

- 자동 피아노, 천희란, 93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어떤 커다란 사건을 겪고 나면 차라리 기억을 통째로 지우려 하는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힘이 드니까 아예 없었던 일처럼 감정을 축소하고, 묻고 넘어가고. 그런 식으로 제때 돌보지 못한 감정은 훗날 다시 폭발하며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하는데, 이 문장에 와서야 나는 화자가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분명 아프지만 동시에 아프지 않고 아플 수 없는 것. 나의 경험도 떠올랐다. 고장난 자동 피아노처럼 온갖 내면의 불협 화음들, 죽음이라는 선율을 반복해 연주하는 것만이 화자가 괴로움을 살아낼 수 있었던 방법이었던 게 아닐까.


다만 나는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사람이든 음악이든 자동 피아노든 그 누구든. 나는 이 죽음에 관한 말들을 곧이 곧대로 따라 읽는 대신, 이 문장에 의지해 그것을 비틀어 읽는다. "단언하겠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면, 죽이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27면) 그러니 말하는 이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거듭 다짐하면, 죽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다. 나는 거기서 안도한다.

- 해설 "짧은 후주들", 신예슬,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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