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별로 붙여진 피아노 곡명 아래로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이 펼쳐진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줄거리랄 것이 없다. 자유 연상처럼 생각을 늘어놓다가 화자가 반복해서 돌아가는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바라면서도 두려워하고,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 하는 건 죽음, 죽음.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로 남지 않는 문장들,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까 하고 연주곡들을 하나하나 찾아 틀어봤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그냥 꺼버렸다. 따라갈 스토리가 없다 보니 책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글자만 눈으로 휙휙 읽어나갔다. 아래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고통을 기억하자고 다짐하는 사이에 상처는 깊어질 테지만, 내가 아파하는 동안에, 기억하는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어서, 아프지 않은 내가 나의 아픔을 조롱하겠지.
- 자동 피아노, 천희란,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