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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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야의 생각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마치 내가 직접 겪은 일을 회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덩달아 괴로운 마음에 페이지를 급히 넘기며 읽어 나갔다. 내가 이런 일을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트리거 워닝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런 내용일 줄 알았다면 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이 말을 만나기 전까지는.

난 선택했어. 그것을 비밀로 두지 않겠다고. 설명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도망치거나 숨는 대신 말하겠다고. 고통스럽겠지. 오해받을 거야. 어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보겠지.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를 폭력이라고 말할지도 몰라. 근데 말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야. 난 고통스러울 테고 오해받을 거야.

주인공 이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밝힌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결국 고향을 떠나 엄마 고향 친구인 강릉 이모네서 지내게 된다. 이 소설은 제야의 일기를, 그 사건이 일어났던 2008년 7월 14일 그 날과 전후의 일기를 통해 제야가 어떻게 다시 시작하기를 선택하는지 보여준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고 수많은 고백들이 있었다. 나도 당했다고 당당히 밝혔던 많은 목소리들. 그 용기를 고마워했고 지지했지만 나는 과연 그들을, 그런 용기와 고백의 의미를 정말로 알긴 했던 걸까. 제대로 들으려 하긴 했던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오만이었나. 읽기 괴롭다고 느꼈던 방금 전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책 마지막에 실린 발문에서 소설가 황현진은 최진영을 두고 "'우리'라는 단어를 '불행의 연대로 이루어진 무리'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작가"라고 했다. 이걸 읽고, 제야의 일기 중 이 대목이 떠올랐다. 나를 걱정했던 그와 나를 강간한 그는 한 사람이다.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너무 쉬운 말은 아무 의미 없다. 너무 쉬워서, 아무 힘이 없다. 그는 괴물도 짐승도 악마도 아닌 사람이어서 나를 강간했다. (216-217) 같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내 잘못을 먼저 찾"고 부끄러움을 알고 사과하는 이모같은 어른, 나는 그런 어른이 되었나.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161)

오래전 힘겹게 읽었던 "당신 옆을 스쳐지나간 소녀의 이름은"이 최진영 작가 작품인 걸 이번에 알았다. 그때 그 주인공을 나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읽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소녀와 제야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제야는 이모의 말을 언젠가 이해하기 위해 적어 두었다. 나는 잊지 않으려 적어 둔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노력하고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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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일기를 쓸 때 제야는 단어의 한계를 답답해했다. 단어들은 너무 납작하고 단순해서 진짜 감정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바람이나 햇살, 풍경과 냄새를 표현할 때도 궁핍했다. 입체를 평면에 구겨 넣는 것만 같았다.
지금 제야는 단어의 한계에 안도한다. 자꾸자꾸 커지는 그날의 기억을 얄팍하고 단순한 단어에 가둘 수 있을 테니까. (13)


제야는 제니가 부러웠다. 글을 잘 쓰는 제니도 부러웠지만, '싫어요'라고 말하는 제니가 더 부러웠다. 어른들은 제야를 보고 맏이라서 의젓하다고 했다. 제니에게는 막내라서 철이 없다고 했다. 제야는 그런 식의 구분이 싫었다. 그런 말로 자기를 '싫어요'라는 단어에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것만 같았다. (38)


이모는 말을 멈추고 제야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부끄럽더라. 어른이면서 어른 아닌 척 살아온 나한테도 실망했고, 어른인 척하면서 어른답지 못한 인간들한테도 많이 실망했어. 부끄러웠어. 정말 부끄럽더라.
제야는 이모의 부끄러움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눈물이 났다.
진짜 어른이 되자. 어른이 되어보자. 그런 생각 했어.
이모는 제야의 손을 잡고 가만히 말했다.
어른으로서 미안해, 제아야. 정말 미안해. (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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