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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공감-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06년 12월 12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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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담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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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퍼온글] [펌] 강풀 - FTA를 말한다.

우와!  이젠 강풀도 FTA를 말하네요! 
원래 하던 연재를 중단하고 FTA 만화를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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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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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사형제도는 궁극적인 처벌이 되지 못한다.

죽음으로 모든 해결을 보려하는 사고.

속수무책으로 대책 없는 사고다.

어쩌면 우리는 포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한 사과와 진정한 보복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이란 존재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눈을 감기듯이 우리도 스스로를 향해 눈을 감고 있다.

카뮈의 말처럼 사형제도의 진짜 이름은 복수이다. 피해자 가족들의 울분을 잠재울 수 있는 복수.

그러나 가해자를 죽인다고 피해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그의 진정한 사과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모두 허무한 행위에 불과하다.

인간이 신이 아닐진대 용서하라는 말은 못 하겠다.

나는 그들에게 사형보다 더한 고통으로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교화이다. 정말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짐승이었을 때 저질렀던 지난 과오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가책과 후회로 괴로움 속에서 살게 만든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 올 것이다. 진정한 복수란 바로 이런거다.

올드보이에서 어디 최민식을 그냥 죽이나.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극단을 맛 보이고 죽고 사는 것은 이제 네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나.

 

사형수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신파

 

역시 신파가 사람을 울린다.

언제나 설정, 그 자체는 신파를 벗어날 수가 없다. 어차피 상황이라는 것에는 늘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삼각관계, 부모자식간의 갈등하면 오이디푸스 or 엘렉트라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상투적인 신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삼각관계에 신데렐라 신드롬에 콩쥐팥쥐 캐릭터에, 출생의 비밀을 지닌 틀에 박힌 주인공들이 판에 박힌 대사들을 읊조리는 주말 드라마에 신물을 느껴가면서도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신파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된다.

왜냐하면, 사는것 자체가 신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반복되고 있는 신물나는 주말 연속극의 스토리 라인이기 때문이다.

 

 

구성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떠올랐다. 역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글은 육화되어 있다. 그들의 글에는 상처를 뚫고 나온 피맺힌 살점이 묻어있다.  오랜만에 구성이 뛰어난 소설을 만났다. 지금 이 작품을 영화화하고 있다한다. 이나영과 강동원이 나온다는데 내 상상속의 주인공들 보다 나이가 젊어서 의외였다.

영화화 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텍스트이다.

핍진이 있고 드라마가 있고 메시지가 있으며 영상화 되기 좋은 구성까지 갖추었다면 내가 감독이라도 만들고 싶을게다.

장정일의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의혹과 비슷한류의 의심이 생겼다. 그걸 의도한 것일까? 딱히 의도라 할 수는 없을게다.

원래 대중적 코드가 다분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는 대중적 코드란 비하의 의미가 아닌 존경의 의미이다. 그녀의 연륜과 작가적 스킬이랄까. 뭐 그런 것에 대한.

자고로 쓴약을 먹일때 그릇의 변죽에 꿀을 발라 먹이라 했는데 그녀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스타일의 문제겠지만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는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그래서 마음이 울리고 변화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정말 '좋은 작가'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메시지'라는 것은 그렇게 구전동요처럼, 옛날 이야기처럼 입에서 입으로 구어체로 널리 멀리 퍼져나가 세상에 알려지고 떠돌고 그러다가 남아 기록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좋은 작품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써서 누구나 공감 할 수 있게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또 그리하여 황석영이 이야기한 '너무 쉽게 읽히는 것이 공지영의 장점이자 자신의 불만'이라는 말은 어찌보면 뭘 모르시는 말씀이 아니실런지 생각이 되는.

하여, 우리의 인생이 신파일진데 이 세상의 모든 교리와 어려운 철학서들, 그것들도 실은 주말 연속극보다 더 닳고 닳은 스토리라인을 고도의 난해한 어휘들로 포장해 놓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장정일

 

장정일의 글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에서 실소를 했다.

주인공이 감옥의 면회실에 걸린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인 장정일의 글을 인용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알기론 장정일이 독서일기에서 공지영을 엄청 씹은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현상인지.

용서와 관용을 가장한 복수인가?

네가 나를 아무리 씹어도 난 이런 아량이 있는 인격의 소유자다라는.

역시 작가의 펜은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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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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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김영하의'오빠가 돌아왔다'와 헷갈리는 제목이다.

아내가 돌아왔다라고 먼저 나온다.

세계 문학상 두번째 당첨 소설.

왠지 이 문학상은 '당선'이 아니라

'당첨'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일부일처 결혼제도에 순응하지 못하는 아니, 강하게 반발하는 여자와 이 여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가 부부가 되어 일어나는 일이다. 아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만 당신과 이혼하기는 싫다고.

왜?

당신도 사랑하니까.

그럼 나모르게 그 놈하고 바람만 피면 되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정부로 만들기 싫어. 함께 살고 싶어.

 

읽는 내내 이 상식적이지 않은 '아내'에 대한 울분이 울컥 울컥 솟았다. 아마도 약자에 대한 강자(더 사랑하는 쪽이 늘 약자다)

의 횡포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강자가 '아내'가 아니라 '남편' 이었더라면 -물론 이렇게 시대를 역행하는 구성을 하지는 않겠지만-

당장 달려가서 작가의 목을 졸랐을거 같다. 적어도 안티 카페 정도는 가입했을 거다. 어디 나 뿐이겠는가. 여성 인권 단체도 들고 일어났을 거다.

작가는 일부일처제 만이 결혼제도의 모든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하도록 법적으로 정핸호은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가를. 그리고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이러한 제도가 왜 생겨났는지를 사회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제도 안에서 인간이 과연 행복한지를.

결국 아내와 남편, 정부 그리고 그들의 아이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 떠난다. 함께 공존 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를 찾아서. 결말이 어째 좀 싱겁다. 작가가 회피한 것인지, 유토피아를 만들어 준 것인지.

 

아내는 사학을 전공했고 남편은 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둘 다 축구 매니아이다. 이러한 전략적인 설정과 작위적인 구도 하에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그 전략적 서사가 김경욱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머리로 쓰는 소설. 그래서 머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

부드럽게 서사에 스며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소설은 메드 포 갈릭의 졸라 피자처럼 꿀에 따로 찍어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러게 환상적인 음식은 재료가 서로 반목하지 않고 얼마나 조화를 잘 이루어내는냐가 관건이다.

한데 섞어 볶아 먹을 것인가, 구절판처럼 손수 싸 먹을 것인가.

대학로의 한 분식점은 손님 스스로 라면을 끊여 먹도록 재료를 준비해 준다. 냄비와 라면, 계란. 브루스타. 

그리고 알아서 익혀 먹으라고 재료를 한데 몰아주고 나 몰라라하는 즉석 떡볶이도 있다.

이는 조리과정의 즐거움까지도 더 해주겠다는 식당측의 섬세한 배려가 아닐 수 없는데 문득, 이 작가의 사진을 다시금 보게 된다.

당신도 이것을 의도한 것이냐고. 완벽한 음식이 아닌, 반 조리 제품을 내놓고 당신들도 조리의 기쁨을 맛보시라며 재료만 주고 나 몰라라 하시는 것인지.

문학이란 태생적으로 완제품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독자의 부드러운 뇌수와 조우할 때 비로소 완벽한 음식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개념과는 다른 종류의 반 조리 제품이다. 마치, 삼각김밥 안의 양념된 불고기처럼 밥 따로 반찬 따로의 맛.

 

특이한 아내-일처다부제를 주장하는- 와의 결혼 생활을 하는 '나'의 텍스트와 축구의 전문적인 뒷담화(?)를 교차시키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상당히 링크적이다. 축구와 인생을 비교하는 아포리즘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축구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1. 이 제 곧 월드컵이니까

2. 지은이가 원래 축구를 좋아하니까

3. 붉은 악마들은 적어도 읽을 테니까

4.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라서

5. 쓰기가 가장 만만할 것 같아서

 

축구에 대한 정보도 대단히 많이 들어있지만

결혼 제도에 대한 전문지식도 상당하다. 작품의 뒤에 참고문헌을 따로 적어 놓았을 정도다. 작가의 성실성은 높이 평가해야 겠으나 왠지 인문학, 사회학 등 기존의 자료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좀 허약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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