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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형제도
사형제도는 궁극적인 처벌이 되지 못한다.
죽음으로 모든 해결을 보려하는 사고.
속수무책으로 대책 없는 사고다.
어쩌면 우리는 포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한 사과와 진정한 보복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이란 존재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눈을 감기듯이 우리도 스스로를 향해 눈을 감고 있다.
카뮈의 말처럼 사형제도의 진짜 이름은 복수이다. 피해자 가족들의 울분을 잠재울 수 있는 복수.
그러나 가해자를 죽인다고 피해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그의 진정한 사과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모두 허무한 행위에 불과하다.
인간이 신이 아닐진대 용서하라는 말은 못 하겠다.
나는 그들에게 사형보다 더한 고통으로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교화이다. 정말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짐승이었을 때 저질렀던 지난 과오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가책과 후회로 괴로움 속에서 살게 만든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 올 것이다. 진정한 복수란 바로 이런거다.
올드보이에서 어디 최민식을 그냥 죽이나.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극단을 맛 보이고 죽고 사는 것은 이제 네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나.
사형수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신파
역시 신파가 사람을 울린다.
언제나 설정, 그 자체는 신파를 벗어날 수가 없다. 어차피 상황이라는 것에는 늘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삼각관계, 부모자식간의 갈등하면 오이디푸스 or 엘렉트라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상투적인 신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삼각관계에 신데렐라 신드롬에 콩쥐팥쥐 캐릭터에, 출생의 비밀을 지닌 틀에 박힌 주인공들이 판에 박힌 대사들을 읊조리는 주말 드라마에 신물을 느껴가면서도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신파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된다.
왜냐하면, 사는것 자체가 신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반복되고 있는 신물나는 주말 연속극의 스토리 라인이기 때문이다.
구성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떠올랐다. 역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글은 육화되어 있다. 그들의 글에는 상처를 뚫고 나온 피맺힌 살점이 묻어있다. 오랜만에 구성이 뛰어난 소설을 만났다. 지금 이 작품을 영화화하고 있다한다. 이나영과 강동원이 나온다는데 내 상상속의 주인공들 보다 나이가 젊어서 의외였다.
영화화 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텍스트이다.
핍진이 있고 드라마가 있고 메시지가 있으며 영상화 되기 좋은 구성까지 갖추었다면 내가 감독이라도 만들고 싶을게다.
장정일의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의혹과 비슷한류의 의심이 생겼다. 그걸 의도한 것일까? 딱히 의도라 할 수는 없을게다.
원래 대중적 코드가 다분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는 대중적 코드란 비하의 의미가 아닌 존경의 의미이다. 그녀의 연륜과 작가적 스킬이랄까. 뭐 그런 것에 대한.
자고로 쓴약을 먹일때 그릇의 변죽에 꿀을 발라 먹이라 했는데 그녀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스타일의 문제겠지만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는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그래서 마음이 울리고 변화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정말 '좋은 작가'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메시지'라는 것은 그렇게 구전동요처럼, 옛날 이야기처럼 입에서 입으로 구어체로 널리 멀리 퍼져나가 세상에 알려지고 떠돌고 그러다가 남아 기록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좋은 작품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써서 누구나 공감 할 수 있게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또 그리하여 황석영이 이야기한 '너무 쉽게 읽히는 것이 공지영의 장점이자 자신의 불만'이라는 말은 어찌보면 뭘 모르시는 말씀이 아니실런지 생각이 되는.
하여, 우리의 인생이 신파일진데 이 세상의 모든 교리와 어려운 철학서들, 그것들도 실은 주말 연속극보다 더 닳고 닳은 스토리라인을 고도의 난해한 어휘들로 포장해 놓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장정일
장정일의 글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에서 실소를 했다.
주인공이 감옥의 면회실에 걸린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인 장정일의 글을 인용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알기론 장정일이 독서일기에서 공지영을 엄청 씹은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현상인지.
용서와 관용을 가장한 복수인가?
네가 나를 아무리 씹어도 난 이런 아량이 있는 인격의 소유자다라는.
역시 작가의 펜은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