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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 사이 -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 한길그레이트북스 182
한나 아렌트 지음, 서유경 옮김 / 한길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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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유머가 있지 않나, 만약 책이 어렵게 읽힌다면 저자가 독일인인지 확인하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을 어렵게 한다. 그녀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녀의 글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계속해서 읽다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온다. 나도 그랬다.


『과거와 미래 사이』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에세이 모음집이다. 8장으로 이루어져 전통과 현대, 역사 개념, 권위와 자유란 무엇인가, 교육과 문화의 위기와 진실과 정치, 우주 정복과 인간의 위상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해결점을 제시하기보단 현대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 저서는 한나 아렌트의 말로 "정치사상에 관한 철학 연습"을 위한 글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는 어디인가? 그렇다 지금 여기 현재다. 한나 아렌트의 시간관에서는 무한한 과거와 미래가 부딪히는 곳이 과거와 미래 사이인데, 여기서 우리는 사유할 공간을 확보한다. 한나 아렌트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관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며 전통적인 자연관을 벗어난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왜 이것이 문제인지 고찰한다.


'전통의 단절'이 주요 포인트인데, 한나 아렌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서구 정치사상의 전통이 키르케고르, 마르크스, 니체 각각의 이론에서 보여지는 특성에 의해 붕괴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플라톤 이래로 기존 사물을 재고 판단하며 또 그것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추정되었던 초감각적이고 초월적인 이데아들에 대항해 니체가 감각적이고 물질적으로 주어진 것과 삶에 대해 강조한 일은 일반적으로 허무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 귀결되었다."(p.117)라고 말한 것처럼, (물질왕 마르크스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시대의 인물들은 저 너머에 있는 이데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현대 역사 개념은 16-17세기 자연과학의 거대한 발전을 예고한 시기에 일어났다고 설명하는데, 이 가운데 '세계-소외 현상'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의 한 측면으로 "인간의 지각에 '객관적으로'주어진 어떤 불변하며 변할 수 없는 대상인 외부 세계의 실재에 대한 회의" 즉, 현대적 회의의 중요한 결과로, "'감지된' 대상보다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어쨌거나 경험의 유일하게 안전한 근거인 감각을 감각으로서 강조한 일"을 들었다.


이는 세상을 이해했던 인간의 사고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을 믿은 인간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고, 과거에 신적으로 의미부여가 되었던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또 그것은 객관적 의미추구로 이어졌다.


과거의 인간에 대한 수사인 정치적 동물, 언어적 동물, 이성적 동물이 아닌, 현대의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 따위로 해석되어 '행위하는 인간'이 되었다. 이 행위하는 인간에겐 역사란 하나의 '과정'이다. 그렇게 발전 진보와 같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자연과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렌트가 "행위 능력이 인간의 모든 능력 및 가능성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 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자연의 행위를 가하는 일, 즉 우리가 결코 믿을 만한 수준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기초적 힘들과 직면하는 영역에 인간의 예측 불가능성을 끌고 들어가는 일은 위험 천만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행위 능력이 여타 능력들ㅡ관조를 통한 경이(wonder)와 사유(thought)의 능력 못지않게 호모 파베르 [즉 제작자]로서 인간과 애니멀 래보란즈 [즉 노동하는 동물]로서 인간의 능력도 여기 포함된다ㅡ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일일 듯 하다." (p.164)


​한나 아렌트는 역사를 돌아보며 전통의 붕괴와 인간 사고의 변화 즉, 사유능력의 퇴보를 지적했다. 그 사이에 역사를 그저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있는 '행위하는 인간'이 있다. 행위가 사유를 압도해버렸다.


현대 과학의 목표는 훨씬 더 인간의 감각들과 정신에 스스로 드러나는 저 자연현상의 이면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관점에서 인간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단지 외화된 행태일 뿐이다.여기서 아렌트가 우주정복의 시대에 들어서 우리는 이런 인간의 모습이 '위태로울 정도로의 지점'에 가까워졌다 비판하는 것이다. 이 관점을 추구하는 현대는 "발언과 일상 언어가 의미 있는 발화가 되지 못한 것"으로 정치적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아렌트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복수성'이다. 인간은 발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의견을 가진 정치를 만든다. 우주를 정복한 인간의 위상은 나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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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 2023-07-28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떠한 책인가 가늠하고자 읽은 댓글인데
발화를 느끼고 말았습니다.
저같은 청년 중 철학함과 사유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지금의 청년들이 전통이라는 유산의 단점은 차치하고 장점 까지도 모조리 감각의 어둠 이면으로
묻어버린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더 거대해진 군중들과
더 거대해진 소통창구
더 거대해진 정치세력
이 모든 감각의 조합들이 과연 어떤 22세기 미망의
역사를 만들어버릴까요.
 
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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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는 흥미롭다. 과학 그 자체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사는 인류 발전 과정을 보여주며 특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든지 ’뉴턴의 사고‘와 같은 인류사상 발전의 발자국을 보여준다. 과학지식과 세계사 배경이 합쳐져 과학사라는 흥미로운 분야가 탄생했다.

먼저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양 중심적인 과학사관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류의 발전은 세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주장한다. 저자는 다양한 예시를 들면서 과학의 발전은 주로 정치적 변혁, 시대의 흐름과 동반함을 증명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근대과학의 기원에 대해 아주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과학은 유럽만의 특별한 문화적 산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과학은 언제나 전 세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모인 사람과 아이디어에 의존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학사의 중요한 인물을 뽑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 뉴턴, 다윈, 모스, 맥스웰, 아인슈타인, 크릭, 왓슨과 같은 서양 중심의 인물들을 들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몰랐던, 이들의 사상이 나오기 위해서 필요했던 인물들과 그들과 교류했던 학자들의 이름과 사상들을 밝혀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이야기로 논의를 시작한다.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고대의 부활을 추구한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랍의 문헌들이었다. 로마 멸망 후 고대의 서적들은 아랍 학자들에 의해 번역되고 또 연구되었다. 이렇게 보관된 도서들은 르네상스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고 서양 국가들 또한 아랍 서적을 공부하고 다시 번역해야 했다.

대항해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서 선진국의 주요 과제는 어떻게 다스릴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현지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서구의 탐험 일지에는 원주민들의 천문학적 지식에 감탄하는 내용이 나타나며, 서구는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이들에게 의존했다. 또한 원주민이나 아시아인들에게 배우면서 자신들의 과학적 지식을 발전시켰다. 역설적이지만, 협력적 지배였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뉴턴이나 기타 천문학자들은 해외 소식을 기록한 문서나 연구서에 의존했는데, 이런 현지 연구는 보통 현지인들이 하거나 그들이 연구해왔던 것들을 번역한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뉴턴역학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국가적인 경쟁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면서 국가를 개선하는, 특히 군사적 목표를 위한 실용적 과학이 중요해졌다. 그렇게 러시아와 일본과 같은 국가들은 서구의 과학을 받아들이고 자체적으로 수많은 예산을 들여가며 과학을 발전시켰다. 다양한 국가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이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과학은 모든 국가의 ’임무‘ 혹은 ‘의무’가 되었다. 이데올로기를 위한 도구가 되기도 했고, 국가의 존립과 정치적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경쟁을 통해 과학은 더더욱 발전했다. 하지만 과학이 그 자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위하거나 특정 목적을 위한 단순 수단에 그칠 때 비극이 탄생했다. 멘델의 법칙을 마르크스주의로 눌러버린 러시아의 리센코 주의와 마오쩌둥의 정책은 수많은 굶주림과 죽음을 만들었다.

DNA 연구가 현대 과학의 떠오르는 화제거리였다면 게놈 프로젝트와 컴퓨터의 발전 이후 우리의 논의는 인공지능, 우주탐사, 기후 과학의 세 가지 주요 분야로 옮겨져 왔고, “이들 각 분야의 미래는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어떻게 세계화와 민족주의라는 두 힘에 맞서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는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 고조되는 신냉전의 시대며 이에 따른 과학기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저자는 중국의 AI 개발이 빠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거나 쉽게 무시하는 무자비한 정보 습득을 꼽는데, 이는 서양에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이들은 저개발 국가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정보를 얻는다)

이런 모습들을 본다면, 과학기술은 정치적 움직임에 의해 폭발적으로 진전되거나, 저지되거나 천천히 발전할 수 있음을 느낀다. 또한 이 세계는 국가 간 기술의 차이가 대항해시대의 서양과 원주민처럼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존재하는 시대는 아니다. 개인과 문화를 포함한 국가 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제는 전 세계적인 프로젝트가 쉽게 이루어진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세계 과학의 발전은 어느 하나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또 한 국가가 오로지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앞으로 나타날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미국과 같은 한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고, 매우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다뤄야 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사 속에서 숨겨졌던 중요 인물들을 밝히고, 현대 사상 발전의 인과관계를 밝혀주기에 과학의 세계적 관점 혹은 과학의 세계사라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새로운 의제를 던졌다거나 앞으로의 과학 발전을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시점에서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너무 넓은 관점에서, 어찌 보면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단순한 방식으로 바라보기에 아쉬운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장마다의 논의와 근거가 풍부해 자료수집으로 매우 좋다는 것이다.

인류의 발전은 한 문화나 한 국가가 주도해 온 것이 아님을 조금 더 상세하게 밝혀주는 좋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한국에서 출간되지 않은 책의 내용도 들어있어 유익하다. 앞으로의 과학 발전을 우리는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어떤 철학적인 고민을 가지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개선하거나 저지해야 할까 저자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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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섹타겟돈 - 곤충이 사라진 세계, 지구의 미래는 어디로 향할까,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올리버 밀먼 지음, 황선영 옮김 / 블랙피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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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람’에서 서평단을 모집한다고 해서 신청했는데 감사하게도 당첨되어서 책을 제공받았다 :)


2017년 10월 18일, 과학 학술지 <플로스 원>에 "27년 동안 동물 보호구역에서 날아다니는 곤충의 총 생물량이 75% 감소하다"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다수의 언론과 미디어는 곤충의 최후를 의미하는, '곤충 아마겟돈'과 같은 이야기를 했고, 이 둘을 합친 "인섹타겟돈" 이라는 합성어가 탄생했다.

최근에 이례적 폭염과 적은 강수량으로 인해 모기의 수가 줄고, 11월에도 춥지 않아 모기가 겨울에도 자주 출몰한다는 기사를 접했었다. 한편 꿀벌 또한 절반 정도가 사라졌다는 뉴스를 들었었다. 이는 벌 사이에서 도는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모기의 감소에 대해서는 솔직히 기분 좋은 감이 있었지만, 벌의 감소는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벌과 같은 곤충의 소멸은 더더욱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직접 보이지 않기에 더욱 무섭기도 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꿀벌이 사라지면 4년 내에 인류가 종말 한다는 말도 흔히 들려오지 않았나. 결국 기후변화가 그 결과를 인간이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이든, 곤충 생태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한다.

생산량을 최대로 늘리는, 효율적이라 불리는 자본주의는 기후 위기 시대에 실패를 나타냈고 이제 자연의 중요성을 외치는, 더욱 수정된 자본주의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실패로 나타난 모습 중 하나가 '인섹타겟돈'일 것이며,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해결점을 모색해 본다.

저자는 먼저 우리의 상황이 어떤지를 과학자들의 연구 데이터로 보여준다. 곤충은 사라지고 있고, 그 상황을 인지한 후부터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찾아다녔다. 곤충 이 사라진 만큼 곤충을 먹는 새 또한 감소하고 있었다.

자연에서, 특히 인간의 농업 혹은 과수산업에서 수분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하려면 수없는 시간이 걸리는,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다. 저자는 현재 곤충이 해내고 있는 매우 큰 역할을 데이터를 통해 제시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하는 곤충들이 사라지고 있다.

살충제 이야기는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지겨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신 책에서는 기후 위기와 인간이 만든 영향들을 더욱 강조한다. 또 현대의 '인섹타겟돈' 현상은 복합적임을 설명하는데, 이는 단일경작으로 곤충이 살 환경이 부족해지는 것, 살충제, 기후변화, 광공해 등등의 수많은 문제들이 얽혀있는 것이었다.

곤충의 소멸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인간은 보이는 것만 본다. 작은 것들은 대게 보이지 않으며, 멸종을 생각해도 귀엽거나 크고 가까운 것들을 걱정한다. 죽은 곤충보다 산 곤충을 보게 되고 우리가 생각하는 곤충의 귀여운 이미지나 자연친화적이라고 여겨지는 시골의 모습조차 사실상 꾸며지고 제거된 것이다.

인간은 살충제를 비롯해 각종 기술을 개발하며 자연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주로 생산량 확대나 환경개선을 위해 해충을 박멸하거나 단일경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부정할 수 없는 효과적인 것이었을까. 살충제는 뿌리면 바로 분해되지 않고 오래 남아있었다. 레이첼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에서도 언급했듯 모평범한 사람들의 몸에서 살충제 성분이 발견된다. 또 해충이라 불리는 곤충을 없애려고 살충제를 뿌리지만, 해충의 천적까지 죽여버려 오히려 계속해서 약을 쓸 수밖에 없다. 한 종류의 살충제를 금지시켜도 다시 다른 과학자가 만들어서 제공한다. "전술이 똑같으면 무기를 몇 개 없앤다고 해도 전쟁의 흐름이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자원 소비를 하느냐가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

자연은 결국 얽혀있고,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영향을 받으면 그것은 도미노로 이어진다. 단일경작을 하면 곤충이 쉴 곳이 없어진다. 꿀벌만을 양봉하게 된 현실은 다른 종의 벌들을 없애며 다른 곤충의 먹을거리를 없앴다. 제왕나비가 사라진 것도 그 서식지인 오야멜 전나무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또 이 사태들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 각종 나무가 벌목되고, 꽃들이 사라져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더욱 혼란스럽거나 무서운 것은, 원인이 정확히 규정되지 않은 곤충의 소멸이다. 이것이 레이첼 카슨을 포함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경고한, '인간의 무지함'일 것이다. 좋다. 무지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인간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곤충을 이용하고,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은 죽여왔다. 인간에게 한 종의 생존을 결정할 거대한 권한이 주어진 이후로, 무자비하게 또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또 무엇이 죽어가는지 이름도 모른 채로 살아왔다. 숲을 복구하는데 나무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곤충이 필수적이다. 거기에 생물 다양성을 이루는 초석은 벌이다. 나뭇잎과 각종 자연물들을 분해시켜 자연을 순환시켜주는 작은 곤충들까지.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꿀벌들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꿀벌에게만 신경 쓰는 동안 다른 종은 죽어가고 있다. 꿀벌이 모든 종류의 꽃들을 수분하지는 못하며, 다른 동물의 활동 역시 필수적이다. 우리는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곤충들을 바라보며 편애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을 기반으로 다뤄야 한다. 또 그를 위한 최고 목표엔 기후변화를 막거나 늦추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어디서나 완전히 쓰지 말자는 식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적당히 써야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저자 또한 레이첼 카슨처럼, 다양한 접근법을 사용한 후 살충제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자고 말하고 있다.

상자형 벌집의 발명과 살충제, 단일 작물 기법은 농업의 혁명을 가져왔고, 우린 지금 그 부작용을 직시하고 있다. 또 우리는 수많은 종의 곤충, 동물들이 소멸하거나 되살아나는 거대한 변화에 서있다. 미래를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저자는 문제를 인식한 과학자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변화를 이끌고 있음을 다양한 사례들로 보여준다. 로봇벌과 같은 공학적 시도도 하고 있으나 저자도 이런 기계적 시도는 너무 낙관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결국 자연을 대체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자연뿐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의 교훈은 지금에도 유효하다. 아마 계속해서 유효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땅을 평평하고 유독하게 만들고, 대기의 화학 성분이 달라지게 하며, 진보와 심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생물학적인 사막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위험 부담이 큰 실험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곤충에게 우리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곤충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곤충의 위기는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보면 결국 인간의 위기다."


+이 책을 통해 양봉산업의 유통구조와 그 현실, 새로 알게 되는 부분이 상당하다. 자칫 곤충에 대한 사례만 내놓는 지겨운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곤충의 이야기는 이곳저곳 모두 얽혀있다. 또 그렇기에 더욱 중요하다.

나는 책을 읽으며 사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것들이 오히려 사회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극화와 환경파괴는 결국 공멸로 이끄는 것이라는 생각에 더 확신이 든다. 

인간으로서 자연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어느 정도 우리의 이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도를 지나쳤을 때, 또 후손에게 물려줄 것까지 생각하지 않는 그 탐욕과 무책임함에는 언제나 저항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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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을유사상고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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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유문화사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서 도서를 제공받았다. #도서협찬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쇼펜하우어> 세월이 흐르며 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 의식의 근본은 먼 과거나 현재나 비슷하다. 그렇기에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논의되며 일부 주장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행복에 관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대표적으로 수많은 철학자들의 논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을 고통을 중심으로 바라본, 흔히 염세주의라고 불리는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어떻게 말했을까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행복론과 인생론>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의 핵심을 저술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의 주장이 스며들어있다. 그 논의들을 삶에 적용시켰다고 이해하면 될 것인데, 그는 인간은 의지에 묶인 존재라거나 모든 존재의 삶은 고통임을 행복론에도 적용한다. 이는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는 '고통'과 '무료함'이라 주장하며 우리의 인생은 "이 두 가지 적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인생론에서는 세상을 인식하는 이론적인 내용과 좀 더 다양한 주제들로 의견을 피력한다.

어릴 적 유럽 여행을 하던 쇼펜하우어는 빈민과 노예, 체벌 현장들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다. 조용히 숙고하는 그의 특성과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세상을 고통을 중심으로 바라보게 됐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을 비관적, 비판적으로 보는 것에서 그의 기본적인 사고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먼저 쇼펜하우어는 현대 서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행복하자!"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 또 엄청나게 가치 있는 것들을 찾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많은 것들을 성취하라고 권유하는 자기 계발적인 인물도 아니다. 그는 '향락을 추구하기보단, 고통을 제거하자'라고 주장한다. 향락은 다가서면 사라지는 허깨비 같은 것이고 어떤 것이 향락인지 확실히 구분하기 힘들다. 반면 고통은 그것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가 직접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니 둘을 비교하자면 '고통'에 초점이 갈 수 밖에 없고, 고통을 줄여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행복론에서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면 먼저 내면의 것, 인간을 이루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력(정신력)이 높은 사람과 지력이 낮은 사람을 대조한다. 이는 내면이 가득 찬 사람과 내면이 공허한 사람같이 나눌 수 있다. 그의 주장을 읽으면, 그가 생각했던 지적이고 본받을 만한 사람의 유형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향유의 원천이 자기 자신 속에 있고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며 내면, 즉 정신이 풍요롭고 명랑한, 무게중심이 내부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그가 말하는 정신력이 높은 사람은 결국 고독한 존재가 되며, 각종 사교활동도 매우 삼가는, 심지어 그 정도로 다른 이들을 속으로 깔보고 무시하며, 고립될 것 같은 이미지도 떠오른다. 또 그의 주장에는 어느 정도 타인에 대한 불신이 심어져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식의 극단적 주장을 했다기보단, 타인에게서 위안을 얻거나 타인과 즐기면서 자신을 채우기보다, 다른 것들이 모두 사라졌을지라도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어찌 보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일종의 자존감을 채울 수 있고 홀로 올곧이 서있을 수 있는 삶을 살라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에겐 인생이란 고통으로 가득 찼지만, 두렵지는 않은 것이다. "인생 전체 자체가 겁먹고 떨며 움츠러들 만큼 가치 있는 게 아니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는 다르게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인식하자고 주장하며 체면만을 중시하는 기사적 명예가 등장한 서구 사회를 비판한다. 우리 인간은 이토록 교만하며 어리석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속은 비어있고 겉은 화려한 삶을 경멸하며, 정말로 인간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묻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에서 '일체유심조'나 '카르페디엠'같은 주장도 맞닿아 있는 것을 찾는 것과 다양한 철학자들의 행복의 정의를 엿보는 것도 일종의 재미다. 이렇게 우리는 그의 글을 읽으며 둥글게 해석해 보거나 세상을 다시 인식해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초월이며,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길은 결국 '해탈'에 있다. 하지만 그가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의 인식 수준을 비판했듯이, 그도 그것이 어려움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일반적 인간의 최선적 방안은 부정적인 것들을 없애 나가며 현재에 가치를 두고, 나름대로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의 주장을 읽어가다 보면 쇼펜하우어라는 사람은 위험 회피, 갈등 회피형이고 최상의 것을 탐하기보다 부정적인 것을 없애는 잔잔한 파도 같은 삶을 살고자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운명에 인생을 쏟아라! 같은 말이 아니라, "시기심, 욕망 분노를 줄이고 제어하라" 같은 말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그러다 보면 그는 대체로 소극적인 삶을 살라고 권하는 듯 하지만, 내면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갈구하는, 일종의 적극성을 띄고있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행복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다지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지, 대단히 큰 기쁨이나 엄청난 쾌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그는 행복론을 주장하면서 멍청함을 흑인의 인종과 연관 짓거나 '여성에 대하여' 에서 "여성은 이른바 열등한 성이며, 모든 점에서 남성에 뒤떨어지는 제2의 성이다" 같은 차별적인 발언을 자신의 논리구조와 연결하지만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인물들에게 극복당해야 할 시대의 사고였다고 생각한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당대의 가부장 구조가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지적했듯 당대에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들조차 여성차별적 구조 안에서 살아갔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순 없지만 우린 이를 이성으로 통제하고 어느 정도는 부정할 수 있다. 나름대로 굴곡 없이 잘 살아가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닐까. 쇼펜하우어는 이를 위해서 인생의 경험이 필요하고, 지성을 겸비해야 한다고 현실적인 조언조차 아끼지 않는다. 또 건강과 같은 행복의 중요 요소도 빠트리지 않는다. 어찌 됐든 인생이란 참 살기 어렵고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각종 외부의 영향이 넘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인간 본성을 따르는, 행복에 필수적인, 세상에서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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