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숭배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83
토머스 칼라일 지음, 박상익 옮김 / 한길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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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주의 역사관'이라는 것은 역사를 배울 때 한 번씩은 등장하는 것이었다. 역사에는 영웅이 존재한다거나, 영웅이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로서는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정도일 것이다.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평가한 19세기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이 있다.





그의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최근까지 역사 스토리텔러로 유행했던 설민석, 유시민, 썬킴 같은 인물들처럼 역사 이야기꾼으로 나섰기에 유명해진 책인 것 같다. 그는 시대별로 영웅을 설정해 자신이 왜 그들을 영웅으로 생각하는지 설명한다. 그 이름들 한 번 보자.




오딘, 마호메트, 단테, 셰익스피어, 루터, 녹스, 존슨, 루소, 번스, 크롬웰, 나폴레옹




그가 뽑은 영웅의 리스트를 보면, 단순히 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그가 영웅은 시대별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웅의 외면보다는 공통된 숨겨진 특성이 중요하다. "영웅은 자기가 태어난 세계의 종류에 따라서 시인, 예언자, 왕, 성직자 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영웅으로 뽑은 이유와 당대 사람들이 숭배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시대에 따른 영웅숭배의 모습도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신적인 존재에서 예언자로, 또 예언자에서 다른 모습으로 넘어가는 것을 단계로 구분했다.

그의 영웅적 기준은 단연 "성실함" 이었다. 진리에 대한 성실한 탐구라고나 할까. 진실됨 또한 중요 요소였다. 모든 영웅의 특성으로 사물의 외관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 위에 서는 것을 말했다. 외관이 아닌 내면의 것을 보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영웅인 것이다. 영웅들의 생애를 바탕으로 그들의 특성을 설명하기에 해당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좋다. 없어도 좋다. 그가 인물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영웅에 대한 찬양만 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비판 또한 소개한다. 하지만 칼라일은 그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영웅으로 뽑힐 수 있는지를 피력한다. 칼라일의 서술, 특히 단테와 같은 인물을 설명하는 서술에서 일종의 호들갑으로도 느껴질 수 있을 만큼 과한 칭찬들을 하지만 오히려 그런 문체가 글의 재미를 더해준다.

칼라일은 미래 혹은 현재의 사람들은 과거를 낡은 것으로 보거나 가치 절하해 멀리하지만, 과거의 숭배는 결코 가치가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은 일종의 '역사주의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는데, 그는 지나간 인간들에 예의와 존경을 표하며 역사라는 장엄한 관점에서 개인을 바라보고 있다.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들은 설령 그것이 현재의 시각에서 잘못되었다 생각하더라도 미래의 발판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정확히는 칼뱅주의자) 인이었지만 오딘이나 마호메트를 영웅으로 꼽은 것을 보면, 그가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했던 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객관적 기준으로 영웅을 선정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대의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그의 역사관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슴속에서 진리로서 정직하게 살아있었던 모든 사상은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신의 진리에 대한 정직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안에 본질적인 진리가 있으며, 그 진리는 모든 변화를 초월하여 우리 모두의 영원한 소유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싫어한 것은 18세기의 만연해진 회의주의였다. 그는 세상을 기계적으로 보는 것을 혐오했다. 세상은 나무 같은 것이지 기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가 기독교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정신을 중요시했다. 물질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모든 것의 근본이자 시작이라 여겼다. 또한 그는 보수주의적이기도 했다. 루소를 영웅의 자리에 위치시키기도 했으나. 대체로 비관적이며 비판적인 서술을 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중간중간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과거의 유산을 소중히 다루며 믿음의 가치를 믿는 입장으로, 기계주의적이고 자만심 넘치는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이 우주를 기계로만 보는 사람은 우주의 깊은 신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극히 치명적인 오류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주에 대한 인간의 관념에서 모든 신적 존재를 제거한다는 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과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칼라일의 역사 교과서'는 아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그 기준으로 평가한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라고나 할만하다. 그가 영웅들의 어떤 점을 칭찬하고 어떤 점을 비판하고 있는지 본다면, 당대의 '영웅상'이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다. 그의 글은 과격할 수 있으나, 그의 감정이 고대로 묻어 나오기 때문에 지금도 재미있게 읽히는 것 같다. 하지만 영웅주의 역사관과 기독교 중심적 서술, 프랑스 혁명에 대한 보수적 입장, 정돈되지 않은 서술 등으로 비판할 점이 여럿 있다.

그가 전하는 의미 있는 메시지라면, 우린 세상의 진리를 알아야 하고 성실히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것. 세상을 죽어있는 시체처럼, 기계적으로만 보지 말 것. 칼라일의 입장에서 그 진리란 기독교적인 의미였지만, 결국 우린 나름의 관점에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성실하고, 또 진실한 마음을 갖는다면 충분히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영웅은 누군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칼라일은 우리 또한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명해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칼라일은 빈곤과 같은 역경이 영웅의 조건일 수 있음을 말한다. 최선을 다해 삶의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자.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고 깨달으며, 세상의 진리를 이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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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리카 원조는 작동하지 않는가 - 아프리카 개발협력의 혁신적 전략 10가지
로버트 칼데리시 지음, 이현정 옮김, 허성용 해제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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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빈곤과 원조에 대한 내용은 꾸준히 인기 있는 주제였다. 특히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같은 책은 세계화, 신자유주의 비판의 관점에서 아프리카 빈곤을 이야기했고 이는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최근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UN을 비판하며 특사에서 물러났고 현재 국제기구 비판론자들과 함께 국제기구와 국제 원조의 실효성에 의문이 늘어나는 현실이다.

아프리카는 최근 지정학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중국과 서방의 세력 싸움의 공간이 되었고 자원이나 소비시장과 같은 미래를 위한 투자, 특히 아프리카 인프라 구축을 대가로 중국의 공격적 차관 투입의 대상이 되었다.

아직도 아프리카를 저개발적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팩트풀니스>같은 저서와 아프리카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이제 아프리카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장밋빛으로 발전하고 있지만은 않다. 최근 수단 내전으로 교민들이 대피한 뉴스가 보도됐고 영화 모가디슈가 인기를 얻으며 소말리아 문제가 조명 받았다. 짐바브웨 같은 국가 문재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대륙이다.

아프리카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보통 서구 식민 지배의 도덕적, 역사적, 경제적 책임과 인권보호 따위를 근거로 그들에 대한 원조를 정당화하지만, 계속해서 서구 식민 지배의 유산을 들먹이며 아프리카의 혼란한 상황을 서구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왜 아프리카 원조는 작동하지 않는가>의 저자 로버트 칼데라시는 기존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는 세계은행의 국제 개발 분야에서 일하며 아프리카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인물인데, 직접 경험하고 분석한 내용으로 아프리카 개발과 원조를 비판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은 2005년에 발간됐지만 고질적 문제의 비판과 시사점은 유효하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참담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식민주의적 역사관으로도 비칠 만큼 비판적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의 주장을 들으면 굉장히 복잡한 문제, 아프리카 나름의 문제가 존재함 볼 수 있고 저자가 실질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서구 혹은 국제기구는 그동안 수많은 돈을 아프리카 원조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 돈들은 대체로 부패한 정치인들의 손으로 들어가고 시민들은 돈이 어디로 쓰이는지도 모르며 정치적 분쟁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저자는 대체로 정치적 지도자가 문제인 경우가 다수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고질적 문제임을 분석한다.

아프리카인은 왜 이런 부패한 정치인들을 두고 볼까? 저자는 이 원인을 문화적으로 분석한다. 이는 인종 차별적으로도 비칠 수 있는데, 만약 문제를 설명하거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설득력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정치인들의 지속적 부패에 대한 원인으로 아프리카의 문화와 부패, 정치적 정당성을 든다.

아프리카인은 주변 세계와 동화되려는 성향이 있고 자신의 삶 개선에 무관심하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에 대비되는 아프리카의 집단주의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가족 우선주의와 눈앞의 상황만을 보는 성향과 합쳐져 저축과 미래에 대한 계획 부재와 가까운 사람을 챙기는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성에 대해 보수적이기에 에이즈가 잡히지 못하고 숙명론적 인식이 강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다. 또한 부패는 일종의 관행이 되어 정의감 넘친 인물도 금세 동화되고 야당은 부정부패를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그 부패된 권력을 누리고자 기회를 노릴 뿐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아프리카의 역사적 사실을 들며 으프리카의 현실을 설명한다. 서구의 평화유지와 정치적 안정 시도에도 정치적 증오와 인종적 차별로 서로를 말살한 것, 부패한 법과 사법제도, 단순한 구호에 의존하는 경제시스템, 서구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한 백신과 구호물품 거부의 모습이 현실이었다. 넬슨만델라 같은 희망의 경우도 물론 존재했지만 문제는 그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회주의적 자립 시도인 탄자니아의 사례와 자본주의적 자립 시도인 코트디부아르의 사례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한 국가가 일어서는 것은 체제도 체제지만 굉장히 고려할 것이 많고 어려운 문제임을 느꼈다. 국제기구의 원조 프로그램 또한 문제가 있었고 지역의 세부사항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부패는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문제다.

이런 고질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에 앞으로의 원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또한 서구가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심과 역사적 인종적 죄책감, 아프리카에 대한 낙관, 세계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그는 아프리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조금 더 구체적인 10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자금의 투명성과 정치의 투명성 추구, 원조의 효율성 개선, 민주주의의 발전, 에이즈의 극복, 시민사회 발전, 인프라 및 국가 연결과 국제기구의 통합적 운영과 같은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은 시장중심주의적이고 대부준의 원인을 아프리카 내부에서 찾기 때문에 비판점이 존재하지만 지금까지 일종의 관행으로 여겨진 단순한 원조와 서구의 자기만족적 원조 프로그램을 개선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해 의미가 있다. 개선과 개발은 서로 맞물려야 굴러가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그가 받은 비판처럼 스스로도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진 못하지만 최선의 방법임을 설명한다. 가장 강조되는 메시지는 원조도 원조지만 아프리카 국가 스스로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농민들의 튼튼한 성장과 자립, 시장의 정상적 작동, 국민의 민주적 의식 함양 같은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아프리카의 상황을 보면서 한 국가가 발전하는 데 얼마나 다양한 요소가 필요하고, 또 경제개발에 있어서 민주의식과 효율적 예산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낀다. 한국과 같은 국가가 만들어지려면 그것도 상당한 운이 따라야 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야 했음도 느낀다. 이 책에는 아프리카의 역사와 정치문제가 실려있기도 하고 세계은행의 관점에서 바라보기에 국제관계나 원조 시스템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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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국가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50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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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이름은 '국가'보다는 '정의'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정의는 무엇인지 묻고 끝에서는 왜 우리가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가로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치체제를 비교하는 것도 결국 어떤 체제가 더 정의로우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열린 축제에 갔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들리게 되는데, 그곳에서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를 묻다가 누군가 정의로운 삶을 이야기해버린다. 맙소사. 그렇게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곳에 몰려온 사람들과 문답해나가는데, 지루하지는 않다. 당시 사람들도 같은 인간이기에 '현실을 보면, 통치자(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결국 정의 아니냐' 같은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계속해서 질문하고 반박한다. 질문자는 지친다. 그래서 결국 처형당한 걸까(?)

 

우리가 이런 토론에서 다양한 논박을 기대하긴 어렵고 플라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재미다. 반박하고 싶은 것이 한 두 개 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는 말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고 인간은 언젠가 죽고 소크라테스는 결국 죽기 때문이다... (?)

 

먼저 국가관에 대한 인식이 도드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듯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인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말한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논리 구조를 쌓아나간다. 국가에 이로운 것은 온 힘을 다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통치자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통치자의 견제하는 국가의 체제를 만들기보다는 각종 시험을 통해서 살아남은 철인의 통치를 추구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나온다. 철학자는 이데아를 아는 자다. 국가 통치 또한 그래야 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치체제의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왕도정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완벽한 자식을 낳지 못하고, 내분을 통해 명예정으로 이어진 통치자는 명예욕과 승부욕이 강해져 자산평가를 기준으로 통치자를 세우는 과두정으로 넘어가고 사회는 두 층으로 양분되어 분열된다. 지배층은 무절제하게 되고 반란을 일으켜 피지배층이 같은 위치에 서게 되면 부자들의 쓸모를 의심하고 쫓아내고 시민들에게 부를 나눠줘 국가 관직을 제비뽑기로 배정하는 민주정이 탄생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자유로운 민주정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정치체제"라고 말한다. 왜냐, 자유롭게 무엇이든 선택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유분방함을 싫어한다. "반박시 네 말도 다 옳음"소피스트들을 반박했던 것처럼. 그는 무엇인가의 쓰임이 어느정도 정해져있고 규칙 있는 것으로 세상을 여겼기 때문이다.

 

민주정에서는 능력이 있어도 반드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평판만 좋으면 사람을 높이 평가해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고위직에 올려준다. 자유는 무정부 상태를 낳고 질서를 흩트린다. 결국 과두정이 지나쳐 민주정이 됐지만, 민주정이 지나쳐 참주정이 된다. 극단적인 자유에서 거대하고 야만적인 예속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부자와 같은 자들을 억제하자는 일종의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민중의 지도자가 등장하고 그렇게 정상에 오른 민중의 지도자는 자기는 참주가 아니라며 많은 포퓰리즘적 약속을 행하며 전쟁을 벌이고 일부 반대 세력은 억압한다. 그렇게 주변을 하나하나 없애고 다 숙청한다. 이런 결말을 낳기에 소크라테스는 왕도정을 추구해야 한다 말한다.

 

마지막은 에르라는 남자의 이야기, 전투에서 죽었지만 살아나 저승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전해주는데, 여기서 굉장한 윤회사상을 엿볼 수 있다. 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혼에 대한 이야기는 파이돈에 더 잘 나와있다) 사람이 죽어 혼이 되어 자신의 다음 삶을 선택하는데, 아무리 질 나쁜 삶을 골랐다 하더라도 지혜를 추구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승에서의 삶에 따라 선택권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모든 건 자신의 선택이며 중용의 삶을 선택해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사고란 참 비슷하지 않은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이런 윤회사상도 결국 인간의 정의추구와 맞닿아있다고 본다.

 

'불의한 자는 더욱 불의해진다' 의로운 자는 자기 혼을 훌륭한 본성의 지배를 받게 할 것이고 그렇게 만드는 학문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데아에선 불의한 자는 통치할 수 없다. 그는 화합을 이뤄 이성 격정 욕구가 자기들의 최적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추구했다. 플라톤은 모든 것은 고유의 역할이 있고 이것을 잘 해내는 것을 조화로서 강조하지만 플라톤도 이것이 힘들 것임을 안다. 마지막에 신의 축복이 없는 한 이런 철인이 통치하는 일은 드물 것이라 말한다.

 

물론 오래된 논의다. 그리고 현재의 민주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입장에서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의외로 구시대적이고 다양한 논의를 이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중요성은, 통치체제들을 비교하고, 정의에 따라 어떤 체제가 옳은 가 하는 논의를 구체적으로 다뤘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의 논의들은 이데아론으로 향하기에 적어도 통일성이 있다고 여길 수 있으려나. '니코마코스 윤리학'보다는 쉽게 읽히며 각주 또한 친절하게 돼있다. 이제 현대지성 클래식은 믿고 읽는다. 교양서적으로 더욱 쉽게 읽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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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한길그레이트북스 40
윌리엄 제임스 지음, 김재영 옮김 / 한길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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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내가 믿고 있는 신의 개념과 타인의 개념은 일치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읽고 '같은 신'을 섬긴다고 하지만, 같은 종파를 가진 저 멀리 떨어진 곳의 신도와 나의 신앙이 100% 일치할 수 있을까? 또, 현대의 종교라고 하는 과학적 믿음 자체도 그 세부적 가설과 믿음이 다양한데 우리가 '믿음'이라는 체계를 하나의 공통담론으로 여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살기 피곤해진다) 그니까 쉽게 말하면, 텍스트로만 배워서 너와 내가 믿는 게 100% 같은 것이냐는 말이다. 사실 경험하는 것은 달랐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와 체화하지, 외부의 것으로부터 뇌에 달달 외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외부적으로 받아들여진 종교는 너와 나를 구분하는 잣대가 될 뿐이었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종교적 의미란 무엇일까? 윌리엄 제임스는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갑자기 "신내림을 받았다" 혹은 "번개를 맞았는데, 갑자기 천국이 보였다"라며 자신이 신과의 어떤 관계를 경험하고 획기적인 이론을 들고 오는 종교인들을 몇 보지 않았나. 사실 농담으로 말한 것이지만,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 속에 종교의 근원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 학자로 알려져 있는 윌리엄 제임스의 대표 저작<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다. 먼저 프래그머티즘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흔히 '실용주의'로 불리는 현대철학의 한 학파로, '경험'을 강조한다.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입문서로 [듀이&로티: 미국의 철학적 유산, 프래그머티즘]을 추천한다.

제임스는 지식으로 우리의 삶이 개선되거나 향상되는 것을 원했다. 그 초점이 어떤 '올바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 조금 더 너그러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고를 가졌던 제임스는 집에 박혀서 연구하는 칸트 같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너무 깊은 과학적 논쟁도 지양했으며 같은 의미에서 너무나도 (그의 입장에서) 의미 없는 신학적 다툼 같은 것도 의미가 없었다. 내가 보는 그의 의미지는 어느 정도 중간선상에서 삶을 개선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 관점은 종교 연구에서도 보인다.

"제임스는 어떤 특정한 종파나 종교의 관점에서 종교현상을 연구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어떤 특정한 철학 사조나 학파의 관점에서 철학을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 둘을 엮을 수 있는 전인적인 인간 이해의 관점, 즉 종교연구로부터는 감정적 측면, 그리고 철학연구로부터는 지적 측면을 모두 포함시키는 관점에서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윌리엄 제임스의 전반적 사상을 프래그머티즘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실러가 처음 사용한 휴머니즘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p.27)

이론에 조금은 오류가 있어도 그 종교가 삶에 의미를 주면 참이라고 여겼다. 그는 과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그니까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이론보다는 경험이 더 우선된다. 제임스는 애초에 종교연구에서 실증주의,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삶의 다양한 현상들이란 관념적이고 논리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연결고리들을 하나의 현상 안에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연결점들의 상호 관련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는 어떤 현상의 실재도 분명하게 드러내놓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은 '종교란 무엇인가' 따위를 묻는 내용은 아니다. 종교적 경험은 그 현상 자체,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것들을 입증하기 위한 수많은 사례들이 내용으로 꽉꽉 차있다. 그러면 그런 현상들에서 공통적인 몇 가지 특징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고, 자신이 어떤 진리를 발견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 종교적 삶이라는 것은, 그저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인간 사회 혹은 개인의 본질적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에 있어서 우리가 제도화한 것이 믿음으로 연결되려면 그 간극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세계사에서 서양 종교를 전파할 때 보였던 그 간극을 폭력으로 극복했던 모습과 문화 간 일치점을 기반으로 극복한 모습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에게 종교의 의미는 다양한 여러가지 종교적 모습 속에서 보인 본질적으로 같은, "공통적인 종교적 경험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성스러운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과 관련지어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한, 종교는 인간 개개인들이 고독 가운데 표현한 감정들, 행위들 그리고 경험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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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날 -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현인들
김언호 지음 / 한길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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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인생을 살아가다 한 시대가 끝났음을 느낄 때가 있는데, 가령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은퇴했거나, 그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올 때다. 나에게 그것은 최근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조세희의 작고 소식이 들려올 때였다. 그들은 이제 책 속이나 많은 이들의 기억 한 편에 남아 간간이 들춰진다. 


출판사 「한길사」의 대표이사인 김언호는 세대의 인물들을 기억하고 다시 한 번 알리기 위해 팬을 들었다. <그해 봄날>은 유신시대를 거쳤던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출판사 대표가 직접 바라보며 서술한 이야기다. 출판사 대표인 김언호가 만났거나 한길사를 통해 책을 출판한 인물들과 함께했던 한길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세대의 기억을 봄날로 이름지었다.



함석헌, 김대중, 송건호, 리영희, 윤이상, 강원용, 안병무, 신영복, 이우성, 김진균, 이이화, 최영준, 이오덕, 이광주, 박태순, 최명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이들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익숙한 이름들이 보일 것이다. 일단 그가 가장 애정하는 사람이 함석헌 선생이었다. 특히 그는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을 그토록 좋아했는데, 함선생은 선비 그 자체였다. 할 말은 하고 사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박정희조차 쉽게 다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꼽은 인물중 리영희같은 논란의 인물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가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논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정주행했다. 생각보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단순하게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은 적다. 시대의 인물은 시대의 담론과 함께한다. 북한에 가족을 둔 강원용 목사와 리영희 선생, 고국을 떠났지만 고국을 생각하며 작고할때까지 통일을 염원한 윤이상 선생과 같은 인물의 의지가 풍긴다.


그렇다. 이 책은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출판사 대표라는 인물이 해설자가 되어서 인물들을 설명한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이야기해주는 옛날이야기 같아서 술술 읽히기도 한다. 읽고 나면 마음속에 무엇인가 잔잔히 물결치는데, 이것은 아마 시대의 정신이라고 하는, 인간들만이 전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할만한 것이 우리의 마음과 공명하는 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인간의 이야기에 감응한다.


한길사와 김언호는 파주출판도시의 기획과 건설에 앞장선 개척자다. 한길사는 이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파주로, 강남 신사동에 있던 회사를 옮겼다. 김언호에게는 꿈이 있었다. 책의 도시, 책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꿈이었다. 그것은 출판인들의 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꿈은 결국 이뤄졌다.



책을 읽고 출판사 직원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한국 현대 역사를 건너온 출판사 대표이사 '김언호'라는 특수한 인물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읽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시대의 인물들과 힘듦, 고난을 함께했다.  「한길사」의 사무실은 창고 같은 곳이기도 했고 그는 정부에게 위험인물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일종의 기억 혹은 추억이 되어 봄날로 불릴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는 일종의 '기자'이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의 주역과 함께할 수 있음은 축복이기도 하다. 나도 언젠간 나의 세대를 기억하며, 나만의 세대를 봄날로 기억하겠지


사실 나에게 한길사가 좋은 큰 이유는 많은 고전을 번역해 읽을 수 있게 해줬다는 것(?)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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