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PM 밤의 시간 다음, 작가의 발견 7인의 작가전
김이은 지음 / 답(도서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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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메일 창을 열었는데 이상한 메일이 하나 날아왔다.

뭐지? 하고 클릭했다가 너무 강렬한 색감과 자극적인 문장들에 누군가 악의 섞인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예전에 심술궂은 아이들이 고의로 무서운 영상이나 사진을 보여주는 것처럼. 살짝 화가 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압도되어 마지막까지 내리고 나서야 어떤 소설의 서평단을 모집하는 메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메일을 보는 내내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는데 서평단 모집이라는 문구에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이미 그 광고 자체에 압도되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이 책은 무조건 읽어야 해, 라는 일념으로 신청했고 운 좋게 책이 나에게로 오게 되었다.

예전에 「악의 연대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악은 어디서 탄생해서 어떻게 끝이 나게 되는가,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다. 다만 영화에서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소설에서는 단지 소름과 허탈함을 느꼈다는 것 정도가 다를까.

흔히들 그렇게 말하고는 한다. 돈에는 눈이 없다. 돈에는 도덕이 없다. 욕망이라는 것은 돈과 권력, 그 밖에 사랑이나 기타 등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크게는 돈과 권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니까 욕망 또한 도덕과 그리 친하지 않은 단어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순수하게 이기적일 때 상황을 어떻게 변해갈까.

소설은 초반부부터 어딘가 삐걱거린다. 긴장감을 유발하는 캐릭터들이 나오고 불안함을 가중시키는 상황들의 연속.
일단은 주인공부터가 묘하다. 이중인격자 같은 면모에 자신의 경제 능력과 알맞지 않는 커다란 욕망, 잔인한 말과 생각들. 주인공을 보고 미친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주인공의 딸을 보고는 말 그대로 경악했다. 그리고 그런 딸의 생각을 고쳐주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엄마라니.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엄마와 딸이 조금 이상하고 아빠 쪽 가족들이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것 말고는 그런대로 평범한 가정이라 할만 했다. 차별받는 것에 질투를 느낀 누나가 동생을 계단에서 밀어버리기 전까지는.
이 일은 소설 초반부에 벌어지며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던 엄마는 겁에 질린 딸의 모습을 보고 이것은 전부 어른의 잘못이라고 죄를 전가해 버린다.

그녀는 아마 그 일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어떤 이유를 들먹이며 사건을 저질렀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에 그랬듯. 원래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려운 법이며 두 번, 세 번부터는 아주 손쉽게 저지를 수가 있다.

그녀는 베일에 싸인 어떤 조직을 알게 되고 본격적으로 사건을 저지른다. 자신의 죄에 100g의 무게 추를 더해가며.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각자 양심의 크기에 따라 미세할 수도 있고 엄청 거대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아무리 극악무도한 살인마라 해도 아주 조금의 죄책감 정도는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여기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라서 그녀는 티끌만큼의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중얼거리고는 한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마치 양심을 억누르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살해하고 그걸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딸이 행복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그녀를 보는 내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악이라는 건 어째서 이토록 자기기만을 일삼는 건지.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이 어떨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내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 바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뭘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어졌다.
다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느껴지는 이 허망함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소설은 처음부터 긴장감을 유발하며 끊임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며 읽는 내내 조금의 지루함도 느끼지 못했다. 책의 어둡고 불온한 분위기가 나를 잠식해 와서 하루 정도 텀을 두고 읽어야 했다는 게 단점이랄까. 하지만 그마저도 누군가를 온전하게 사로잡는 매력을 지녔다는 뜻일 테니.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초반부쯤에 접속사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것. 개인적으로 접속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접속사를 쓰지 않아도 될 문장에 굳이 접속사를 집어넣으니 읽는데 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작가님의 스타일인 듯싶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책 자체는 재미있게 읽었다.

선택받은 이들은 애초에 안전하며
그 어떤 불안이나 공포로부터도 보호받는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과거에 신에 의해
집단적으로 행해진 것과 달리 지금은
순전히 개인의 능력에 따라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선택은 모든 시스템에 의해 존중받는다.
동반자 클럽은 스스로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일종의 서비스다.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러한 구원을 탐욕이라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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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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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중반까지 좀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롤리타가 더 재미있네, 하고 심드렁한 생각마저 가졌다. 주인공이 어디가 불안정한지 자꾸 왔다갔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정신 사납게 구는 통에, 좀체 집중이 되지도 않고…….

다만, 한 가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 호기심과 궁금증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이렇게 자기변명이 긴 걸까.

게르만이 어느 날 자신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 무언가를 계획하는데 초반에는 그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점점 확실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게르만이 하려는 짓과 생각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는 초반에 지루함을 느꼈던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것 같다.

롤리타가 더 재미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본질을 보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두께는 롤리타에 비해 한참 얇지만 그래도 롤리타 만큼의, 아니 롤리타를 읽을 때보다 더한 스릴과 긴장을 선사한 책이었다.

게르만은 계속해서 범죄의 예술성, 아름다운 기교 등을 논하는데 범죄에 대해 어떤 변론도 해줄 수 없는 나는 그런 생각에 전혀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일까. 게르만이 저지른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이대로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서로 공존을 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게르만은 스스로 아주 완벽한 범죄를 꾸몄다고 생각을 하고 부인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서 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 그렇지만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상황이 매우 이상하게 꼬여가기 시작한다.

일단, 독자는 철저히 게르만의 시점에서 상황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이 완벽하게 똑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혹시 사실 두 사람은 그저 닮은 정도고 게르만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 착각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신문에 적힌 말을 보는 순간부터이다.

여기에서 나는 자연히 롤리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롤리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험버트처럼 게르만 또한 지독한 이기심과 안하무인으로 스스로가 만든 함정 속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 게르만이 범죄를 완벽하게 은폐했다고 확신했던 것이, 자동차에서 발견된 무언가를 통해 철저하게 깨지는 순간, 나는 아찔한 충격과 함께 어째서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지? 하는 당혹감에 빠졌다.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초중반까지는 게르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가 과연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가 하는 호기심에 집중해서 보라고 권하고 싶다. 게르만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그 장면을 지나고 독자가 게르만이 결코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즈음에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결말이 덮칠 것이다.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무슨 수를 써서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이 악당의 최후는 어긋나 버린 예술성과 함께 철저하게 버림받게 됨으로서 어떤 만족감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 멋진 베이지색 외투를 걸쳤고
우아한 모자를 조심스럽게 썼다.
마지막 한 획이 남았다.
노란 장갑.
"좋아. 몇 발짝 걸어보지.
어디 보자. 자네한테 다 잘 맞나?"
그가 나를 향해 걸었다.
손을 주머니에 찔렀다 뺐다 했다.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를 쫙 펴고 으스대며 멋쟁이 흉내를 냈다.
"다 됐지, 다 된 거지?"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어디 제대로 좀 보자…….
그래, 다 된 것 같은데…….
이제 돌아서. 뒤태가 어떤지 보고 싶어……."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그의 등에 총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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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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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뮤지컬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영화나 책과 마찬가지로 뮤지컬도 무척 좋아하고 즐겨 보는 나로서, 뮤지컬 레베카의 어느 한 넘버링에 마음을 빼앗겼고 온 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거대한 무언가가 머리를 내려치는 충격을 받았고 나는 외쳤다. 이 소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없는 돈을 긁어 모아 책을 사기 위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을 때, 느낀 것은 실망감이었다. 사람들이 책 레베카에 단 리뷰 중 대부분이 번역이 엉망이라는 것이었고 책이 읽고는 싶은데 엉망인 번역판으로 읽고 싶지 않은 나는 많이 망설여야 했다. 그래서 결국 일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며칠 동안 이 책만 붙들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번역이 그렇게 엉망은 아니었고, 단지 다른 책들에 비해서 오타와 틀린 맞춤법이 유독 많았던 것만 빼면. 문장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 한 충분히 읽을 만하다고 판단, 책을 반납하고 나서도 책 내용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아 구매를 해버렸다.

레베카는, 소설의 제목임과 동시에 소설 속 배경인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안주인으로 이미 죽은 지 수개월이 된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점은, 이 레베카가, 이미 망령이 된 레베카가, 맨덜리 저택을, 남녀 주인공을,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집어삼켜버렸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나˝는 무려 20살 넘게 차이가 나는 맥심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맨덜리로 오게 된다. 새로운 드 윈터 부인으로서. 그녀는 처음엔 부푼 가슴을 안고 아름답고 유명한 맨덜리로 오게 되지만 그곳에 마주치는 것들은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레베카를 숭배하는 댄버스 부인, 여전히 레베카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맥심, 레베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또한 매력적이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 레베카와 ˝나˝를 비교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들.
나는 레베카는 이미 죽었다고 애써 되뇌며 맨덜리에, 맥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면 아래에서 배 한 척이 떠오르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결말로 치달아간다.

이 소설은 독자가 어쩔 수 없이 레베카에게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런 식으로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소설이다.
애초에 레베카는 무척 매력적으로,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드러나는 반면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심지어는 레베카에 대한 자격지심까지 가지고 있다.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은 레베카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장치다.

게다가 레베카에 대한 정보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셀 수도 없이 많이 흘러나오는 반면,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이름조차 말이다.

˝당신 이름은 아주 독특하고 사랑스러워요.˝

그래서인지 나는 레베카보다는 오히려 주인공인 ˝나˝에게 더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가 얼마나 매력 있느냐는 둘째 치고.
나는 어리고 사랑스럽고 순진하며 학생에서 갓 벗어난 20대 초반의 여자이다. 혹은 10대 후반일 수도 있고.
이처럼 다분히 의도된, 어딘가 절제되어 보이는 정보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것 빼고는, 레베카가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책 속 등장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을 읽는 독자들까지 레베카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나중에 가서는 주인공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이다. 단지 레베카만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이 소설이 끝을 맺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레베카만.

처음에 레베카에게 느꼈던 것은 호감이었다. 사람들의 설명만 보면 친절하고 당당하고 화려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자. 한 번 보면 시선을 빼앗기고 마음까지 저당 잡혀 순식간에 발밑에 엎드리도록 만드는 그런 여자.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인 ˝나˝가 느꼈던 지독한 패배감을 나 또한 똑같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맥심이 이 여자를 사랑했고 잊지 못하는 이유가 납득이 될 정도로.
그 다음에는 질투심. 이것 또한 이해가 된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그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그리고 잇따른 패배감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가로막던 장벽이 걷히고 진실이 표면에 드러나는 순간에 느껴지는 것은-
경멸과 환멸, 증오. 그것을 억누를 정도로 가슴 속 깊이 느껴지는 어떤 두려움.

뮤지컬은 조금 더 행복한 결말에 중점을 맞춰 맥심과 나의 로맨스를 부각시킨다. 소설과는 다르게.
뮤지컬도 뮤지컬 나름대로 재미가 있지만 나는 소설의 엔딩도 나쁘지 않았다.

주인공인 ˝나˝가 우리는 결국 레베카에게 이겼다. 라고 말을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글쎄? 라고 반문하는 것은 끝끝내 지워지지 않을 레베카의 미소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 순간도 멈출 수가 없었고 레베카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삐걱거리는 고딕 소설 특유의 분위기와 스산하게 울리는 망령, 레베카의 발자국 소리, 내면을 파고드는 심리 묘사와 더불어 충격적인 결말까지. 어쩌면 평생 동안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그를 맥심이라고 불렀다.
나를 포함해 그보다 어리거나
별 생각 없는 이들도 그랬다.
맥스라는 호칭은 그 부인의 선택,
그 부인만의 권한이었다.
부인은 그 이름을 시집 속표지에
자랑스럽게 써 넣었으리라.
흰 종이 위에 그 힘차고 부드러운 필체를
거침없이 남기며.
얼마나 여러 번,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서
그 부인은 남편에게 그런 메모를 썼을까…….
작은 쪽지도 있었을 테고
그가 멀리 떠나 있을 때에는 몇 장에 걸쳐
그 둘만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도 보냈겠지.
그 부인의 목소리는 집 안 곳곳에서,
그리고 정원에서 울렸으리라.
시집에 남은 필체처럼 거침없고 익숙하게.
그리고 나는 그를 맥심이라고 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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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즈
J. G. 밸러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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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 같은 것을 좋아한다. 딱히 암울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다른 장르보다 선호하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끌린다고 할까. 아무래도 한없이 높이 솟아있던 무언가가 점점, 혹은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에 경이감을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당히 악취미다.

내가 하이라이즈를 읽으면서 주목한 것은,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의 전환. 한정된 장소에서의 명확한 상하관계. 위로 올라가 무언가를 바꾸려는 사람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 단지 지켜보는 사람.
여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이 아파트에 사는 누구도, 그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거다.

밖에서 보자면 하나하나 잘 나가는데다가 전부 다 중상위 권 이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부러워할 만하다. 한 건축가가 하이라이즈라는 아파트를 짓고 그 안에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건축가가 살고 있는 가장 위층은 권력의 끝을 상징한다. 그로부터 아래쪽으로, 점점 멀어질 수록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권력에서 밀려날수밖에 없고 먹이사슬로 보자면 자연에서 도태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가까워지기 위해 사람들은 위층의 삶을 소망하며 등반을 하듯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자신들이 있는 층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아래층 사람들을 보는 그들의 심정은 두려움이다. 현재의 자신들과 아래층 찌꺼기들의 운명이 한 순간에 뒤집힐까 두려워 그들은 건축가 앤서니를 선두로 해 올라오는 사람들을 막는다.

맨 처음에는 분명 서두가 되는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야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겠지만.
어쩌면 그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으로 이사 오는 것 자체가 이 끝없는 긴장감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이라이즈는 하나의 사회다.
그 안에는 굳이 아파트를 벗어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또 하나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다. 근데 기묘한 점은, 위층과 중간층, 아래층을 아우르는 권력의 중심이 그 세계에서 나온다는 거다. 층을 구분하는 중간 지점에는 놀이터와 상점, 학교, 수영장 등이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밖에서는 상당히 잘 나가던 사람들이 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스스로의 파멸을 촉구하며 권력이라는 것에 집착을 한다.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들은 다행히 하루 빨리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그 외에 나머지 사람들, 이 사회에서 적응을 해버렸거나 여기 아니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사람들, 용기가 없어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남아 하이라이즈는 끝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낸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도대체 경찰은 이 상황을 그저 방관만 하는가.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중 정상인은 단 한 명도 없는가.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나.
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 바로 그들이, 누구도 아니라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들은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입을 다문다는 함묵적인 불문율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출근을 하고 돌아와서는 위로 올라가기 위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전쟁을 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마치 우리는 참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있어요, 라고 광고를 하듯 현란한 파티를 벌인다. 그것을 보며 밖의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참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다.

고작 아파트일 뿐인데, 어떤 공간 하나를 두고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최고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 작가에게 그저 묵묵히 박수를 보낼 뿐이다.
하나의 공간 안에서 이런 이야기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들이 인간이라서가 아닐까. 다른 무엇도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권력으로의 욕망, 이대로 가다간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것들이 모여 절망을 구축해간다.

소설은 마지막에서 시작해 마지막에서 끝이 난다. 내가 소설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로버트가, 어쩌면 이 하이라이즈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잘 적응한 인물이, 개고기를 뜯어 먹는 장면.

이 소설의 배경이 외국이고, 외국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것에서부터 하나의 무너진 세계를 엿볼 수가 있었다. 단지 절망만 남았을 때,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관념을 포기하기 마련이니까.

앤서니는 이 건물이
이웃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갔다.
특히 에베레스트 산이
자기보다 높다는 이유 만으로
무작정 등반하고 보는 리처드 와일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심한 척 종일 발코니에서
바깥만 내다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건물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로버트 랭 같은 개성 강한 인물들이
그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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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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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대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주인공이 여자아이인 줄 알았다.
남자와 만남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으나 표지가 무척 여성스러워서 그냥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주인공이 남자라는 걸 알자마자 순간 밀려오는 당혹감에 첫 장부터 다시 읽어야만 했다.
동성애에 편견이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무감각할 뿐이지만, 주인공이 동성애자라는 것에서 놀라는 걸 보면 아직은 그런 주인공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느낀다. 어쩐지 벌써부터 입맛이 씁쓸해져 버렸다.

첫 시작은 주인공인 레오폴트가 수용소로 가면서부터이다. 그로부터 비로소 수용소에서 해방되는 그날까지. 그들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욕구와 욕망을 억압당한 채, 매일매일 절망에 익숙해져 간다.
점차적으로 익숙해지는 절망을, 현실로 승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힘을 품고 있으니.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어떤 것에 놀라울 정도로 익숙해지면서 결국에는 그것에 벗어났으면서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소설 안에는 부서진 단어들이 가득하다. 부서지고 찢기고 한 데 섞여 자신들만의 언어를 이루어 내는 그 모든 말들이, 수용소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처참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그 단어들 때문에 오히려 읽는 내내 심장 한 구석이 뾰족한 무언가로 들쑤시듯 쿡쿡 아파왔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다음날 죽어도, 그것을 슬퍼하기 보다는 동료의 빵을 훔치는 것에 급급하던 나날.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그렇다고 짐승도 아닌.
그들은 배고픈 천사의 키스를 피하기 위해 숨그네를 덜렁거리며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견뎌낸다. 그래서 결국 배고픈 천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그들이 행복해졌는가 하면, 역시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레오폴트가 떠나는 것을 슬퍼하던 가족들이, 점점 레오폴트를 신경 쓰지 않게 되다가 나중에 레오폴트가 살아서 그들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문득 떠올리는 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벗어났음에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인생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용소 안에 있었을 때가 더 나았을까. 거기에서는 적어도, 존재 의미가 있었을 테니.

소설 속의 세상은 어떤 면으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기꺼이 희생하고, 제각각의 삶이 존재하며 반복되는 매일을 살아간다. 배고픈 천사를 등 뒤에 매달고 숨그네를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삐걱거리면서 익숙한 절망을 끝없이 곱씹어간다.
한없이 허기가 지고 미치도록 공허하고 쓸쓸한.

숨그네를 읽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책을 붙들고 한참을 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이 문장들 때문이었을 거다. 어쩐지 담담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우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
흔들림 없이, 어설픈 만족감으로 시체를 처리한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듯하다.
그만큼 착각은 더 심해진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에 간 거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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